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미리보는 겨울영화 68편 올가이드 [4] - 1월 ①
2003-11-28
글 : 권은주

고독이 몸부림칠 때

몸부림치는 고독이 아니라 고독을 털어내기 위한 몸부림을 그리는 따뜻한 희극. 반농반어 촌락인 경남 남해의 물건리는 오랜 친구, 오랜 앙숙이 모여사는 마을이다. 유황오리, 황소개구리를 거쳐 타조농장을 경영하는 배중달과 노총각 동생 중범, 조숙한 손녀와 친구처럼 사는 필국, 건망증 심한 천생연분 찬경 내외, 중달과 매일 싸우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 조진봉이 물건리가 자랑하는 ‘물건’들. 오늘도 예외없이 진봉과 중달이 드잡이를 벌이고 이웃들이 뜯어 말리느라 들썩이는 마을 한가운데로 선녀처럼 고운 한 부인이 당도한다. 모종의 사연을 안고 서울에서 내려 온 송인주 여사는 이내 마을에 연분홍 바람을 일으킨다. 한편 결혼에 뜻이 없는 중범은 형 중달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등장하는 꿈에 가위눌리게 하고 그를 짝사랑하는 횟집 여인 순아를 가슴 아프게 한다. (내용 확인!!!!)

박영규, 진희경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니어 축에 끼는 <고독이 몸부림칠 때>는 주현, 김무생,선우용녀, 송재호, 이주실, 양택조 등 그간 스크린에서 진면목을 펼칠 합당한 자리를 누리지 못했던 노련한 연기자들 앞에 멍석을 깔아놓았다. 공력 10단의 베테랑 배우들의 잼 세션 같은 앙상블 연기와 호흡을 맞춘 연극계 출신 늦깎이 신인 이수인 감독은 “말할 수 없는 공허감과 폭소를 동시에 주는, 그러니까 우리의 삶과 같은 영화”를 예고했다.

요컨대 불혹과 이순의 미덕을 거부하는 철없는 어르신들의 성장드라마.

모나리자 스마일 Mona Lisa Smile

1953년. 전후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아직 자유를 말할 수 없었다. 온몸을 옥죄는 코르셋처럼 그들에게 강제된 길은 ‘현모양처’로 살아가는 것뿐. 보수적인 여학교 웨슬리대학에 젊은 미술사 교수가 부임해오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그림 속의 여자 모나리자는 왜 웃고 있었을까?" 툭하면 삼천포로 빠지고, 무엇이든 스스로 생각해낸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이상한 교수 캐서린. 그는 보수적인 학교 행정에 반발하며, 학생들에게 자신이 진정 원하는 길을 찾아가라고 격려한다. 얼핏 <모나리자 스마일>의 스토리라인은 <죽은 시인의 사회>를 연상시키지만, 제작진은 그런 단순한 비유를 거부한다. 이는 소녀들의 성장 이야기일 뿐 아니라 여성 운동의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 배우들의 진용 또한 이 영화를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다. 변혁을 꿈꾸는 젊은 여교수 줄리아 로버츠의 미술사 수업에 모여든 학생들은 <스파이더 맨>의 커스틴 던스트, <세이브 더 래스트 댄스>의 줄리아 스타일즈, <세크리터리>의 매기 질렌홀로, 각자 개성과 역량이 한치도 빠지지 않는 젊은 유망주들이다. 마이클 뉴웰 감독은(<네번의 결혼식와 한번의 장례식>) 당시 시대상을 재현하기 위해 방대한 리서치 작업을 거쳤고, 배우들은 볼룸댄스와 예절교육을 받고, 코르셋을 입느라 진땀을 뺐다는 후문이다.

요컨대 50년대 여성판 <죽은 시인의 사회>, 그리고 그 이상.

피터 팬 Peter Pan

월트 디즈니의 <피터 팬>은 ’명랑’ 애니메이션이었고, 스필버그의 <후크>는 ’네버랜드로 돌아가지 못한 피터 팬’이라는 가정으로 지어낸 후일담 또는 외전격의 영화였다. 모두가 알고 있는 동화지만, 아무도 보지 못한 영화. P. J. 호건의 <피터 팬>에는 그런 의미가 있다. 원작동화를 충실하게 스크린에 옮겨낸 최초의 영화. 따라서 <피터 팬>에는 몇 가지 새로운 시도가 눈에 띈다. 전적으로 웬디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사실. 보수적인 아버지로부터 이제 어른이 돼야 한다는 설교를 듣던 밤, 웬디는 어린애로 사는 것과 어른으로 사는 것의 장단점을 투영한 인물, 피터 팬과 후크를 만나고 그들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제이슨 아이삭을 아버지와 후크에 1인2역으로 캐스팅한 사실 또한 원작자가 강조하고자 했던 남성(또는 아버지)에 대한 웬디의 공포와 동경을 반영하는 설정. <뮤리엘의 웨딩>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등 여성의 성장을 테마로 한 로맨틱코미디 연출에 일가견이 있는 P. J. 호건다운 선택으로 보인다. 피터 팬을 연기하는 최초의 어린 소년 제레미 섬프터, 제작진이 "찬란한 발견"이라 자신하는 웬디 역의 레이첼 허드 우드, 어벙한 아버지와 섹시한 후크의 1인2역 제이슨 아이삭의 연기 앙상블이 관건. 네버랜드, 해적선, 지하요새 등의 세트 미술과 팅커벨과 악어 등의 CGI 캐릭터도 빠뜨릴 수 없는 볼거리로 예고된다.

