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영화들은 요약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데이비드 린치가 만든 대부분의 영화가 이 부류에 속한다. <이레이저 헤드>(1977)부터 <인랜드 엠파이어>(2006)까지, 끔찍한 현실과 보이지 않는 마음을 담은 그의 영화들을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 영화들을 보고 컬트라고 말했고,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를 천재라 믿었다. 2025년 1월16일, 78살로 세상을 떠난 우리 시대의 마지막 초현실주의자 데이비드 린치. 조각과 그림, 사진과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보인 위대한 영화예술가의 행적을 되돌아본다.
1946년 몬태나주 미줄라에서 태어난 린치는 농무부 소속의 과학자였던 아버지를 따라서 미국 중부의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성장했다. 예술과 연관이 없는 환경이었지만 14살 무렵부터 그는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 데이비드 린치가 만든 단편영화는 영화보다 조형예술에 더 가까웠다. 움직이는 그림의 형태들, 그의 작품이 시네마의 개념에 근접한 것은 세 번째 단편 <할머니>(1970)부터였다. 이 무렵 그의 예술관은 명백하게 무의식의 형태와 얽히기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서 2007년, 파리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했을 당시 데이비드 린치는 자신의 미술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 “나는 인생의 밝은 면을 그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항상 양쪽을 모두 사랑했고, 한쪽을 이해하려면 다른 쪽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어둠에 집중할수록 빛이 더 많이 보인다.” 이 발언은 그의 필모그래피 전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기이한 꿈에 시달리던 곱슬머리의 스펜서가 헤어진 여자 친구의 가족들과 만난다. 그날 저녁 이후로 그의 인생은 바뀐다. 메리가 낳은 괴물 같은 형태의 아기를 돌보기 위해, 이제 그는 새로운 불안감에 시달려야 한다. <이레이저 헤드>의 이야기다. 놀라운 점은 이 환상적인 무대가 기대 이상으로 세심하게 채워져 있단 사실이다. 있을 법하지 않은 황당한 구상에도 그의 작업은 구체성을 띤다. 실질적인 환영과 꿈, 원시 상태의 끈적이는 형태가 스크린에서 구현된다. 이 과정은 관객에게 공포를 넘어 혐오감을 준다. 대개의 호러영화처럼 악에 의해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염증을 통해서 관객들은 무기력해진다. 그 경계의 감정들, 악은 두려움이 되고 세계는 암울해진다.
영화학과 졸업 작품이자 장편영화 데뷔작인 <이레이저 헤드>는 기대 이상의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당대 영화 팬들은 이 작품을 숭배했다. 이후 <엘리펀트 맨>(1980)을 통해 그는 자신의 독창성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해보였다. <이레이저 헤드>와 <엘리펀트 맨>, 데이비드 린치가 창작한 괴물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흉측함이란 측면에서 취약성을 드러낼 뿐, 그 존재들은 악의 원천이 아니다. 다만 평범한 사람들은 이들을 통해 자신의 파괴적인 증오를 확인한다. 1987년 5월 프랑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데이비드 린치는 “세상을 창조하고 그것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 영화를 찍는다”고 답한다. 이 질문은 키워드가 될 것이다.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에서 내러티브의 기술이나 장르의 규칙은 인용될 뿐 목표가 되지 못한다. 그의 영화에서 주체는 관객이다. 그러니 만일 <엘리펀트 맨>을 통해 평범한 존엄성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면, <이레이저 헤드>의 중심축도 스펜서가 아니라 작은 괴물이 되어야 옳다. 정상적인 존재로서 우리는 비정상적인 몬스터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블루 벨벳>(1986)의 잘려나간 귀는 특이점을 가진다. 어느 누구도 이 영화에서 귀가 잘린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 경멸이나 착취를 들여다보는 장치로써 이 물질을 활용한다. 잘린 귀의 모티브, 관객은 좁은 옷장의 틈으로 파괴적인 증오를 엿본다. 그 결과 정상과 비정상, 자연스러움과 기이함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기괴한 시각적인 경험이 환상 너머의 현실로 스며든다. 그가 창조한 괴물들, 그 부식된 것들은 지성의 통제 밖에 존재하며 또한 지성을 침묵시킨다. 대중적으로 인정받게 된 계기이자, 전설적인 성인용 TV시리즈 <트윈 픽스>(1990)의 주제도 마찬가지다. 트윈 픽스 마을의 미스터리함은 그 의혹의 실체가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관객들 모두가 짐작한다. 혐오감 혹은 공포감의 뒤에 있는 무언가, 우리는 다른 세계로의 진입로를 찾아야 한다.

SF영화 <사구>(듄, 1984)의 상업적인 실패는 상처가 됐다. 하지만 <블루 벨벳>과 <광란의 사랑>(1990)으로 그는 다시 자신의 색채를 찾았다. 이후 <로스트 하이웨이>(1997)와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를 통해 현대 미국영화의 새로운 거장으로 자리 잡았다. 대부분의 영화가 열린 결말을 취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플롯은 인과성을 가진다. 관객은 추리하고, 그 해독 과정에서 의미 탐구를 경험한다. 초기작에 비해 훨씬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소재들이 사회의 관습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어떤 모티브를 사용해도 기이한 이야기의 흐름은 단지 시초일 뿐이다. 빙산의 일부가 된다. 그러니 연상되는 사건의 변덕에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블루 벨벳>의 주인공은 ‘아메리칸드림’이고,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할리우드 꿈의 공장’인지 모른다. 물리적인 괴물 혹은 폭력적 형태가 실은 사회의 체제를 겨냥한다.
다행인 점은 <로스트 하이웨이>를 제외한 모든 영화가 결말에서 행복을 직시한다는 사실이다. 외관이 점점 더 흉측해지더라도 <이레이저 헤드>의 결말은 미소와 함께였다. <엘리펀트 맨>도 원작과 달리 평온하게 마무리되었다. 심지어 <트윈 픽스>의 소녀마저 천사와 만났다. 끊임없이 인간에게 연민을 표시하는 것은 어쩌면 데이비드 린치의 숨겨진 진심인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에는 인류애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인류에 대한 직시가 있었다. 이를 연민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끔찍하고 유치한 시적인 감수성은 차갑고 조용한 품격으로 마무리된다. 그 기이한 탐구는 이제 끝났지만, 관객의 경험은 갱신되어야 한다. 어떤 공포를 느끼더라도 찬양해야 할 감추어진 진심, 세상은 데이비드 린치가 만든 비뚤어진 좁은 틈을 잊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