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 총력가이드 [2] - 거장의 작품 9편
2004-10-05
글 : 김현정 (객원기자)

No.1_거장 : 이름값을 하는 거장의 작품 9편

쿠스투리차와 허우샤오시엔이 떴다!

거장이라는 말은 거북한 표현이긴 하지만 쉽게 버릴 말은 아니다. 세월을 짊어지고 영화 세계사를 새로 써가는 그들의 노정을 여기에서 확인한다면 동의할 수 있을지도.

사회적 학살 A Social Genocide
감독 페르난도 솔라나스 l 아르헨티나 l 120분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1968)로 세계 다큐멘터리사에 한획을 그었던 페르난도 솔라나스의 최근작. 영화는 경제공황으로 최악의 상황에 몰린 아르헨티나의 현실을 되짚는다. 2001년 10월에 있었던 아르헨티나 시민들의 시위장면을 보여주면서 영화를 시작한 페르난도 솔라나스는 질문한다. “도대체 아르헨티나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회적 학살>은 요즘 유행하고 있는 마이클 무어식의 다큐멘터리와는 거리가 있다. 이 영화가 선택한 방식은 질문에 철저히 구조적으로 대답해보는 것이다. 각각 “끝없는 빚더미, 경제 모델, 민영화” 등 토픽에 따라 10개의 챕터로 나눠져 있으며, 그 맥락을 따라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무너져온 이유들을 영화는 꼼꼼히 따져본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를 오가며 아르헨티나를 망친 요인들을 하나씩 파헤쳐본다. 그 중심에는 장기집권의 시대를 연 대통령 카를로스 메넴이 있으며, 부정부패의 무리들이 있다. 영화는 그저 이들의 행태를 비판만 하기보다는 끊임없이 현재의 관계 안에서 인과성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페르난도 솔라나스는 휘황찬란하게 치장된 공관 내부와 암울했던 지난 역사 자료들을 병치시키며 웅장한 대조의 설득력을 발휘한다. 시종일관 의도와 기법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사회적 학살>은 아르헨티나에 관한 사회학적 보고서인 동시에 근래 보기 드문 전통적 다큐멘터리 양식의 교본이다.

다정한 입맞춤 Ae Fond Kiss
감독 켄 로치 l 영국 l 2003년 l 104분

켄 로치가 <빵과 장미> <스위트 식스틴>의 작가 폴 래버티와 함께 만든 글래스고 삼부작 마지막 영화. 카심은 글래스고에 사는 파키스탄 이민 2세다. 장남으로 부모의 기대를 짊어지고 있는 그는 집안에서 정해준 약혼녀가 있지만, 여동생이 다니는 학교의 음악교사 르와진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종교와 인종이 다른 두 남녀의 사랑은 국경보다도 강한 벽에 부딪힌다. 좌파로서의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감독 켄 로치는 살아남고자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지나 젊은 연인에게서 발길을 멈추었다. 사소한 만남과 그저그런 말다툼, 그러면서 서로를 놓을 수 없게 되는, 평범한 연인들. 그러나 카심과 르와진은 서로의 뒤에 버티고 선, 사랑과는 전혀 관계없는 울타리 때문에 위기를 맞는다. 그들 또한 싸워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호숫가 살인사건 Lakeside Murder Case
감독 아오야마 신지 l 일본 l 2003년 l 119분

니키마는 중학교 입학 시험을 앞둔 딸을 위해 호숫가에 있는 사교육 시설에 들어간다. 세 아이와 그들의 부모는 몇달 동안 시험공부에 몰두하거나 뒷바라지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첫날밤, 니키마를 찾아온 그의 애인이 니키마의 아내와 다투다가 오두막에서 살해당한다. 시체를 앞에 둔 부모는 아이들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입을 다물고 증거를 없애기로 한다. 아오야마 신지는 이 스릴러를 자신의 걸작 <유레카>만큼이나 고요한 영화로 만들었다. 화를 내거나 눈물 흘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어른들은 자신의 아이들마저 침묵으로 끌어들이고, 그 침묵은 폭력과 죽음을 만나 비로소 폭발한다. 깊은 호수처럼 동요를 숨긴 스릴러.

