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 총력가이드 [5] - 다채로운 장르영화 15편 (2)
2004-10-05
글 : 김도훈

돼지들의 혁명 Revolution of Pigs
<감독 야크 킬미, 르네 리에누마기 l 에스토니아 l 2004년 l 100분

때는 1986년, 에스토니아의 젊은이들이 캠프장으로 모여든다. 이 행사의 공식명칭은 ‘소비에트 합병 46주년 기념 아마추어 예술경진대회’. 하지만 터질 것 같은 10대 청춘들은 눈부신 로맨스와 흥겨운 반항을 작심하고 있다. 이들의 에너지를 좁고 네모난 이데올로기의 틀에 가두려는 교사들과의 충돌은 이미 예견된 것. 게다가 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이라는 문제까지 걸려 있으니 두 세대간의 긴장은 팽팽하게 치오른다. 구소련 시대라는 심각한 정치·역사적 콘텍스트가 존재하는 게 사실이지만, <돼지들의 혁명>은 <그로잉 업> 같은 틴에이저 섹스코미디와 세대간 갈등을 다룬 <죽은 시인의 사회>류의 중간 지대에 놓인 작품이다. 별다른 상념없이 젊음의 녹색 향기를 맡는 데 집중해도 무방한 영화.

하나와 앨리스 Hana and Alice
감독 이와이 순지 l 일본 l 2004년 l 135분

중학생 하나와 앨리스는 단짝 친구다. 지하철에서 고등학생 미야모토를 보고 반한 하나는 같은 학교에 진학하고, 차고 문에 부딪혀 기절했다 깨어난 그에게 “선배, 기억 안 나요?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는데”라고 거짓말을 한다. 여기에 조력자로 등장한 앨리스. 미야모토는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헤어진 여자친구로 설정돼 있는 앨리스를 정말 좋아하게 된다. 발레하는 소녀들의 몸짓이나 잠깐 머무는 풍경이 아름다운, 이와이 순지다운 영화. 그는 이 영화의 음악도 직접 맡아했다.

하난 The Killing
감독 마크란드 데쉬판데 l 인도 l 2004년 l 140분

바그와티는 어머니가 같은 이름을 가진 여신 바그와티를 저주하면서 자살한 불경을 속죄하기 위해 사원에 바쳐진다. 약간 정신이 이상한 그녀는 역시 머리가 좀 모자란 사원 일꾼 파글라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그러나 바그와티 여신의 소유인 그녀는 결혼할 수 없다. 두 사람은 도시로 도망가고, 바그와티는 정말 신기를 보이기 시작한다. <하난>은 제정신이 아닌 남녀가 주인공인 이상한 영화다. 발리우드영화 특유의 집단댄스와 노래도 절제한 영화. 힌두교 우주관을 바탕으로 한 순환과 구원의 신화를 담고 있다.

잃어버린 포옹 Lost Embrace
감독 다니엘 부르만 l 아르헨티나,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l 2004년 l 100분

아르헨티나는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유럽 이민이 유독 많은 나라다. 오래전에 경제적으로 몰락했고 회생 가능성도 없는 이 나라에서, 이민자의 자손들은 부유한 고향의 기억을 더듬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리엘이 유럽에 가고 싶어하는 이유는 조금 다르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달아난 폴란드 유대인 가문의 자손인 아리엘은 자신이 갓난아이일 적에 이스라엘 전쟁에 자원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를 만나려고 한다. 그는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 그리고 느닷없이, 아버지가 돌아온다. 올해 베를린영화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잃어버린 포옹>은 멈추어 선 현재와 정체성을 둘러싼 고민을 경쾌하게 풀어가는 젊은 영화다. 아리엘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어머니의 속옷가게가 있는 쇼핑센터. 세계 각국에서 이곳으로 모여든 이민들은 서로 다른 말로 떠들고 서로 다른 물건을 팔면서 기묘한 화음을 연주하고 있다. 오해와 그로부터 빚어지는 웃음, 고민 많아도 에너지 넘치는 젊은이들. 귀여운 직소퍼즐을 보는 듯한 이 영화는 아리엘이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되는 마지막에 이르러 언뜻 어른스러운 성찰을 내비치기도 한다. 감독 다니엘 부르만은 이 영화에 출연하는 많은 배우들로부터 일상을 전해 들었고, 그것을 고스란히 영화에 녹여냈다.