요컨대 나이를 먹어야 하는 소녀 웬디에 관한 성장동화.

말죽거리 잔혹사

유하 감독은 세운상가만이 자신을 키운 인큐베이터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나, 인생의 1할은 학교에서 배웠네”라고 말하려 한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침묵과 시기와 질투와 경멸을 그리고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을 수컷들의 공간인 학교에서 배웠다는 감독의 고백이다. 이를 위해 유하 감독은 1978년 말죽거리로 거슬러오른다. 땅값이 오를 것이라는 어머니의 성화에 현수(권상우)는 강남의 정문고로 전학을 간다. 선생들은 몽둥이 찜질에, 학생들은 세 싸움에 정신없는 아수라장이다. 이곳에서 현수는 학교 짱인 우식(이정진)을 알게 되고 무엇보다 이소룡의 열혈팬임을 확인한 두 청춘은 더없는 친구 사이가 된다. 그러던 중, 하교길 버스를 같이 탄 현수와 우식은 올리비아 핫세와 꼭 닮은 여고생 은주(한가인)를 만나게 되고 동시에, 한눈에 반한다. 그러나 은주는 남자다운 우식에게 끌리고, 현수는 그런 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이 무렵, 우식은 선도부장과 짱의 자리를 놓고 대결을 벌이지만 지게 되자 학교를 떠난다. 한편, 우식이 떠난 뒤 선도부장 무리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현수는 급기야 은주마저 우식을 선택하자 평소 연습해온 쌍절곤을 품고서 학교 옥상으로 향한다. 그는 과연 누구를 쓰러뜨리고, 무엇을 취하려 하는가.

요컨대 아직도 청춘의 열병을 떼지 못한 이소룡 키즈에 관한 진단서.

태극기 휘날리며

반공영화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이 영화의 제목은 실상 페이크다. 영화는 외려, 태극기 휘날리며 선 이들의 군홧발 아래 찢겨 널브러진 육신들의 절규에 주목한다. 모든 것을 앗아가버린 전쟁을 저주한다.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강제규 감독은 두 형제를 희생자로 지목한다. 그리고선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 끈끈했던 형제애가 허리 잘린 한반도처럼 두 동강 나는 과정을 뒤쫒는다. 진태(장동건)와 진석(원빈)이 그들이다. 집안의 희망인 동생 진석이 징집되자, 진태는 이를 막기 위해 기차에 오르지만 그마저도 낙동강 방어선에 끌려가는 처지가 된다. 이때부터 진석의 유일한 목표는 진태를 어머니가 계시는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뿐이다. 대대장으로부터 공훈을 세우면 동생을 제대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진석은 전쟁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한편, 동생 진석은 점점 전쟁광이 되어가는 진태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고 갈등은 급기야 폭발 직전에까지 도달한다. 극중 등장하는 두밀령 전투, 평양시가전 등 5개 주요 전투장면의 재현은 그 자체로도 볼거리지만, 두 형제의 엇갈리는 운명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해 기대를 모은다. 순제작비만 146억원을 들인 이 초대형 전쟁영화는 촬영에 홍경표, 무술에 정두홍, 특수효과에 정도안, 프로덕션디자인에 신보경 등 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스탭들이 참여했다는 점에서도 현 충무로의 테크닉 수준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요컨대 두 형제, 생사의 전장에 서다.

자토이치 座頭市

영화 <자토이치>는 동명만화가 원작이다. <새끼 달린 이리>와 함께 60년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이 사무라이만화는 사실 오랫동안 신타로 가추라는 배우 겸 감독 겸 제작자의 것이었다. 신타로 가추는 1962년 제작된 <자토이치 모노가타루> 이후 스물네편의 <자토이치> 시리즈에서 주연을 맡았고 그중 7편의 제작을 겸했으며 두편은 직접 연출했던 인물이다. <자토이치>의 연출 주연을 겸한 기타노 다케시도 “<자토이치> 시리즈는 거의 신타로 가추의 개인소유물과 같은 영화”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는 막부시대 사무라이의 머리색을 노랗게 물들이는 자유분방함에서부터 출발한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연출과 주연을 겸한 기타노 다케시는 과거 <자토이치> 시리즈들과 사무라이영화들이 가진 틀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사극을 만들어냈다. 이 영화는 정교하고 사실적인 액션과 쉼없이 진행되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그러나 <자토이치>의 독특한 매력은 다케시 특유의 유머와 영화 맨 마지막 부분의 탭댄스 군무장면에 있다. 모든 사건의 종결 뒤 타악기 리듬에 맞춰 등장인물들이 함께 탭댄스를 추는 이 장면은, 영화에 고여 있던 핏물을 다 흘려보내고 거부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만 관객에게 남긴다.

요컨대 일본 무사 자토이치, 다케시의 상상력으로 새롭게 태어나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