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 총력가이드 [4] - 다채로운 장르영화 15편 (1)
2004-10-05
글 : 김도훈

No.3_대중영화 : <에쥬케이터> 등 다채로운 장르영화 15편

로맨스부터 느와르까지, 관객을 부탁해

너무 긴장하지는 말자. 영화가 우리를 잡아먹는 일은 없을 테니까. 솜씨좋은 이야기꾼에서부터 장르의 숙련가들까지 우리를 마냥 즐겁게 해줄 영화들이 이렇게 많지 않은가!

<에쥬케이터> The Edukators
감독 한스 바인가르트너 l 독일 l 2004 l 126분

독일영화로선 7년 만에 올해 칸 경쟁에 초청받았고, 호평받았던 이 영화를 대중영화로 소개한다는 건 어색하지만 틀린 것도 아니다. 다큐멘터리 느낌으로 촬영했지만 픽션이고, 부자들의 세계를 뒤집고 싶어하는 21세기의 젊은이들과 변절한 68세대를 맞세운 이데올로기극이지만 삼각 로맨스의 갈등이 중요한 축을 이룬다. <굿바이 레닌>으로 우리에게 낯을 익힌 다니엘 브륄은 지금 독일에서 정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단호하면서도 불안한 눈빛의 그가 맡은 얀은 비폭력적 혁명가다. 친구 페터와 함께 밤이면 “돈이 너무 많은 자본주의 돼지들”의 고급 저택에 침입해 경고의 메시지를 남긴다. 노예, 억압, 착취 등의 단어를 쏟아내는 그들의 입이 어쩐지 상투적인데, 이 영화의 진정한 ‘혁명’은 본의 아니게 얀과 페터, 그리고 페터의 여자친구가 한 부르주아를 깊은 산속으로 납치하면서 일어난다. 그 부르주아는 너희들의 이상을 진심으로 이해한다며 살갑게 다가선다. 자신이 68혁명 당시 독일 지도부의 일원이었고, 지금의 아내는 함께 코뮌을 이뤘던 동지였다는 것. 젊은이들은 “세상을 구하기 전에 자신부터 구원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옛 혁명가와 화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듯하더니 뜻밖의 메시지로 마무리한다. 70년생인 한스 바인가르트너 감독은 90년대 중반까지 의학공부를 했고 신경전문의로 일했던 이력을 갖고 있다.

위스키 Whisky
감독 후안 파블로 레벨라, 파블로 스톨 l 우루과이 l 2003년 l 94분

야코보는 우루과이에서 초라한 양말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독신의 유대인 늙은이. 어느 날 그는 오랫동안 교류가 없었던 동생으로부터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받는다. 동생은 브라질에서 성공적인 양말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어엿한 가장. 불타는 경쟁심을 느낀 야코보는 공장 인부인 마르타에게 아내인 척 해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세 사람의 여행이 시작되면서 거짓부부 마르타와 야코보는 어느 순간부터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루과이영화의 발견’이라 일컬을 만한 <위스키>는, 정적인 화면 속에 터져나오는 웃음의 순간과 짙은 페이소스를 동시에 담아낸 서글픈 블랙코미디다. 대국 브라질과 실패한 복지국가 우루과이 사이의 사회·경제적 알레고리를 읽어내는 것도 흥미롭다.

세계의 끝과 여자친구 World’s End/Girl Friend
감독 가자마 시오리 l 일본 l 2004년 l 112분

양성애자 친구와 함께 살면서 분재가게를 운영하는 시노스케. 그는 남자친구와 헤어질 때마다 집으로 찾아오는 하루코를 위해 사귀는 여자친구도 버려둘 정도지만, 정작 하루코는 그런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행복한 순간 파국을 염려하며 눈물 흘리는 하루코, 바니 래빗 탈을 뒤집어쓰고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 패닉상태에 빠진 시노스케를 진정시키기 위한 키스에 진심을 담는 그의 동거남…. 이들이 그리는 사랑의 화살표는 물론 어긋난다. 그러나 영화는 영원을 이야기하며 힘겨워하는 대신 동그란 하늘을 함께 올려다보며 순간을 음미하는 경쾌함을 택한다. 그것은 좌충우돌 젊은 날의 진실을 보여주는 나름의 방법이다.

