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아는 척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 <소방관> 곽경택 감독
2024-12-12
글 : 정재현
사진 : 백종헌

“후련하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한여름에 촬영한 영화가 팬데믹 이후 한겨울에 개봉한다며 인사하니 곽경택 감독이 건넨 답이다. 곽경택 감독이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이후 5년 만에 2001년 3월4일 발생한 ‘홍제동 방화 사건’을 영화화한 신작 <소방관>으로 돌아왔다. <소방관>은 신입 소방관 철웅(주원)과 퇴직을 앞둔 베테랑 소방관 진섭(곽도원), 그리고 서부소방서 소방관 각각이 어떤 사명감으로 화마에 맞서 시민을 구조하는지를 요행 없이 담아낸 드라마다. 추측건대 곽경택 감독이 후련함을 느낀 까닭엔 뒤늦은 극장 개봉만 있진 않을 것이다. 그가 소방관의 삶을 취재하며 배운 프로 의식, 입봉 이래 가장 본격적으로 다룬 불, 어느 때보다 협업의 중요성을 강하게 느낀 현장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로 들끓은 현장을 5년간 간직해온 총사령관의 시원한 날숨을 지면에 담는다.

-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의 후반작업 당시 <소방관>의 시나리오를 받았다고. 처음엔 한 차례 고사했다고 들었다.

작품의 투자사 대표가 시나리오를 건넸다. 왜 이 이야기를 영화화하고 싶냐는 질문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소방관에게 감사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지 않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그 말을 듣고 어차피 만들어질 영화라면 내가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또 <태풍>이나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정도를 제외하면 작품에서 불을 전격적으로 다루어본 적이 없다. 감독으로서 새로운 스펙터클을 구현해보고 싶은 야심도 크게 작용했다.

- 실제 불을 활용해 다수의 화재 장면을 촬영했다.

CG와 실제 불의 활용 빈도가 반반 정도였다. 크랭크업 이후에도 고마운 우리 CG팀이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종류의 불을 구현해주었다.

- 불에 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이 듣고 싶은데.

만약 현장에서 특정한 불을 냈으면 그 불과 유사한 색, 형태의 CG 소스가 필요하다. 예컨대 기름이 발화할 때와 나무가 연소할 때 나는 불은 연기량이나 색이 전부 다르다. 그런 사소한 디테일을 입힌 큰불을 설정한 후 화면에 빈구석이 없도록 흩날리는 불꽃 등을 CG로 꼼꼼히 채우는 식이다. 처음 영화를 시작할 때 선배들로부터 배운 가장 중요한 원칙이 ‘안전’이었다. 그 원칙을 준수하며 현장을 운용해왔지만 나 역시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을 촬영할 때 뭔가 서두르다 폭약의 위치를 잘못 심어 배우가 화상을 입은 적 있다. 많이 반성했다. <소방관>의 경우 그때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현장이라 특수효과팀, CG팀이 프리프로덕션 단계부터 수차례 만반의 테스트 촬영을 거쳤다.

- 개봉을 준비하며 속도감을 올리는 방향의 편집에 신경을 썼다고 밝혔다.

바뀐 투자배급사(바이포엠스튜디오)의 설득이 컸다. 그동안 영화의 첫 장면엔 항상 주인공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니 영화의 리듬감이 살더라. 철웅이 간부 시험을 응시하고 난 후 진섭에게 답안을 제출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장면도 1차 편집본에선 빠졌던 장면이다. 애초에 회상 신으로 구상했던 장면이라 감정선이 툭 끊긴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철웅에게 어떤 깨달음의 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그 장면을 개봉 버전의 위치에 넣어보면 어떻겠냐는 조언을 들었다. 훨씬 이야기가 풍성해졌다. 역시 영화는 여러 사람의 훌륭한 협업으로 탄생한다.

- <소방관>의 큰 구조는 철웅의 성장담이다. 하지만 철웅과 진섭이 <굿 윌 헌팅>류의 일대일 멘토-멘티 관계가 아닌 점이 신선하다. 철웅은 여러 선배의 면면과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현장 경험을 통해 성숙한다.

주인공이 특정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시각을 갖는 구조가 모두에게 익숙한 작법이긴 하다. 그런데 그 틀에 철웅을 넣으면 이 친구가 밉상으로 비칠까 우려되더라. 어떤 시대에 살든 세대 충돌은 불가피하다는 점까지 이야기에 반영하고 싶었다. 철웅과 진섭 두 사람은 가치관의 차이로 충돌하지만 결국 사람을 구조하는 단 하나의 목적 아래에선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다.

- 앙상블 영화의 구성을 취하지만 캐릭터 각각의 사연은 실제 순직자들의 사연과 다르게 배정됐다. 각색 시 주안점은 무엇이었나.

실화 구현을 위해 홍제동 방화 사건의 유가족을 만나 힘든 기억을 상기하게 만드는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슬픈 기억은 묻어둘 필요도 있으니까. 각 소방관이 마음속 상처를 어떤 식으로 치유하며 일을 견디는가에 중점을 두었다.

- 소방복을 입으면 신체 대부분을 가릴 수밖에 없다. 화재 장면에서 다수의 감정신을 소화해야 하는 배우 입장에선 연기를 할 때 표정을 활용할 수 없다. 감독 입장에서도 배우의 세부적인 표정을 보고 디렉팅을 건넬 수 없다. 서로 난감하지 않았나.

면체(공기호흡기)가 반사광도 심하고 눈 빼고 모든 부위를 가리는 도구다. 배우가 감정을 전달할 도구가 눈과 육성뿐이다. 그런데 실제로 소방관들을 만나보니 이들은 화재 현장에서 감정을 배제한 채 건조하게 근무한다. 그게 소방관의 프로페셔널리즘이다.

- 팬데믹 이후 영화의 관람 환경, 영화 한편을 이루는 수많은 요소가 급변했다. 짧고 빠른 영상이 제공하는 순간의 자극이 범람하는 시대에 <소방관>이 택한 정공법이 묵직한 무게로 다가온다.

팬데믹 기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처음 영화를 한다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 딱 두 가지 당부를 건넸다. “좋은 영화 만들거라. 그리고 네 손 안에 들어오는 이야기를 만들거라.” 양손도 아니고 딱 한손에 쥘 수 있는 이야기, 내가 아는 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 내가 하면 잘 만들 수 있는 이야기를 선택하며 지금까지 왔다. <소방관> 이후 OTT용 작품이나 극장 영화의 시나리오도 써봤지만, 실제 프로덕션까지 착수하진 못했다. 감독 겸 작가로 태어난 이상 무언가를 계속 쓸 수밖에 없는 천성이다. 지난 몇년간 수많은 이야기를 꾸준히 집필했다. 지금은 빨리 현장에 나가고 싶다. 현장에서만 받을 수 있는 생동하는 에너지를 통해 즐거움의 원천을 되찾고 싶다.

<소방관> 속 이 장면

<소방관>을 본 관객이라면 영화 후반 인기(유재명)가 응급실에서 누군가에게 피치 못할 거짓말을 하며 차오르는 통탄을 애써 억누르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배우 유재명의 명연으로 완성된 이 장면은 놀랍게도 <소방관>의 촬영 첫날 찍혔다. “첫 테이크 이후 유재명 배우에게 좀더 슬픔에 잠겨 있는 연기를 요청했고, 그 깊이를 유재명 배우가 정확히 표현해줬다. 아무리 카메라 뒤에서 냉정해지려 해도 배우가 열연하면 감독 또한 사람이라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날 유재명 배우의 연기를 보며 현장에서 함께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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