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 총력가이드 [3] - 리얼리즘의 정수 8편
2004-10-05
글 : 김현정 (객원기자)

No.2_리얼리즘 : 바흐만 고바디 감독 등 리얼리즘의 정수만 모은 8편

치열한 삶의 현장을 재구성하다

현실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것들이 투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리얼리즘영화는 그만큼 다양할 수밖에 없다. 리얼리즘은 늘 똑같다는 그 오해를 풀어주기에 충분한 영화들이 여기 있다.

죽은 사람들 Los Muertos
감독 리산드로 알론소 l 아르헨티나, 프랑스 l 76분

형제를 죽이고 감옥에 들어온 남자 바르가스는 반백이 되어서야 출소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딸 올가를 만나기로 한다. 늙은 출소자 바르가스는 도시에서 시골로, 시골에서 밀림으로, 그 밀림에서 다시 외딴섬으로 딸이 옮겨간 자리를 찾아다닌다. 그러나 끝내 딸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들>은 2001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첫 번째 장편영화 <자유>가 초청되면서 아르헨티나의 신예로 주목을 모았던 리산드로 알론소, 그가 만든 두 번째 장편영화이다. 밀림을 헤매는 몽롱하면서도 기이한 오프닝 장면의 카메라 워킹이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피를 흘리며 죽은 듯 누워 있는 두명의 아이들. 그리고 칼을 들고 카메라 앞을 스쳐가는 누군가의 손. 처음에는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죽은 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영화의 리듬을 끌고 가면서 첫 장면을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곱씹게 한다. 특별히 어떤 사건을 일으키지 않지만, 그 침묵의 길을 따라가는 자의식적 카메라는 묘한 느낌을 전해준다. 내러티브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거북이도 난다 Turtles Can Fly
감독 바흐만 고바디 l 이란 l 2004년 l 98분

이라크 피난민들이 몰려드는 국경지역, 위성 안테나를 사고 싶어해서 위성이라 불리는 소년은 아이들을 이끌고 하루하루 전쟁을 치르듯 살아간다. 위성은 팔을 잃은 오빠와 아들을 데리고 흘러들어온 아그린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아그린은 부모를 살해한 군인들에게 강간당하고 아이까지 낳은 소녀. 그녀는 악몽에 시달리면서 날마다 자살을 꿈꾼다. 바흐만 고바디는 쿠르드족 출신 감독이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고향의 노래>에 동족의 고난을 담았던 고바디는 여전히 전쟁터를 떠나지 못하고 기록을 남기듯 영화를 찍고 있다. 지뢰를 팔아 돈을 벌고 지뢰를 밟아 목숨을 잃는 아이들. 아이들은 거북이가 날아오르는 호수 밑바닥에서 죽음을 마주하지만, 그들에겐 그 죽음이 곧 삶일지도 모른다.

기품있는 마리아 Maria Full of Grace
감독 조슈아 마스턴 l 미국, 콜롬비아 l 2003년 l 101분

핵심 플롯만 가지고 상황을 따라가며 제작된 저예산영화. 콜롬비아 이민사회 바로 곁에서 자란 감독 조슈아 마스턴은 낭만이나 동정에 휩쓸리지 않고 제3세계 소녀들의 박탈당한 삶을 이야기한다. 상사와 다투고 공장을 그만둔 십대 소녀 마리아는 일자리를 찾으러 보고타로 떠난다. 그녀는 어떤 남자의 유혹에 넘어가 캡슐로 싼 마약 수십개를 위장에 넣고 미국으로 입국하는 운반책을 하기로 한다. 일행 세명과 함께 미국에 도착한 마리아. 그녀는 그중 한명이 살해당하자 달아나기로 결심한다. 이 영화로 데뷔한 카탈리나 산디노 모레노는 삶을 지탱하는 의지와 그 삶을 확장하는 열정을 가진 마리아를 연기해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절망의 끝 Down to the Bone
감독 데브라 그래닉 l 미국 l 2004년 l 101분

뉴욕 북부의 작은 마을, 대형마트의 계산대에서 일하는 창백한 여인 아이린이 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아이린은 심각한 코카인 중독자로 그의 얄팍한 월급봉투는 더이상 마약값을 감당할 수 없다. 계산대의 돈을 탐낼 정도로 자신이 중증임을 판단한 그는 제 발로 재활치료기관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만난 간호사 밥과 가까워지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느끼게 되고 마침내 금기의 선을 넘는다. 미국 하층계급의 삶을 건조하게 묘사하는 <절망의 끝>에서 로맨티시즘이나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것은 무망한 일이다. 그들에겐 대신, 제목 그대로 뼛속까지 사무치는 추락만이 존재한다. 그래닉 감독은 윤리적 판단을 배제한 채 절제된 사운드와 애완용 뱀 같은 알레고리를 사용해 스산한 겨울날 같은 인생들을 묘사한다. 선댄스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낮과 밤 Day and Night
감독 왕차오 l 중국 l 95분