<마이제너레이션> My Generation
감독 노동석 l 한국 l 2004년 l 85분

웨딩 촬영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감독지망생 병석과 돈을 벌고 싶어 각종 직장을 전전하는 재경. 좀처럼 가벼워질 것 같지 않은 지리멸렬한 일상의 무게는 이 커플이 함께 나누기에 다소 버거워 보인다. 흑백디지털 영상에 담긴 모든 출연자들은 스탭을 겸한 비전문배우. 그러나 감독은 적절한 캐스팅과 세심한 연출을 통해 이들의 얼굴과 행동 하나하나에 진심을 담았다.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하지만 단 한순간도 연민하거나 후회하지 않는 그들의 씩씩함이 인상적인, 청춘의 기록.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The Motorcycle Diaries
감독 월터 살레스 l 미국, 프랑스 l 2004년 l 126분

브라질 감독 월터 살레스(<중앙역>)가 우직하고 아름답게 재현해낸 체 게바라의 라틴아메리카 여행기. 순진무구한 의학도 시절의 체 게바라는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라틴아메리카 대륙 횡단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는 여행 중에 만난 민중의 불행한 현실을 자각하며 혁명가로서의 씨앗을 가슴속에 품기 시작한다. 실제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한 이 영화는, 전설적인 혁명가 체 게바라의 젊은 시절을 통해 현재진행형인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고통스러운 삶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캐산 Casshern
감독 기리야 가즈아키 l 일본 l 2004 l 142분

50년 동안의 전쟁 끝에 아시아 연방이 유럽연합을 제압한 시점, 과학자 아즈마는 방사능, 화학무기 등으로 오염된 인간의 세포를 재생시킬 수 있는 신조세포(新造細胞) 연구에 성공한다. 이는 죽어가는 아내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군부 집단의 후원 속에 연구를 진행시키던 그는 유럽연합 반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아들의 시체와 맞닥뜨린다. 아들의 장례식날, 실험실에서 신조인간이 스스로 탄생하고, 경비대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은 신조인간들은 인류를 향한 복수를 선언한다. 절망한 아즈마는 아들의 시체를 신조세포 용액에 담근다. 복수심에 불타는 신조인간들과 또 다른 신조인간 캐산의 대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캐산>은 70년대 한국 TV에서도 소개됐던 만화영화 <신조인간 캐산>을 실사로 옮긴 블록버스터영화다. 일본 정상의 가수 우타다 히카루의 남편이자 사진작가인 기리야 가즈아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사이버펑크적 세계관을 현란한 CG 영상에 녹여 지독히 음울한 미래세계를 그려낸다. 영화적 문법보다는 이미지의 충돌을 강조하는 영상은 언뜻 <풍운>류의 홍콩영화를 연상시키지만, 암담한 디스토피아의 이미지는 일관된 톤을 확보하고 있어 훨씬 정제된 느낌을 준다.

대사건 Breaking News
감독 두기봉 l 홍콩 l 2004년 l 90분

1955년생의 두기봉 감독은 한국에서 그리 많은 팬을 두고 있지 않으나 홍콩 영화계에선 평단도 인정하는 ‘중요 인물’이다. 자기 사단을 이끌고 후배를 양성하며 장르 안에서 작가적 개척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갱과 경찰 사이에 텔레비전 뉴스를 끼어놓은 미디어 전쟁의 외양을 띠지만, 실은 홍콩 갱스터물의 면모를 쇄신하려는 시도가 돋보이는 장르영화다. 첫 총격 시퀀스는 하나의 카메라로 건물 내부와 바깥, 위와 아래, 거리 좌우를 물 흐르듯 이어가며 갱과 경찰의 전쟁을 선포하는 멋진 도입부다. 경찰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장면이 TV 생방송으로 중계된 뒤 경찰은 위신을 되찾기 위해 총력전을 펼친다. 갱들이 잠입해 들어간 아파트를 경찰과 미디어가 에워싸고 숨바꼭질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또 다른 재미가 펼쳐진다. 건물 내부를 미로처럼 연출해 갱과 경찰을 마치 거미줄에 포획된 듯 배치해놓고 그들의 아우성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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