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4가지 욕망코드로 골라보는 제6회 서울여성영화제 [1]
2004-03-30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code1성적욕망

“여성의 욕망은 지금 몇시인가?”

아마도 부산영화제나 부천판타스틱영화제를 이런 식으로 재편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6회 서울여성영화제(4월2∼9일)의 섹션 구획을 임의로 해체해 ‘여성의 욕망은 지금 몇시인가?’라는 조금은 억지스러운 시침으로 상영작을 분류하자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성적 욕망, 문화적 욕망, 정치적 욕망, 가족·관계에의 욕망이란 그물망에 상영작들이 대체로 분류됐다(아시아 단편경선과 성장영화 정도를 빼놓고 아시아특별전과 감독특별전까지 이를 적용할 수 있었다). ‘여성’이란 이름으로 말해야 하고, 해야 할 것이 그만큼 곳곳에 산적해 있다는 뜻일 게다. ‘의외의 일’이란 이런 분류가 가능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 분류를 통해 좀더 명확히 드러나는 변화와 차이다. 예컨대 페미니즘과 웬만해선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어 보였던 포르노가 어느 순간 페미니즘의 무기가 되어 있고, 자신의 몸을 토대로 한 성적 욕망이더라도 그 여성이 어느 땅에서 태어났느냐, 어떤 계급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욕망의 출발선이 근본적으로 다르게 나타났다. 카트린 브레야가 남자 포르노 배우의 성기로 여성의 몸에 대한 편견을 충격적으로 공격하고, 독립 다큐멘터리 작가는 포르노 산업에서 페미니즘 투사를 발견한다. 반면 어떤 지역의 여성들은 정상적인 성행위가 불가능한 신체 변형을 강요당한다. 부모에 의해서. 정치적 욕망의 스펙트럼도 나라마다, 계급마다 다르다. 같은 여성이지만 처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욕망의 지점을 비교해보는 건 여성영화제를 수용하는 또 하나의 유용한 방법일 것이다.

흐르는 욕망, 넘실거리는 위험

<인 더 컷> In the Cut

제인 캠피온 / 미국, 호주 / 2003년 / 118분 / 35mm / 스릴러 / 개막작

영문학을 가르치는 프래니(멕 라이언)는 외설 범벅의 흑인 비속어를 수집하려 제자를 만난 바에서 목격자가 된다. 음침한 지하에서 오럴섹스에 빠져 있는 손목 문신의 남자와 파란 손톱의 여자. 프래니는 흠칫 놀라지만 꼼짝 못하고 얼어붙은 채 관음에 빠져든다. 그림자에 가려진 남자의 눈이 프래니를 응시한다. 목격자에게 어김없이 형사가 찾아온다. 말로이 형사는 여자의 목이 잘려나간 사건을 탐문하다 프래니를 만난다. 프래니의 몸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프래니가 강도를 만난 직후, 말로이의 훈련된 손과 혀에 이끌려 정사를 나눈다. 날 서 있던 신경줄이 강박처럼 프래니를 조여들기 시작한다. 말로이의 손목 문신은 그에게 빠져드는 자신의 욕망이 위험하다는 걸 경고한다. 동시에 하얀 눈과 빙판 위에서 운명적이고 로맨틱한 만남을 가졌던 부모에 대한 기억은 점차 핏빛 악몽으로 바뀐다. 의심스런 말로이 형사와 더욱 친밀해지는 순간, 그의 유일한 혈육이 연쇄살인의 표적이 된다.망원렌즈로 끌어당긴 프래니와 그의 주변은 위태로운 미시의 세계가 되고 늘 조금씩 흔들린다. 그 위에 깔리는 도리스 데이의 노래가 묻고 답한다. “난 커서 어떻게 될까요… 케세라 세라, 되는 대로 될 거야.” 이제 제인 캠피온은 육체적 욕망에 눈떠가는 과정을 자아 찾기의 여정으로 대체하지 않는다. 여성의 성적 욕망은 의심의 여지없는 실존이다. 그 실존을 흘러가는 대로 놔둘 일이나 한 가지 덫만은 피하라고 경고한다.

