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그의 조각들, 데이비드 린치를 배회하는 몇개의 키워드
2025-02-06
글 : 이우빈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제대로 말하기에 가장 어려운 영화감독의 이름을 꼽으라면 데이비드 린치를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그가 세상에 내놓은 작품들의 난해함을 떠나더라도 그러한 작품들의 기반이 꿈의 공장인 할리우드였다는 것, 그 안에서 디지털 영화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것, 그러면서도 통상적으론 컬트영화의 대부로 말해진다는 것 등의 난잡한 조각들이 그를 특정한 계보나 사조에 편입시킬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주변을 배회하는 몇개의 키워드를 통해 우리 곁을 떠난 데이비드 린치의 형상을 주물러본다.

컬트

<이레이저 헤드>

‘컬트의 제왕’, ‘컬트영화의 대부’. 데이비드 린치가 떠난 뒤 그의 이름에 가장 자주 수식된 단어들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데이비드 린치의 외적 행보는 컬트영화의 토대에서 출발했을 뿐, 지금 시점에서 컬트란 단어로 그의 전부를 통용하기란 부적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그의 첫 장편영화 <이레이저 헤드>는 1977년 작은 영화관에서 개봉해 1981년까지 장기상영하며 심야극장의 인기 상영작으로 거듭난 대표적인 컬트영화의 계보에 속한다. 그러나 이후 만든 <엘리펀트 맨>이 아카데미 시상식의 후보에 올랐고, <트윈 픽스>가 90년대의 브라운관을 지배했으며, <광란의 사랑>이 칸영화제에서 수상한 것까지 고려한다면 과연 데이비드 린치를 컬트, 납작하게 말하자면 소수의 마니아에게만 사랑받은 창작자로 규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단적으로 이야기할 때 90년대 무렵부터 지금까지의 콘텐츠 산업 환경에서 협의의 ‘컬트영화’란 불가능한 테제에 가깝다.

하지만 컬트란 기실 그것을 둘러싼 영화의 특정한 내적 텍스트와 기법, 혹은 그것을 둘러싼 관람과 소비 형식의 산업적 구도에서 단순히 일별할 수 있는 단어 역시 아니다. 움베르트 에코가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클래식 <카사블랑카>를 일련의 컬트영화로 지칭하며 수많은 인용과 클리셰를 조합해 만든 ‘무조건적인 숭배 대상’으로 일컬었듯이, 컬트영화의 중핵은 관객으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작품을 지지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광의의 패스티시에 있다. 미국 고유의 소프오페라 형식을 변주하며 대중적 인기까지 끌었던 <트윈 픽스> 시리즈나 <오즈의 마법사>를 변용해 유럽영화의 심부에서 주목받은 <광란의 사랑>처럼 데이비드 린치는 이러한 컬트영화의 내적 조건을 완연히 이해하고 그것을 ‘데이비드 린치’라는 일종의 장르로 변환한 셈이다. 컬트영화는 흔히 통용되듯 B급영화의 무질서한 외양을 갖춘다거나 반제도적인 주제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만 하여 완성되는 낯선 것이 아니다. 데이비드 린치의 경우처럼 왠지 모르게 하나하나의 장면과 그것의 컬래버가 마치 우리가 꿈꾸던 세상의 이면임과 동시에 이미 알고 있던 세계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그 기막힌 속임수가 결부되어야만 지금 시대의 컬트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 결론적으로 지금 우리가 아는 컬트영화의 형태란 사실상 ‘데이비드 린치’로 등치되는, 21세기 전후로 조정된 새로운 장르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데이비드 린치가 말해져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이우빈

