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마이클 무어와 <화씨 9/11> [2]
2004-07-06
글 : 김도훈

명쾌한 목표: 부시의 낙선

하지만 커다란 적과 객관적인 사료들이라는 두 가지 대상에서 약간 길을 잃은 듯한 무어도 ‘보통사람’에 카메라를 들이대면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워싱턴과 이라크를 지나, 결국 무어가 돌아오는 곳은 그의 생기없는 고향마을 ‘플린트’다. 카메라는 이라크에 보낼 젊은 피를 구인하는 미군의 신병 모집관들을 좇는다. 그리고 그들이 주로 모집하려는 대상이 직업없는 흑인이나 히스패닉 같은 사회의 마이너리티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부시의 가오를 세워주는 친구들은 쓰레기더미에서 주워올린 하층 계급의 자식들이고, 그들이 목숨과 달러를 바꾸도록 몰아세우는 것이 결국 근본적인 미국 자본주의의 현실이다. 이게 참으로 가슴 저리는 순간이다. 오 위대한 아메리카. 아들들은 죽어가고 어머니는 오열한다. 죽은 아들에게서 온 편지들을 낭독하며 눈물 흘리던 한 어머니는 결국 백악관 앞에서 절규한다. 내 아들을 살려내라. 내 아들을 내 품으로 돌려보내라고. 카메라가 담아내는 감정은 대단히 격정적이지만, 무어는 결코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처럼 카메라 앞으로 나와 어머니를 안아주지 않는다. <화씨 9/11>에서 그는 오히려 매우 부차적인 장면들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는 국회의사당 근처에서 지나가는 의원들을 멈춰 세우고, 자식들을 이라크에 파병하기 위한 지원서에 사인하지 않겠냐고 권하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한다. 어안이 벙벙한 의원나리들. 사우디 대사관을 길 건너로부터 촬영하고 있는 그를 향해 두명의 경비원이 다가와 “미스터 무어, 무슨 일이시죠?”라고 묻기도 한다. 애초에 무어의 촬영을 막을 아무런 이유도 없었을 터. 하지만 이 별다른 필요없어 보이는 장면들이 이상하게도 무게감을 지니고 있다. 마이클 무어가 대부분의 장면들에서 자신을 감추고 내레이션만을 담당하자, 오히려 그가 잠깐 등장해서 특유의 위트를 구사할 때 존재감은 더욱 커진다.

<로저와 나> <빅 원> <볼링 포 콜럼바인> 같은 무어의 이전 작품들은 진실을 한발한발 탐색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화씨 9/11>은 좀 다르다. 이 영화는 어떠한 공방이나 진실의 탐구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명쾌하고 직설적으로 ‘조지 부시를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시키겠다’라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 프로파간다로서의 힘을 뒷받침해줄 모든 자료들이 그토록 새롭고 정확한 것들인가. 영화에 삽입된 상당수의 장면들은 이미 미국 TV에서 방영되었던 자료들이고, 빈 라덴 일족과 부시 일가의 검은 커넥션은 이미 크레이그 웅거의 베스트셀러 <부시의 집, 사우디의 집>(House of Bush, House of Saudi)에서 다루어진 것들이었다. 물론 무어는 “사실 나는 ‘왜 부시는 빈 라덴 일가가 아무런 제재없이 미국을 떠나도록 허용했나’라는 간단한 질문으로부터 아무것도 없이 부딪쳐본 것이다. 너무 계획을 잘 세우고 촬영을 시작하면 뭐가 나올 것인지 영화를 예상하는 것이 쉬워진다. 하지만 나는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조금씩 충격을 받고 놀라기를 바란다”라고 이야기한다. “나무에 신경쓰다가 숲을 놓칠 순 없다”라고 무어는 말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주장들의 나열은 반대진영으로부터 꼬투리를 잡힐 가능성도 많아 보이는 게 걱정이다. 분명히 법정공방이 벌어질 터. 이를 대비해 무어는 민주당 전략가인 크리스 리헤인과 <뉴요커>의 전직 고문변호사를 주축으로 베테랑 언론인들로 구성된 사실 검증팀(Fact-Checkers)을 이미 고용해놓았다. 그들은 “이 영화는 <뉴요커> 같은 잡지가 아니며, 방송용 뉴스 리포트도 아니다. 물론 사실들은 옳아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은 현존하는 사건의 아주 개인적인 의견이다”라고 변호한다.

