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 총력가이드 [6] - 새로운 영화 10편
2004-10-05
글 : 김도훈

No.4_실험영화 : <열대병> <추방된 사람들> 등 실험영화들 10편

‘천국보다 낯선’ 영화들이 온다

이제 이 신선한 형식으로 무장한 감독들의 이름을 외워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를 일이다. 과거의 구태의연함에 지겨워진 관객이라면 눈이 번쩍 뜨일 영화들이 즐비하다!

<열대병> Tropical Malady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l 타이 l 2003년 l 118분

타이의 신성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세 번째 장편영화인 <열대병>은 낯선 영화다. 영화의 절반은 병사와 소년의 수줍은 로맨스에 할애된다. 두 사람은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한 마을을 거닐다가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영화를 보러가고, 가라오케에서 수줍게 노래를 부른다. 부유하는 행복한 이미지들을 뒤로 하고 밤이 찾아온다. 그러자 그 순간 갑자기 화면이 정지한다. 영사사고가 발생한 것은 아닌지 의아해질 무렵, 영화는 별안간 전반부와 전혀 다른 세계 속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병사는 어두운 정글을 헤매이며 호랑이의 유령을 쫓아다니고, 위라세타쿤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정글을 조명 하나 없이 무성영화처럼 찍어낸다. 전반부의 드라마와 후반부의 판타지를 연결하는 이상한 순환구조가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들 테지만, 퀴어영화와 타이 민담이 뜬금없이 뒤섞인 이 아방가르드한 실험영화는 불가해하면서도 매혹적인 영화적 경험이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키며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미낙시: 세도시 이야기 Meenaxi: Tale of Three Cities
감독 M.F.후세인 l 인도 l 2004년 l 130분

유명 소설가 나왑은 5년 동안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 주인공이 도무지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그 앞에 신비로운 여인 미낙시가 나타나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달라고 제안한다. 나왑은 미낙시를 주인공을 내세우고, 자신의 차를 고쳐줬던 청년 카메쉬와르를 그녀의 파트너로 삼아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미낙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되, 스스로 자유롭게 쓰려던 나왑의 구상은 시시때때로 미낙시의 개입에 뒤틀리고 이야기는 정처없이 흘러간다. <미낙시: 세도시 이야기>는 발리우드 뮤지컬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삽입하고 있지만, 나왑과 미낙시, 현실과 소설 공간의 끊임없는 침투 속에서 ‘이 이야기의 주체는 누구인가’라고 묻고 있는 흥미로운 영화다.

악몽의 단편들
감독 아틸라 야니시 l 헝가리 l 120분

한 시골마을에 낯선 이방인이 도착한다. 그는 자신을 사진사라고 소개한다. 먼 친척이 자신에게 남겨준 집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그를 보고 낯이 익다고 말한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남자는 마치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불가해한 시간의 구조에 갇혀 끊임없이 그 마을을 배회한다. 영화는 굳이 왜 그것이 가능한지, 왜 일어나는지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저 처음 도착했던 곳에서 다시 시작하거나, 꿈에서 깨듯 다른 시공에 이미 서 있는 남자를 보여주면서 불가사의한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낸다. 빠르지 않은 내러티브에도 불구하고, 기괴함과 음산함을 동시에 주는 미스터리영화이다.

<양아치어조> The Bad Utterence
감독 조범구 l 한국 l 2004년/104분

강북의 양아치 익수는 어머니의 보험금으로 꿈에도 그리던 강남 진출에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익수와 그의 두 친구, 익수의 집에 머물게 된 현진을 둘러싼 온갖 부채관계는 이를 점점 힘들게 한다. 단출한 인물의 배치와 중요한 순간의 포착이 강점이었던 조범구 감독(<장마> <어떤 여행의 기록>)은 첫 장편을 통해, 여러 캐릭터들이 각종 상황 속에 얽히는 과정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찍어내는 내공을 보여줬다. 변두리 인생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때때로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감독의 미묘한 시선이 흥미롭다.

미완의 이야기 l Story Undone
감독 핫산 옉타파나흐 l 이란 l 83분

2000년 칸영화제에서 <조메>로 황금카메라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던 핫산 엑타파나흐의 신작. 국경 근처에 숨어 있던 젊은 영화감독과 그의 카메라맨은 불법이민자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하지만, 쉽게 성사되지 않는다. 이민자들의 비협조, 경찰들의 추적 등을 겪으며 곤경에 빠진다. 하산 엑타파나흐는 어깨에서 힘을 빼고, 유쾌함에서 절실함으로 단숨에 뛰어 넘어가는 재주를 선보인다. 이란사회에 대한 다소 유연한 비판이 담겨 있다.