<안양의 고아>로 데뷔한 왕차오가 정식으로 중국 정부의 허가를 얻어 만든 작품. 탄광촌에서 일하는 광생은 같은 광부이면서도 종민을 주인으로 부르며 하늘같이 섬긴다. 그러나 한편으론 욕망을 참지 못하고 그 주인의 젊은 아내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어느 날 광산이 무너지는 사고가 일어나고, 혼자 살아남은 광생은 주인의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제 종민의 아내도 떠나버리고, 광생은 혼자 폐광을 되살리려고 노력한다. 그러던 중에 그는 광맥을 발견하고 일확천금의 부자가 된다. 다소 모자란 종민의 아들 아푸를 결혼시키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광생은 끝내 아푸를 결혼시키고, 그에게 재산을 물려준 뒤, 그곳을 떠난다. 도시의 하층민들을 주인공으로 중국 현 사회의 공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전작과는 조금 다르지만, 이번 영화 역시 인간 본연의 ‘인간성’과 ‘운명’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낮과 밤>은 현재 중국영화의 다양한 일면을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이다.

아무도 모른다 Nobody Knows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l 일본 l 141분

일본 도쿄의 어느 주택가. 조용하고 착한 아이라고, 이 아이뿐이라고, 이사온 첫날 엄마는 집주인에게 아들을 소개한다. 그러나 풀어놓은 가방 안에서 나온 두명의 아이와 바깥에서 몰래 들어온 아이까지 숫자는 모두 넷이다.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엄마가 집을 나가버린 뒤 네명의 아이들은 최악의 상황에 몰리고, 굶주림은 끝에 달한다. 그렇게 12살 소년 아키라는 소년 가장이 된다. 1988년 도쿄에서 있었던 실화에 기초하여 이 슬픈 영화를 만든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다큐멘터리 출신 감독답게 미세한 감정들을 포착해낸다. 12살 소년 아키라 역을 맡은 유야 야기라와는 나이보다 몇년은 더 성숙해 보이는 근심의 연기를 인정받아, 올해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대지와 먼지 Earth and Ashes
감독 아틱 라히미 l 아프가니스탄 l 2004년 l 105분

한 노인이 부서진 다리 위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하루에 한번 올까말까한 버스와 결정적인 순간마다 어디론가 사라지는 손자 때문에 그는 피곤하다. 그러나 그를 가장 막막하게 만드는 것은 그 고단한 여정 끝에 광산에서 일하는 아들을 만난 뒤에는, 폭격으로 인해 몰살당한 가족의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땅 아프가니스탄에서 영원해 보이는 것은 무심한 대지와 까마득한 먼지뿐이다. 우화적인 방식으로 영화가 강조하는 것은 결국, 죽음이 일상인 곳에서 신을 이야기하는 용기다.

오르 Or
감독 케렌 예다야 l 프랑스, 이스라엘 l 2004년 l 100분 l 컬러

엄마는 소녀를 “나의 보물”이라고 부르지만, 소녀는 행복하지 않다. 엄마와 둘이 사는 텔아비브의 소녀 오르는 20년간 계속된 엄마의 매춘을 끝내기 위해 방과 뒤에도 빈 병을 모으고 청소하고 접시를 닦는다. 그러나 매춘에 중독된 엄마의 병세는 오르의 과중한 노동에 아무 보답도 주지 않고, 막 찾아온 첫사랑도 허무하게 짓밟힌다. 그리고는 삶이 소녀를 역습한다. 오르는 매춘에서 생존수단과 위안을 찾기 시작한다. 2004년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수상작.

가린 누그로호 감독과 그 다음 세대 작품들

인도네시아의 현실을 성찰하는 ‘유사 다큐멘터리’들
<천사에게 보내는 편지>

가린 누그로호는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이다. 91년 첫 번째 극영화 <사랑은 빵 한 조각>을 만든 가린 누그로호는 자신의 영화들로 인도네시아 영화계를 수렁에서 건졌을 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 시리즈 <수천개 섬의 아이들>을 제작해 후배 감독들에게 기회를 주기도 했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는 누그로호의 대표작들과 함께 그가 키운 젊은 감독들의 영화를 ‘가린과 넥스트 제너레이션: 인도네시아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제목으로 상영한다.

<나의 가족, 나의 영화, 그리고 나의 나라>

정서적으로 충격을 줄 뿐만 아니라 흥행에도 성공한 <베개 위의 잎새>는 거리 아이들을 캐스팅해서 만든 영화다. 가린 누그로호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칸실의 자유 이야기>에 등장한 아이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칸실과 새로 발견한 두 아이들의 이야기. 자의로 혹은 타의로 거리에 나온 아이들은 구두닦이나 동냥질, 마약 판매를 하면서 먹고산다. 신분증도 없는 그들은 얼마 안 되는 돈을 노린 강도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죽기도 한다. 짧지만 강렬하고, 사실적이면서도 서글픈 여운을 주는 이 영화는 제4회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누그로호의 93년작 <천사에게 보내는 편지>도 유사 다큐멘터리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부모를 잃은 아홉살 소년 레와는 눈에 보이는 여자, 심지어 마돈나의 포스터까지도 마구잡이로 찍어대면서 엄마의 모습을 기억해내려고 애쓴다. 누그로호에게 처음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준 영화. <나의 가족, 나의 영화, 그리고 나의 나라>는 에세이를 쓰듯 찍어간 자전적인 영화로 누그로호의 성장과 가족, 그와 그들이 속해 있는 국가와 문화를 성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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