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부터 지금까지 늘 해왔던 것처럼 그렇게” (김일란) 움직이자고 여성과 소수자들의 시민사회 운동을 독려하고, “계엄과 같은 비상 상황에서 수어, 문자통역 등의 장애인 정보접근성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 (이길보라)을 지적하는 등 탄핵의 역사와 과정은 물론, 그 이후를 위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감독들의 전언을 모았다. 이들의 목소리는 공교롭게도 비상계엄 해제 직후에 ‘민주주의와 인문학의 미래’라는 내한 강연을 펼친 주디스 버틀러(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 비교문학과 석좌교수, 젠더이론과 정치철학 이론가)의 말과 공명한다. “인종적, 민족적 증오 및 젠더와 성소수자에 대한 공격을 기반으로 하면서 자본주의적 축적을 추구하고 사회서비스의 파괴를 새로운 공공선으로 제안하는, 전쟁의 지속과 지구의 파괴를 추구하는 이 세계관에 맞서서 우리는 어떤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할 것인가?” (<한겨레21>)
이경미
- 영화 <비밀은 없다>,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 감독. 에세이집 <잘돼가? 무엇이든>을 냈다.
12월7일, 첫 여의도 집회에 나갔다가 각양각색의 응원봉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한때 내게도 멋진 아이유 응원봉이 있었지만 미래에 이런 사태가 벌어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무료 나눔한 일이 뼈아프게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그것을 당근마켓에 올렸을 때, 정말로 1초 만에 ‘짱구아빠’님이 쪽지를 보내왔다. 총알같이 달려온 그는 멋진 아이유 응원봉을 소중히 챙겼고, 너무나 고마워하면서 나를 위해 준비한 초코우유를 건넨 뒤 사라졌다. 바로 그 응원봉을 들고 짱구아빠님이 우리의 운동에 동참하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임대형
- 영화 <윤희에게>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시리즈 <LTNS>를 연출했다.
각종 무섭게 생긴 깃발들과 난무하는 욕설들 속에서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기도 했던 과거에 비해 지금의 거리에선 모종의 안전감을 느꼈다. 소속 단체 없이 혼자 나가도 ‘혼자 온 사람들’, ‘시위에서 피크민하는 사람들’, ‘전국 눈사람 안아주기 운동본부’ 등의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어 외롭지 않았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재건하고 지켜내는 것은 항상 시민들 이고, 이 땅의 민주주의는 뿌리가 튼튼하다. 특히 올해는 K팝의 뿌리가 민주주의였음을 자각하기도 했다. <삐딱하게>도 좋았지만… 아무래도 대한민국 민중가요 1등은 ‘다만세’(<다시 만난 세계>)가 아닐까?
이길보라
- 다큐멘터리 <반짝이는 박수 소리> <기억의 전쟁>을 만들었다. 국내 유일의 코다 단체, 코다코리아의 대표.
또다시 광장의 시간이다. 박근혜 탄핵 집회부터 현재까지, 농인의 정보접근권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계엄과 탄핵 이후, 어떤 정부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 다양한 정체성과 언어를 가진 구성원들이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정부, 언론, 시민단체, 시민 구성원들의 성숙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동안 창작자로서는 한국 영화, 문학, 콘텐츠가 전세계적으로 위상을 떨치는 가운데 이를 가능하게 했던 창작자 양성과 지원에 대한 예산이 삭감되었다는 것이 가장 먼저 피부로 체감되는 현실이었다. 창작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통로들이 사라지고 관련 행사들이 취소되는 등 생계를 위협 받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번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과 동시에 내려진 비상계엄을 보면서 이토록 역동적인 한국 사회에서 계속 창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됐다.
오세연
- 다큐멘터리 <성덕>을 만든 1999년생 영화감독.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자리를 뜨는 의원들을 집에서 혼자 지켜봤다면 분노와 무력감을 견디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 같다. 추위와 어둠에도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고, 같은 마음으로 켜진 색색깔의 빛이 거리를 채우며 빛나고 있는 걸 목격했기에 조금은 안심이 됐다. 이 겨울이 길어지더라도 혼자가 될 일은 없겠구나, 하고. 응원봉을 들고 나온 수많은 팬들을 고척이나 상암, 잠실이 아닌 국회 앞에서 만나는 경험은 반갑고도 애틋했다. 다만 그 현장에서도 외로운 순간은 있었다. 퀴어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발언을 시작하자 야유를 보내고 소리를 지르는 남성들을 보았다. 같은 목표를 위해 한데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모두가 상상하는 살기 좋은 세상의 풍경 속에 부디, 차별이 없기를 바란다. 우리는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응원봉을 흔들 것이다. 늘 하던 것처럼!
김일란
- 다큐멘터리 <공동정범> <두 개의 문>을 만들었다. 4년간 준비한 신작 <에디와 앨리스>의 공개를 앞두고 있다. 인권운동 단체이자 창작 집단인 연분홍치마 활동가.
나의 생애 경험에서 광장을 전유했던 첫 기억은 2008년이다. 광화문에는 그 어원처럼 빛을 환하고 아름답게 비추는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모였다. 10대 여성, 퀴어 여성, 장애 여성, 노인 여성 등 우리는 단단하고 강한 빛으로 정의를 위협 하는 불의에 맞섰다. 이듬해인 2009년 용산참사 현장에선 진실을 외쳤고 해고 노동자의 복직을 위해서 노래를 불렀으며 희망을 가득 채운 버스를 타고 다양한 교차를 만들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는 가만히 있으라는 국가의 폭압에 저항했다. 낙태법 폐지운동을 통해 몸에 대한 새로운 감각도 만들었다. 그뿐인가. 2016년, 획일적이고 남성적인 탄핵 정국에서 활기찬 움직임으로 여성혐오와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분리시키는 여성 정치를 펼쳤다. 지금은 2024년. 우리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움직임으로 역사적 변환을 이끌고 있다. 어느 퀴어 페미니스트의 구호처럼, 탄핵 이후의 세상에서 폭주하는 남성성은 해체되고 더 빛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늘 해왔던 것처럼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