<추방된 사람들> Exiles
감독 토니 갓리프 l 프랑스 l 2004년 l 105분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인 커플 자노와 나이마는 불현듯 알제리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막상 길은 떠났으나 계획도 없고 여행자금도 없는 두 사람. 고된 여행길 위에서 그들은 프랑스로 향하는 불법 알제리 이민자들을 만나고,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에서는 플라멩코 댄서와 사랑에 빠지며, 지중해를 건널 배삯을 구하기 위해서 사과농장에서 일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별다른 이유없이 시작한 여행의 끝에서, 둘은 부모들의 고향인 알제리의 영혼이 여전히 가슴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토니 갓리프 감독의 14번째 영화 <추방된 사람들>은 뿌리를 찾아가는 로드무비인 동시에 일종의 음악영화다.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심취한 현대의 젊은이 자노와 나이마는 거쳐가는 지방마다 열정적인 음악과 춤의 향연들을 경험한다. 특히 알제리 토속음악의 주술적인 리듬을 타고 진행되는 라스트신은 캐릭터들을 해방시키는 질펀한 굿판이며, 관객에게도 몽환적인 영화적 경험을 전해준다. 토니 갓리프는 이 영화로 올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귀여워>
감독 김수현 l 한국 l 2004년 l 115분

곧 무너져내릴 것처럼 낡고 지저분한 아파트는 <소름>에서 공포의 진원지였으나 <귀여워>에선 신명나는 굿판의 주인공이 된다. 물론 연기자는 아파트가 아니다. 장선우 감독이 특유의 무정부주의적인 미소로 여자들에게 호소하는 사이비 점쟁이로 나온다. 그에게는 아들 셋이 있는데 낳아준 어머니가 모두 다르다. 아들들이 사는 스타일도 아비를 닮아 통제 불능이다. 오토바이 퀵서비스로 스피드를 즐기는 아들(김석훈)이 그나마 속이 깊어 보이는데 하필 아비가 함께 살려고 데려온 순이(예지원)에게 연정을 품는다. 삼류 깡패(정재영)는 아파트 철거에 앞장서야 하는 비즈니스 문제로 모처럼 제 아비를 찾았는데 순이와 이상한 연을 맺게 된다. 사건과 인물들의 관계는 꼬여가고 아파트는 빠져나오기 힘든 수렁 속으로 침몰하는 듯한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광채가 발산된다. 에미르 쿠스투리차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신인감독의 에너지와 재능이 빠끔히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서바이브 스타일 5+> Survive Style 5+
감독 세키구치 겐 l 일본 l 2004년 l 120분

이시가키는 아무리 죽여도 더욱 가공할 위력으로 살아 돌아오는 폭력 아내에게 시달리다 살인청부업자를 찾는다. 광고기획자 요코 또한 최면술사 남자친구의 살해를 부탁하기 위해 이들을 찾는다. 한편 최면술사가 죽기 직전 걸었던 최면으로 인해, 한 가족은 자신이 새라고 믿는 가장과의 일상에 익숙해져야 한다. 좌충우돌 끝에 성정체성과 사랑을 모두 찾게 되는 3인조 좀도둑, 보는 사람마다 삶의 목표를 묻는 기이한 살인청부업자 콤비 또한 이 못 말리는 모자이크 영화의 주요 인물. 광고 출신 감독은 짧은 시간 보는 이의 눈을 잡아끌던 솜씨로 기이한 상상력과 블랙유머로 가득 찬 2시간짜리 영화를 완성했다. 뮤직비디오, CF 등 첨단 대중문화 코드를 통해 동시대인들의 무의식적 초상을 그려낸 영화.

호텔 Hotel
감독 예시카 하우스너 l 오스트리아 l 82분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한 호텔. 프론트에서 일하게 된 이레네는 자신의 전임자가 실종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 주변에는 이상한 일들이 자꾸 벌어진다. 실종된 전임자 에바의 안경, 이해하기 힘든 동료들의 차가움, 그리고 오랜동안 내려오는 이 지방 ’숲의 여인’에 관한 전설이 호텔을 미스터리한 분위기로 뒤덮는다. 영화는 그 호텔안을 돌아다니는 이레네의 시선과 동선을 쫓아 가며 긴장감을 자아낸다.

컨트롤 Control
감독 님로드 안탈 l 헝가리 l 2003년 l 105분

벌추는 부다페스트 지하철에서 일하는 검표원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일이 끝난 뒤에도 지상에 올라가지 않는 그는 검은 두건을 쓴 남자가 승객을 돌진하는 지하철 앞에 밀어넣어 살해하고 다니는 모습을 목격한다. 카메라에도 기록되지 않은 사신(死神). 벌추는 그를 쫓는 한편으로 테디 베어 옷을 입고 다니는 소피에게 반하고, 밤마다 이상한 환상을 보기 시작한다. 언제나 매혹적이었던 대도시 지하철을 공간으로 택한 영화. 연옥, 암울한 미래, 연인들이 춤추는 판타지. <컨트롤>은 지하철 역사를 여러 느낌으로 전시하면서 독특한 우화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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