할리우드

<멀홀랜드 드라이브>

코로나19에 대한 두려움과 폐기종 투병으로 LA 저택에 머물던 데이비드 린치가 최근 발생한 대형 산불의 여파로 거주지를 옮겨야 했고, 이 과정에서 심각하게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뉴스는 한 가지 공교로운 사실을 환기한다. 꿈과 명상을 통해 해결 불가능한 미스터리를 탐문하는 초현실주의자처럼 여겨지곤 하는 데이비드 린치가 언제나 할리우드에 발을 디디고 있는 영화감독이었으며 미국인들의 자산과 악몽을 공유하는 연출자라는 사실이다. 언젠가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다소 비판적인 어조로 린치의 영화가 할리우드 주류영화나 월트 디즈니의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 바 있지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린치의 작업에서 잊지 말아야 할 하나의 전제조건일지도 모른다. 린치의 영화는 할리우드가 꿈꾸는 이상의 외상적 이면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그가 SF 블록버스터인 <사구>의 연출자이자 <스타워즈 에피소드6: 제다이의 귀환>의 감독 후보였으며 <스트레이트 스토리>로 디즈니와도 협업한 바 있는 데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은 할리우드 ‘주류’ 감독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린치가 형성하는 이미지의 기원을 다른 무엇도 아닌 할리우드의 픽션적 기호들에서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오즈의 마법사>에 매료되었으며(<블루 벨벳> <광란의 사랑>), <길다>의 포스터와 <현기증>의 금발 머리로부터 분열하는 영화적 자아의 흔적을 발견하였고(<멀홀랜드 드라이브>), <선셋 대로>의 신경증적인 아름다움을 디지털카메라 시대의 불안으로 받아들였다(<인랜드 엠파이어>). 그의 화면은 할리우드 영화사의 거대한 기호들과 맞물려 있다.

그의 마지막 장편으로 남겨진 두편의 영화인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인랜드 엠파이어>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드는 행위의 불안과 결부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데이비드 린치가 창조한 인물들은 눈앞의 현실을 살면서 동시에 픽션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에서 현실은 갑작스럽게 태어나고 끝없이 변형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후반부에 다이앤의 집에 침입하는 노부부는 문 아래로 걸어 들어올 만큼 작지만, 다이앤의 눈앞에 위협적으로 나타날 만큼 거대하다. <인랜드 엠파이어>에서 촬영되는 영화는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니라 리메이크 작업이었고, 세트장에는 촬영 중인 배우들 말고 다른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에서 할리우드는 끝없이 뒤바뀌고 조각나고 증식하는 영화적 신체를 잉태하는 탐욕스러운 장소다. 그곳에서 ‘나’는 나의 자아가 나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고 흔들린다. <트윈 픽스>의 쿠퍼, <로스트 하이웨이>의 미스터리 맨, 그리고 “나는 죽었지만 동시에 살아 있다”라고 말하는 <트윈 픽스: 더 리턴>의 로라 파머처럼 그들은 여기에 존재하면서 또한 저곳에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낯선 타인으로 다시 만난다. 이처럼 할리우드는 돌연변이, 쌍둥이와 도플갱어, 이중인격자, 정신이상자, 장애인, 사형수, 과거의 유령과 낯선 손님, 그리고 마침내 내가 아닌 ‘나’를 불러들이는 영화적 장소이며 문화적 기반이다. 데이비드 린치는 바로 그곳에서 평생 영화를 만들어왔다. /김병규 영화평론가

디지털 캠코더

<인랜드 엠파이어> 촬영 현장.

데이비드 린치는 <인랜드 엠파이어>를 소니 DSR PD-150 카메라로 촬영했다. 모두가 필름 룩에 근접해가는 디지털카메라의 시각적 변혁에 주목하던 시기에 그는 터무니없는 저해상도의 비디오 화면을 제공하는 카메라를 선택했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우리의 시각보다 현실을 더욱 선명하고 투명하게 담아내는 깨끗한 디지털 화면이 아니라 거친 픽셀과 평면적이고 흐릿한 질감, 과도한 깜빡임과 밋밋하고 불투명한 색감의 캠코더 화면으로 완성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린치는 이 영화의 촬영에 사용된 낮은 해상도의 카메라가 1930년대 할리우드 고전영화의 질감과 비슷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하며 마치 인상주의 화가처럼 그것이 “나의 새로운 붓”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최근까지도 디지털카메라에 대한 린치의 견해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2022년 <인디와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린치는 디지털카메라가 창작 과정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세 가지 이유를 언급한다. 가벼운 카메라, 작은 조명, 그리고 긴 촬영 시간의 확보가 그것이다. 그는 필름 카메라를 거대한 ‘공룡’에 비유하며 필름으로 촬영되는 현장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거대하고 시끄러운 필름 카메라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곳에 귀중하고 중심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근본적인 인상이 있다. 카메라와 연출자, 배우와 연기가 실행되는 위치가 정해져 있고 그 좌표를 촬영이 벌어지는 현장으로 이해한다. 린치는 필름이 제공하는 이같은 환경이 유기적 영화제작을 가로막는다고 지적한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흐릿하고 부정확한 시각적 상태를 전제한 뒤 어디든 중심이 나타날 수 있고, 어떤 형태로든 영화가 진행될 수 있다는 야심을 내비친다. 그는 부식과 접촉에 취약한 셀룰로이드 필름의 지표적 조건에서 이탈해 시작하지도 끝나지도 않는 불안정한 이미지의 지대에 영화를 재배치한다. 린치의 말을 빌리자면 “이 소형 카메라는 영화를 다르게 보게 만든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정해진 시나리오 없이 장면 단위로 만들어지는 직관과 인상에 맡긴 채 3년 동안 촬영을 진행했다고 한다. 단 한두번의 테이크를 촬영해 오케이컷을 만드는 것으로 알려진 린치에게 중요한 것은 반복할 수 없는 일회적인 조건에서 생겨나는 순간의 대체 불가능한 감각을 구획하는 작업이다. 이미지를 감싸는 일회성의 감각은 필름이라는 거대한 기계에 달라붙어 선명하게 기록되는 대신 구분과 경계가 말소된 디지털 캠코더의 촬영 현장에서 순식간에 나타나고 또 사라진다. 데이비드 린치에게 디지털 캠코더란 ‘끝’이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무한정한 행렬을 비로소 적확하게 찬미할 수 있는 도구였을지도 모른다. /김병규 영화평론가