맥둘이야기2: 파인애플빵 왕자 Mcdull, Prince de la Bun
감독 토유엔 l 홍콩 l 2004년 l 78분

효성 지극하고 어리숙한 꼬마돼지 맥덜의 두 번째 이야기. 맥빙 부인은 자기도 J. K. 롤링처럼 중년의 싱글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선 아들 맥덜에게 <해리 포터> 대신 직접 만든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옛날에 외로운 어린 왕자가 있었지. 그런데 그 왕자가 자라서 어른이 됐단다.” 맥빙 부인은 맥덜의 투정 때문에 더욱 노력을 하고, 먼 옛날 떠나버린 맥덜의 아빠를 파인애플빵 왕자로 각색한다. <맥둘이야기2>는 ‘헛’에 사는 해리 피자처럼 귀여운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나 우화처럼 드러나는 홍콩 경제의 붕괴, 집안이 통째로 흔들리는 서민들의 불안은, 결코 아이들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빠는 과거를 보고, 엄마는 미래를 본다. 현재에는 나만 있다”는 맥덜의 독백이 쓸쓸한 애니메이션.

드랙퀸 가무단 Splendid Float
감독 제로 추 l 대만 l 2004년 l 74분

도교 사제이면서 밤에는 여장댄서로 일하는 로즈는 바닷가 어촌 마을에서 만난 청년 써니와 사랑에 빠진다. 로즈는 써니와 함께 살고 싶어하지만, 써니는 편지 한장만 남긴 채 그를 떠난다. 얼마 뒤 로즈는 물에 빠져 죽은 써니의 영혼을 인도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의 가족 앞에서 마음껏 울지도 못하는 로즈. 그를 위해 친구들과 함께 드랙퀸 공연을 준비한 로즈는 웃으면서 나타난 써니의 영혼을 만난다. <드랙퀸 가무단>은 절절한 멜로드라마다. 옷을 벗어도 여자처럼 보이는 가는 몸의 로즈는 달빛을 받으면서 연가를 노래하고, 죽은 연인의 영혼을 불러오고, 그가 손에 쥔, 이별을 뜻하는 노란 장미 앞에 울음을 터뜨린다. 성(性)의 정치학이나 게이 커뮤니티의 갈등과는 별다른 관계없는 영화. 다소 가볍기는 하지만 나른하고 슬프다.

비포 선셋 Before Sunset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l 미국 l 2003년 l 80분

리처드 링클레이터와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재회한 <비포 선라이즈>의 후일담. 친한 친구가 된 세 사람이 살고 느끼고 생각한 시간을 대사에 담았다. 기차에서 만난 제시와 셀린느는 비엔나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여섯달 뒤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다. 9년 뒤 파리, 작가가 돼 홍보 여행을 하고 있는 제시 앞에 셀린느가 나타난다. 제시는 85분 뒤에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지만, 조금씩 옛 감정이 되살아나면서, 셀린느의 아파트까지 동행하게 된다.

미치고 싶을 때 Head On
감독 파티 아킨 l 독일 l 2003년 l 120분

중년 남자 카힛은 아내를 잃은 다음부터 알코올에 절어 지내고 있다. 가족을 떠나 자유롭게 지내고 싶은 터키 처녀 시벨은 카힛에게 살림도 하고 집세도 낼 테니 결혼해달라고 조른다. 견디다 못해 시벨과 결혼한 카힛. 가끔은 다투고 가끔은 재미있게 놀기도 하던 두 사람은 어느덧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그 사실을 깨닫던 날, 카힛이 실수로 시벨의 남자친구를 살해한다. 파괴적인 코미디에서 기묘한 러브스토리까지, 전설을 노래하는 터키 민요 가락을 타고 흘러가는 영화. 올해 베를린영화제 금곰상 수상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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