“자세히, 아주 자세히 들여다봐야 해.” 주지훈이 분한 <조명가게> 속 원영은 현주(신은수)에게 낯선 존재를 분간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하지만 이 대사는 자연히 원영에게 메아리처럼 돌아온다.
원영은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지만 쉽게 그 속내를 들여다보기 어려운 캐릭터다. 조명가게의 매출을 예스럽게 수기 출납부에 기록하고, 한밤중에도 선글라스로 눈을 가린 채 가게를 찾는 모든 손님을 ‘다나까체’로 맞이하는 등 모든 순간이 미스터리하다. 오직 원영만이 조명가게를 찾는 손님의 심연을 응시할 뿐이다. 그리고 주지훈은 원영의 시선이 곧 관객의 시선이라 상정하며 활자 속 원영을 바라보았다.
- 김희원 감독이 직접 전화를 걸어 <조명가게>의 출연을 제의했다고.
김희원 배우가 강풀 작가님의 만화를 원작으로 시리즈를 연출한다고 해서 1회 대본을 받아봤다. 대본이 술술 읽히고 재밌었다. 여느 때처럼 희원 형을 커피숍에서 만났다. 대본을 읽고 가졌던 이런저런 궁금증을 묻고 바로 출연을 결정했다. 하고 싶은 배역을 말해보라 해서 조명가게 주인인 원영 역을 얘기했다.
- 배우 경력이 있는 연출자가 메가폰을 잡은 현장은 무엇이 달랐나.
선배들에게 배운 이야기인데 배우의 유형을 굳이 둘로 나누면 메소드형 배우와 프로듀서형 배우가 있다. 나나 희원 형은 후자다.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의 현장에서 만난 김희원 선배는 작품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이 남달랐다. 희원 형이 배우이기 때문에 배우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감독이 아니라, 연출자 그 자체로 훌륭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프리프로덕션 단계를 아주 성실히 행하는 감독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혹은 말투가 김희원 감독에게 살아 있었다.
- <궁>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신과 함께> 연작과 <조명가게>까지.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에 다수 출연했다. 원전의 존재가 배우의 상상력에 영향을 준다고 믿는 쪽인가.
원작을 읽지 않는 편이다. 또 감독, 작가님과 꼭 사전에 미팅을 거쳐 연기를 위해 원작을 읽어야 하는지 확인받는다. 원작의 존재는 배우가 가타부타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배우가 작품의 기획 의도를 넘어설 여지가 없으니까. 강풀 작가님과 김희원 감독님이 이야기의 방향성을 세웠는데 내가 나 잘난 맛에 무얼 추가해 새로운 결괏값을 만들어보겠다고 하면, 나만 바보 되는 거지. (웃음)
- 원작의 조명가게 주인은 장년의 남성이었다. 이번 작품 속 원영은 몇 장면을 제외하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원작과 외양이 다른 이유는 작품을 끝까지 다 보면 확인할 수 있다. 강풀 작가님과 <조명가게>에 관해 가장 고민한 지점이 대사를 살리는 방법이었다. 만화나 소설의 문장은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문어체를 선택한다. 하지만 연출이 행간에 개입한 대사를 구어체의 말로서 전하려면 문어체의 미덕을 덜어내야 아름다워진다고 믿는다. 원작자이자 각본가인 강풀 작가님이 이 부분에 있어 굉장히 유연하셨다.
- 그간 눈과 눈빛을 연기나 화보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하지만 <조명가게>에선 내내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는데.
내가 지닌 표현 수단 중 가장 큰 도구 하나를 차단해야 하니 두려웠다. 마치 검도장에서 목검 없이 대련해야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감독님과 동료 배우가 있어 버틸 수 있었다. 화면에 어떻게 내 모습이 담기는지를 제작진에 하나하나 물어가며 연기했다. 안경을 썼을 때 시점숏이 어떻게 잡히는지, 내 시선이 카메라 동선에 따라 어떤 프레임으로 잡히는지 등등. 나는 그런 게 너무 궁금하다. 답에 따라서 디테일을 조정해가며 연기할 수 있으니 말이다. 현장의 모든 요소를 분석해 연기에 반영하는 일이 무척 즐겁다. 더군다나 <조명가게>는 배우의 정서에 기술 구현이 더해지는 작품이라 이와 같은 과정이 더욱 필요했다. 내가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 뻗는 타입이다. (웃음)
- 극 중 원영은 수호신처럼 자리를 지키며 조명가게를 드나드는 수많은 손님을 관찰하고 상대한다. 개성이 넘치는 손님들을 똑같이 응대하지만 그렇다고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유의 배역은 아니다.
원영은 감독 혹은 시청자의 시선을 담지하는 캐릭터다. 관객이 저마다의 감정을 투과할 수 있는 창이랄까. 이런 캐릭터일수록 성격을 구축하지 않는 게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예민하고, 살면서 절로 습득해온 육감이 있다. 때문에 일상에서 사람을 만날 때도 그곳의 분위기를 미세한 제스처와 미묘한 분위기만으로 감지할 수 있다. 배우의 눈에 보이는 요소면 시청자의 눈에도 자연히 보일 것이다. 만일 내가 상대하는 8명의 조명가게 손님을 어떻게 바라볼지 미리 설정하면 그 수가 시청자들에게 쉽게 읽힐 것 같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동료 배우의 호흡을 받아 리액션하면 원영의 호흡과 시선이 절로 분화될 테고 이에 시청자가 자연스럽게 이입할 수 있다.
- <조명가게>가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갔으면 하나.누군가와 깊은 관계에 이르기까지는 꽤 긴 시간의 퇴적이 필요하다. 아마 원작과 우리 작품이 미세하게 쌓이는 감정의 시간이 마냥 지루하지 않도록 호러의 문법을 초중반에 택했을 것이다. 그 길을 잘 따라 걸었을 때 어느 한 모퉁이에서 깊은 감정의 파도를 느낄 수 있다고 본다. 삶에서 설령 나쁜 사람을 만났더라도 그가 나쁜 것이지, 그를 이해해보려 애썼던 내 좋은 마음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기이한 사람들로 가득한 <조명가게>지만, 이들의 사연을 들여다보려 애를 쓰면 그 안엔 저마다의 가치와 타당한 인과가 자리한다. <조명가게>는 그 마음을 발견할 때까지 먼저 손을 내밀고 귀를 기울이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