<화씨 9/11>, 세상을 정말로 바꿀 수 있을까

마이클 무어는 종종 조그마한 실수들을 저지른다. 그는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9·11의 끔찍한 장면들에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를 흘려보내고는 대단한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화씨 9/11>에서 그는 그저 까맣게 암전된 화면에 9·11 당시의 소리들만을 덧씌운다. 빌딩이 무너지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소리, 사람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까맣게 채색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스크린에 흐른다. 여기에 대해 국내외 몇몇 언론들은 마이클 무어가 지난 실수를 반성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오해다. 그는 인터뷰에서 “영화는 어두운 공간에서 더욱 직접적인 체험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라며 암전된 화면의 사용에 이야기했다. 그러니 이는 반성이 아니라 더욱 영화적으로 효과있는 방식을 이용해 관객을 설득시키려는 ‘예술가’로서의 발전인 셈이다. <화씨 9/11>은 <로저와 나>나 <볼링 포 콜럼바인>처럼 무어 특유의 풍자적인 유머가 가득한 구경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무어의 내레이션은 여전히 신랄하기 그지없고 매우 현명하게도, 많은 순간 그는 화면들이 스스로 제 몫을 하도록 가만히 놓아둔다. 핏대 세워 부르짖지 않아도 원래부터가 반음 높게 들리는 소재가 아니던가. 마이클 무어도 그 정도는 애초에 짐작을 했을 터. 어차피 영화가 기대고 있는 정치적인 상황은 순풍을 받으며 흘러가는 중이다. 이라크전은 제2의 베트남전이 되어가고 있으며, 디즈니의 아둔한 배급 봉쇄 음모가 만천하에 밝혀졌다. 무어가 말했던 그 ‘진실이 불타는 911의 온도’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뜨겁게 느껴진다. 사실, 문제는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 지루했던 배급문제는 해결되었고, 6월25일 전미 500개관에서 동시개봉 일정이 잡힌 지금에, 진짜 문제는 여기에 있다. 세상을 뒤흔드는 <화씨 9/11>이 세상을 잠시 뒤흔들다가 놓아버릴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정말로 바꾸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미국 대선인 11월2일에 마침내 들을 수 있을 듯하다.

그 숨막힌 두달의 기록

<화씨 9/11>, 미국에서 발화되기까지

2004년 5월

- 5일. 디즈니가 <화씨 9/11>을 배급하려는 미라맥스의 계획을 봉쇄했다고 <뉴욕 타임스>가 밝히다.

- 12일. 월트 디즈니의 자회사인 미라맥스는 <화씨 9/11>의 판권을 재매입, 이를 제3자를 통해 배급할 계획이라고 밝히다.

- 16일. 무어는 <버라이어티> 좌담회에서 여전히 미국에서만 배급자가 나서고 있지 않음을 토로하다. TV광고들이 전국적으로 시작되다. <스텝포드 아내들>과 <리딕>의 상영 전에 극장 예고편 상영이 시작되다.

- TV광고와 극장광고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불평이 쏟아지다. 연방선거관리위원회의 전 위원장인 래리 노블이 여기에 대해 논평하다. “그런 광고가 선거 돌입 60일 전에 상영되거나 혹은 광고가 아주 구체적으로 부시를 비난하고 상대후보인 민주당의 존 케리에 지지를 호소하는 것이 아닐 때에는. 선거위원회는 그런 불평들을 접수할 이유가 없다.”

- 17일. 칸에서 2회에 걸쳐 언론 시사회를 가지고 18일 공식 시사를 가지다. 30분에 가까운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받아내다.

- 23일.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선정되다. 백악관은 “미국은 자유국가며,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 그 이상은 할말이 없다”며 불쾌감을 드러내다.

2004년 6월

- 1일. 미라맥스가 <화씨 9/11> 의 극장판권을 사들이고 6월25일 미국 내 500개관에서 영화를 동시 개봉할 것이라고 밝히다.

- 5일. <화씨 9/11>의 예고편이 인터넷에 등장하다.

- 민주당 지지단체 MOVE ON은 “보수주의자들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라”는 편지를 극장쪽에 보내는 동시에 회원들에게 개봉 첫날 친구와 보러가기를 권하는 운동을 시작하다. 반대로 보수주의자 그룹 MAF(Move America Forward)는 극장주들에게 개봉 중지를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하다. 이 단체의 사무총장인 전 공화당 로비스트 시오반 기니는 “그의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며 무어를 비난.

- 8일, LA에서 첫 미국 시사회를 가지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기립박수를 받다. 한편 소설 <화씨 451>의 작가인 레이 브래드버리가 “내 허락없이 작품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도용했다”며 마이클 무어를 비난하다.

- 14일. 미국영화협회(MPAA)가 <화씨 9/11>에 대해 미성년자 관람불가인 ‘R 등급’ 판정을 내리다. 마이클 무어는 “R등급을 받아야 할 것은 전쟁 그 자체”라며 MPAA의 판정을 비난하다. 뉴욕에서의 특별 시사회에 할리우드 스타와 유명인사들이 또다시 대거 참석하다.

- 16일. 전 뉴욕 주지사 마리오 쿠오모, MPAA의 판정에 불복해 재심을 신청할 계획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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