카페 뤼미에르 Cafe Lumiere
감독 허우샤오시엔 l 대만 l 104분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볼 때마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본다는 허우샤오시엔. 그가 <남국재견> <밀레니엄 맘보>와 같은 동선의 영화를 잠시 멈추고, 예전의 정적인 감정을 가득 담아 오즈에게 헌정한 영화.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 기념을 위해 쇼치쿠가 제작했다. 프리랜서 요코는 중고서점상 하지메(아사노 다다노부)와 다소 어색한 감정을 느끼는 친구 사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대만에 살고 있는 연인이 있다. 어느 날 요코는 그 대만 사람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부모에게 알린다. 부모는 근심할 뿐 다른 말을 하지 못한다. 그 즈음 요코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장웬예라는 30, 40년대 대만 음악가의 흔적을 찾는다. 허우샤오시엔이 갑자기 오즈에게 헌정하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 다소 낯설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카페 뤼미에르>는 날림으로 오마주를 바치는 여타의 영화들과는 차이가 있다. <연연풍진>과 유사하다는 아오야마 신지의 지적처럼 예전 작품세계로 돌아간 느낌도 있지만, 오즈가 주로 다루던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갈등과 이해를 현재 일본사회 안에서 풀어보려 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실험적이며 성찰적이다. 무엇보다도 허우샤오시엔이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세계를 바탕으로 또 다른 자신의 세계를 질문한다는 점이 흥미로운 영화다.

이조 Izo
감독 미이케 다카시 l 일본 l 2004년 l 128분

암살자 이조는 잔인하게 고문받다가 처형당한다. 원한을 품은 그는 영혼도 육체도 없이 이승을 떠돌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다. 마침내 주군을 만난 이조. 그는 몇번의 생 속에서 어머니를 발견하고 그녀를 살해하고 연인을 만나고 다시 태어나기에 이른다. <이조>는 잔혹하고 혼란스러운 영화다. 죽음에서 다시 죽음으로 이어질 뿐 삶이라고는 없는 이 영화는 시간과 공간이 분간할 수 없도록 뒤엉킨 덩어리와도 같다. 느닷없이 등장해 기타치며 노래하는 음치 남자가 내레이터 역할을 하는 영화.

풍요의 땅 Land of Plenty
감독 빔 벤더스 l 독일 l 114분

LA에 살고 있는 폴은 그린베레 출신의 애국자이면서, 언제 테러가 일어날지 모르니 대비해야 한다고 믿는 과대망상증 환자이기도 하다. 개조 차량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수상해 보이는 외국인들을 감시하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 전부다. 어느 날 그에게 조카 라나가 찾아온다. 홈리스를 도우면서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LA를 찾은 라나는 어느 날 폴과 동시에 아랍인 핫산의 살해장면을 목격한다. 라나와 함께 사건을 추적해가던 폴은 핫산의 형을 만나면서 자신이 꾸었던 과대망상의 실체를 깨닫는다. 빔 벤더스는 도시 전체를 마치 <파리, 텍사스>의 사막에 버금갈 정도의 황폐함으로 표현해낸다. <풍요의 땅>이란 제목은 반어법이다.

친밀한 타인들 Intimate Strangers
감독 파트리스 르콩트 l 프랑스 l 2004년 l 104분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 안나는 문을 잘못 열어서 세무사 윌리엄의 방으로 들어간다. 윌리엄은 자신의 고민을 쏟아놓는 안나를 막으려고 하지만, 너무 수줍고 소심한 탓에 말할 때를 놓치고 만다. 조금씩 깊어지는 만남. 단 한번도 넥타이를 매지 않고 출근해본 적이 없는 윌리엄은 안나를 사랑하게 되면서 자그마하게 물결치는 욕망을 느끼기 시작한다. 르콩트의 전작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걸 온 더 브릿지>처럼 소심하게 머뭇거리면서도 매혹적인 사랑 이야기다.

인생은 기적처럼 Life Is A Miracle
감독 에미르 쿠스투리차 l 프랑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l 2004년 l 154분

보스니아에 살고 있는 세르비아인 루카는 내전이 발발해 아들이 군대에 징집되자 비탄에 젖어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집에 아름다운 이슬람 간호원이 숨어들어오고, 루카는 그녀와 아들을 포로로 교환할 계획에 모든 희망을 건다. 그러나 마술처럼 그들은 서로에게 빠져들고 마는데…. <인생은 기적처럼>은 사랑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믿음이 담겨 있는 쿠스투리차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직접적인 전쟁, 미디어 비판과 순결한 연애담이 마술적 리얼리즘 속에 시끌벅적하게 들어차 있다.

아홉번째 날 The 9th Day
감독 폴커 슐뢴도르프 l 독일 l 2004년 l 98분

뉴저먼 시네마 운동의 일원인 폴커 슐뢴도르프의 신작인 <아홉번째 날>은 나치가 지배하던 암울했던 시기로 거슬러올라간다. 반나치 활동을 하다 강제수용소에 끌려온 룩셈부르크 출신의 크레머 신부는 나치에 주교가 협력할 수 있도록 설득하라는 임무를 받고 9일간의 짧은 자유를 얻는다. 영화는 크레머 신부를 쫓아 그 9일간의 행적을 그린다. 신앙과 명예를 훼손당하지 않기 위해 ‘유다의 길’을 버리고 다시 지옥 같은 수용소로 들어가기로 결정하는 ‘아홉 번째 날’이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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