추함

<엘리펀트 맨>

데이비드 린치의 미학은 대개 추함에서 나온다. 이 추함의 지표는 물론 이미지 위의 괴이들, 이를테면 끈적한 침과 피와 무언지 모를 점액과 잘리고 뒤틀린 몸뚱이와 여러모로 불쾌한 인간의 표정들. 인간의 ‘잘린 귀’로부터 시작하는 <블루 벨벳>의 성적인 가학과 피학, 확장하자면 <인랜드 엠파이어>의 갑작스럽고 불안정한 지대를 예견하는 듯한 중년 여인(그레이스 자브리스키)의 흡혈귀 같은 몰골로부터 나오는 긴장감. 처음으로 돌아가 <엘리펀트 맨>과 <이레이저 헤드>의 그로테스크한 신체의 풍경들까지, “시체가 썩어가는 이미지에서 놀라울 정도로 독특한 질감”을 발견하기도 했다는 데이비드 린치의 작업 일반엔 기성의 아름다움에 대적하는 추함의 일면들이 가득하다. <추의 역사>에서 움베르트 에코가 말했듯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 사조 이후 추의 형상은 과거와 달리 예술적인 탐미의 영역으로 바뀌어왔고, 그 해방의 영화적 계보엔 응당 데이비드 린치의 이름이 각인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추함의 의미란 무엇인가. 현실의 파괴된 신체와 진동하는 비명, 작금의 고도화된 정보화 시대에 매일 우리와 접촉하는 현실의 추를 우리가 제대로 감각하며 그것으로부터의 감응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 고심하게 하는, 예술 매체의 본원적 질문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기제일 것이다. 데이비드 린치의 <사구>(듄)에서 주인공 폴(카일 매클라클런)은 베네 게세리트의 대모가 내놓은 미지의 상자에 손을 집어넣어 신체가 불타는 듯한 신경적인 고통을 겪으며, 관객은 불타고 짓이겨진 그의 피부를 마주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환상이었을 뿐 폴의 손은 멀쩡하다. 요컨대 데이비드 린치에게 영화 속 신체의 고통과 변질, 인간의 여러 외설과 추함은 그것의 추체험을 토대로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사각의 마술 상자다. /이우빈

오늘의 숫자는···

유튜브 채널 중 TODAY’S NUMBER IS… '8/17/20’

데이비드 린치의 대외적 영화작업은 2006년 <인랜드 엠파이어> 이후로 뜸해졌지만, 그 이후 그가 보여준 여러 행보 중 가장 인상 깊은 작업은 개인 유튜브에 약 2년 넘게 연재한 ‘오늘의 숫자는…’(TODAY’S NUMBER IS…)일 것이다. 2020년 8월17일부터 2022년 12월16일까지 올린 850개의 1분짜리 영상들에서 데이비드 린치는 통 안에 든 10여개의 공 중 하나를 골라 그날의 숫자를 뽑는다. 여기서 끝이다. 무질서한 난수의 배치와 나열 그리고 그 나열의 반복, 연출자 자신도 조작할 수 없는 이 복권 뽑기의 메커니즘 끝에 찾아오는 질문이란 ‘내일의 숫자는 무엇이 될까?’이다. 말 그대로 무질서 끝에 이어질 무질서의 미래, 그럼에도 반복되며 겹치는 시간의 지속들. 데이비드 린치가 탐닉해온 미학의 정수를 간략하게(그러나 총합 850분) 겪어보기에 좋은 경로다. /이우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