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 총력가이드 [8] - 테오 앙겔로풀로스 회고전
2004-10-05
글 : 홍성남 (평론가)

No.6_그리스의 거장 테오 앙겔로풀로스 회고전

거대한 역사와 작은 개인이 만나 엮는 시
<안개 속의 풍경>

그리스 출신의 영화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를 두고서, 그의 오랜 찬미자인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은 독창적인 예술가(original)라기보다는 ‘종합하는 예술가’(synthesizer)라고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보드웰이 이야기하는 종합하는 예술가란 이를테면 프로코피예프나 모딜리아니가 동일한 범주에 속할 때처럼 절대로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보드웰은 앙겔로풀로스의 영화세계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장 뤽 고다르 같은 모더니스트들로부터 배운 바를 잘 융합해 구축된 것, 그럼으로써 영화 만들기의 전통이 동시대에 새로이 재건될 수 있음을 생생하게 예증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런 맥락에서, 앙겔로풀로스야말로 영화적 모더니즘이 여전히 우리의 눈을 열어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감독이라고 보드웰은 정의한다. (그의 또 다른 경배자인 앤드루 호튼이 편집한 앙겔로풀로스 비평서의 제목을 따라) 다른 표현을 써보자면 ‘최후의 모더니스트’(The Last Modernist)라는 명칭을 부여받을 만한 동시대 유럽의 시네아스트가 바로 앙겔로풀로스라는 것이다.

<율리시즈의 시선>

점점 더 ‘예술’에 대한 믿음이 옅어져만 가는 시대를 맞으면서도 여전히 예술이란 ‘고루한’ 단어가 어울리는 영화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이뤄진 앙겔로풀로스의 세계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키워드들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마도 ‘풍경의 영화’라는 개념일 테다. 자신에게 큰 감화를 준 안토니오니의 뒤를 따라 앙겔로풀로스는 풍경이 종종 배경으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전경에 드러나는 영화, 그것도 그저 환하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주로 안개와 비, 어둑한 하늘과 쌀쌀한 날씨가 주를 이뤄 을씨년스런 느낌을 주는 풍경이 도드라져 보이는 영화를 만들었다. 앙겔로풀로스는 바로 그처럼 아름다움과 황폐함이 묘하게 어우러진 풍경 속에 인물들을 떨어뜨려놓고 부유하게 만든다. 그의 영화들에는, 공연을 올리려 떠도는 극단 사람들(<유랑극단>, 1975), 아버지를 찾으려 길을 나선 어린 남매(<안개 속의 풍경>, 1988), 소실된 옛 필름을 찾아나선 영화감독(<율리시즈의 시선>, 1995)처럼 풍경을 가로지르며(그러다가 종종 시간마저 관통해가며) 주로 부조리한 움직임이 되곤 하는 여행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게 풍경과 인물이, 거대한 정지와 미미한 운동이 만나면서 그 위로 오랜 기간에 걸친 암울한 역사가(<유랑극단>), 세상 속에 갇힌 인간의 미약한 실존이(<안개 속의 풍경>), 아픔을 걷어내지 못하는 발칸반도의 냉정한 현실이(<율리시즈의 시선>)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앙겔로풀로스의 풍경의 영화와 로드무비는 성찰의 영화(a cinema of contemplation)- 앤드루 호튼이 직접 집필한 앙겔로풀로스 비평서의 부제이기도 한- 쪽으로 수렴되고 만다.

역사와 신화와 현실이 어울린 앙겔로풀로스의 캔버스는 그 특유의 영화적 시선을 통해 우리의 눈으로 다가온다. 앙겔로풀로스는 현실적 시공간의 흐름을 단절해버리는 통상적인 영화구축 방식으로서의 편집을 관객에 대한 강간이라고 이야기하며 과감하게 거부한다. 대신 그는 자신이 “호흡하는 숏”(breathing shot)이라고 부른 것- 스크린 위에 어떤 행위가 묘사되기 전에 시작되어 그것이 종결된 뒤에야 마친다는 의미에서- 에 대해 강력한 믿음을 갖고 있다. 인물들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긴 호흡을 유지하면서 거의 안무가 된 듯 유연하게 움직이는 카메라의 시선이야말로 그의 영화들을 이루는 중요한 재료가 되어왔던 것이다. 앙겔로풀로스적인 시선이라고 불러도 마땅한 바로 그것을 가지고 그가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적절하게 불어넣어준 것은 갑갑함과 유연함, 그리고 장중함이 뒤섞인 현실과 역사에 대한 어떤 감각일 것이다. 또 하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앙겔로풀로스란 이가 다분히 집착에 기대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의 집착이라는 것은, 물론 그만의 영화적 스타일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현대판 율리시스 이야기를 다루는 것처럼(<시테라 섬으로의 여행>, 1983, <율리시즈의 시선>) 강박적으로 되돌아가는 그만의 주제들에서도 확인된다. 앙겔로풀로스 자신은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강박관념들을 가지고 활동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다. 우리는 한편의 영화를 만들 뿐이다”라고 말하며 한편의 영화로서의 필모그래피를 만들어가는 스스로의 여정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관객쪽에서 보자면, 예컨대 너무 반복적인 듯한 <영원과 하루>(1998) 같은 영화는, 이것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라는 점과 무관하게, 한숨으로 반응하게 만들기도 한다.

자기 정당화의 근거를 갖고 있는 앙겔로풀로스는 이런 식의 불만에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 영화의 총결산이 될 영화 <울부짖는 초원>(2003)을 만들어냈다. 이번에도 그가 내놓은 것은 거대한 역사와 작은 개인의 드라마가 시정(詩情)을 가지고 만나는 ‘앙겔로풀로스의 영화’이다. 게다가 이것은 앞으로 이어질 삼부작의 첫 번째에 불과하다. 앙겔로풀로스의 고집스런 예술적 탐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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