<지옥의 해부> Anatomy of Hell카트린 브레야 / 프랑스 / 2004년 / 77분 / 35mm / 드라마 /

새로운 물결카트린 브레야는 <로망스>에서 보여줬던 포르노라는 도구를 <지옥의 해부>에서 좀더 노골적으로 가져와 직설화법을 쓴다. ‘지옥’쯤으로 치부되는 여성의 몸, 특히 성기를 해부하기 위한 방편이다. 아예 허구적 캐릭터의 연장으로 여자배우의 몸 일부를 모형으로 만들어놓고 카메라와 남자의 성기를 거침없이 들이댄다. <로망스>에서 성적 결핍감을 느끼던 초등학교 교사 마리에게 실마리를 풀어주는 ‘섹스여행’의 시초가 됐던 로코 시프레디(이탈리아의 포르노 배우)는 이번에 이야기의 중심축이 됐다. 로코 시프레디는 게이로 등장한다. 카트린 브레야는 게이를 남성이면서도 남성이 아닌 중간자적 존재, 그래서 여성의 몸을 선입견 없이 해석해줄 수 있는 존재로 여긴 듯하다.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여자는 클럽에서 한 게이에게 이끌리지만 거절당하고 그곳 화장실에서 면도칼로 손목을 긋는다. 그 남성이 여자를 구해주는데 여자가 제안을 한다. “내 집으로 와서 내 몸을 봐줘. 단 내가 볼 수 없는 부분들을 봐줘. 대가는 돈으로 지불할 테니.” 거래가 성사됐다. 첫쨋날 밤, “여성의 육체(성기)가 혐오 또는 흉악의 대상 중 한 가지일 뿐”이라는 통념이 정말 옳은지 질문한다. 남자는 그녀의 질 안으로 손을 넣어보고 손끝에 묻어나온 타액을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남자는 게이다. 그녀의 성기 주위를 루주로 입술처럼 칠한 다음에야 삽입이 가능하다. 둘쨋날 밤, 그녀의 질 속에서 생리혈이 묻어난다. 맛을 본다. 굵직한 막대기를 그곳에 꽂는다. 불순한 뭔가가 흘러나오는 걸 막고 싶었던 모양이다. 셋쨋날, 그녀가 피를 잔뜩 머금은 생리대를 질 속에서 꺼낸다. “남자들은 이 피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이것을 순수하지 못한 것의 결정체로 여긴다. 난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것을 홍차처럼 물에 타서 남자와 나눠 마신다. 넷쨋날 밤, 여자와 남자는 정상위로 섹스를 한다. 남자의 성기가 피로 범벅이 됐다. “아름다워. 마치 당신이 피를 흘리는 것 같군.” 나흘을 끝으로 거래는 끝났다. 그 남자가 바에서 또 다른 남자에게 울면서 고백한다. “나는 그녀의 이름도 모르지만 그녀는 나에게 완전한 친밀감을 느끼게 해줬다.” 남자는 여자를 다시 찾아가지만, 여자는 사라지고 난 뒤다. 혹시 남자가 그녀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녀를 없앤 것일지도 모른다.

<잊지 못할 그날> The Day I will Never Forget

론지노토 / 영국 / 2002년 / 92분/ 35mm/ 다큐멘터리 / 여성영상공동체

정신적 외상은 육체적 외상에서 기인하곤 한다. 다큐멘터리 <잊지 못할 그날>에서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치명적 외상은 ‘널려 있는’ 객관적 현실이다. 케냐의 소녀들에게 클리토리스는 신의 축복받은 선물이 아니라 고통의 원천이 된다. 전통이란 이름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들에게 할례를 강제한다. 10대 소녀 아미나는 곧 결혼한다. 첫날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병원을 찾아간다. “8살 때 할례를 했는데 그뒤로 소변도 고통스럽다.” 섹스가 결코 즐거울 리 없다. 아마도 어른들은 그걸 원했던 모양이다. 의사는 치료하는 몇주 동안만 조심하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아미나의 남편이 찾아와 치료를 반대한다. “내가 직접 하겠다. 여기서 이러면 내 친구들이 나를 비웃는다.” 아미나의 어린 여동생 역시 끔찍스러운 광경으로 할례를 강제당한다. 소녀들은 저항을 시작한다. 한 무리의 소녀들이 할례를 강요하는 부모들을 법정에 세운다. 할례로부터, 자신의 몸보다 이해할 수 없는 전통을 더 존중하는 부모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이다.

<그 집 앞> Invisible Light김진아 한국 / 2003년 / 78분 / 35mm / 드라마 / 새로운 물결

김진아 감독의 <그 집 앞>은 여성의 몸을 은유적으로 사색하며, 그 몸이 일으키는 번뇌를 우회적으로 명상한다. 결혼, 섹스, 혼외정사, 임신, 낙태가 흔적처럼 등장한다. 내면의 우여곡절은 크지만 그것이 표면의 이야기로 쉽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가인은 LA에 사는 유학생이다. 유부남 준과 관계가 있는 그가 준의 부인이 없는 틈에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와보니 준의 아내 도희의 메시지가 녹음돼 있다. 어떻게든 통화를 원한다는. 가인은 굶기를 거듭하더니 어느 순간 폭식에 빠져든다. 도희는 남편 준 몰래 한국으로 왔다.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서 아이를 가진 그는 낙태 약을 처방받아온 참이다. 약을 먹지 못하고 망설이는 그에게 참기 힘든 성욕이 밀려온다. 자위를 하던 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가인과 도희의 몸이 겪는 결핍감과 거부감, 외로움이 쉽사리 풀릴 것 같지는 않다.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 집 앞>이 다른 상영작과 다른 점은 질문만 던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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