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 9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5] - 장선우 감독의 <천개의 고원>
2004-11-08
글 : 이영진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소년과 말의 지극한 러브스토리다”

PPP에서 만난 신작2 - 장선우 감독의 <천개의 고원>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 이후 장선우 감독은 영화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수백번 했다. 흥행 참패와 평단의 외면 때문은 아니었다. “10년을 돌아보니 하고 싶은 영화 많이 했구나, 이제 그만 해도 되겠구나 싶었거든.” 그냥 빈둥댈까, 귀농할까, 그것도 아니면 입산할까. 행로를 찾아 헤매고 있었던 장 감독을 지인들과 후배들이 가만뒀을 리 없다. 시집 <이별에 대하여> 출간과 영화 <귀여워> 출연은 그렇게 이뤄졌다. 그렇다면 이번에 그가 부산을 찾은 이유는. 혹시 <귀여워>의 배우로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서? 아니다. 그가 부산에서 꺼내든 것은 몽골의 마두금 전설을 바탕으로 한 신작 <천개의 고원>(가제)이었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았나봐. 다시 돌아온 것 보면.”

<천개의 고원>은 몽골의 마두금(馬頭琴) 전설에서부터 출발한 영화다. “지난해에 몽골에 간 적 있는데 초원에서 말타고 한없이 놀고 싶은 거야. 말타고 달리던 유목민의 DNA가 되살아났는지도 몰라. 하루에 8시간씩 말타고 그랬어.” (웃음) 농으로 여기서 영화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동행했던 누군가가 장 감독에게 마두금에 관한 전설을 이야기해줬다. 마두금은 두줄로 된 몽골의 전통 악기. ‘모린 호르’라고 불리는 이 악기는 사람들 마음을 달래주는 치유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어지며, 이에 대한 전설은 17개나 된다는 게 장 감독의 설명이다. “두줄이니까 단순무식한 악기지. 그런데 그게 굉장히 슬퍼. 애조가 있어. 우리 해금처럼. 올해 초에 로테르담영화제에서 <낙타의 눈물>이라는 몽골영화를 봤는데 거기 보면 마두금 연주를 들려줬더니 낙타가 울더라고.”

장 감독은 시놉시스만 놓고 보면 <천개의 고원>이 ‘소년과 말의 지극한 러브스토리’라고 말한다. 1800여년 전,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훈족 소년 수호는 어느 날 어미를 잃은 새끼말을 얻게 되고, 말은 소년의 보살핌으로 누구나 탐낼 만한 명마로 자라난다. 그러나 끊이지 않는 전쟁은 수호의 말을 필요로 하게 되고, 징발당한 수호의 말은 결국 화살에 맞아 죽게 된다. 상실한 소년의 꿈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말은 제 몸을 악기로 만들어 연주해달라고 하고, 수호는 말의 가죽으로 통을 만들고 말의 머리뼈로 장식한 마두금을 만든다. 마두금 소리가 울려퍼지자 세상은 평온을 되찾게 된다는 것이 <천개의 고원>의 맺음이다. 장 감독은 “영화 속에서 말은 소년의 죽은 엄마의 환생이라고. 소년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말이 죽고 난 뒤 마두금을 연주하면서 비로소 엄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돼”라고 덧붙인다.

“이번엔 애들이 엄마 손잡고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웃음) 나야 한번도 그런 영화를 한 적 없으니까 나한테는 모험이지.” 그렇다고 <천개의 고원>이 ‘아동용’ 영화라는 건 아니다. 그러려면 굳이 직선의 시간을 거슬러,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이야기를 펼칠 이유가 있겠는가. 장 감독이 주목하는 것은 ‘자유’다. 욕망이 증식하는 억압의 문명에서 벗어나 거세됐던 유목민들의 자유로운 삶을 환기하려는 의도다. “쉽게 말하면 이 영화는 ‘잘살아보자’ 캠페인 같은 거야. ‘훈’은 중국어론 바람이고, 몽골어론 사람이란 뜻이야. 집착 버리고 욕망 지우고 웰빙하자는 거지. 요즘 다들 노마디즘에 주목하는 것도 그런 것 아닌가.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에 끌려가지 않고 버티면서 대안적인 행복이 뭔지 찾아보고 싶어.”

가족들과 가축들을 데리고 전쟁에 나가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엇보다 침묵으로 욕망을 다스리는 훈족들의 풍습에 대한 조사는 이미 마친 상태. 최종 시나리오는 나오지 않았지만, 고고학자 출신의 현지 로케이션 매니저인 오키르와 함께 “그 자체로 미네랄 워터”라는 홉스굴 호수 등을 돌며 촬영장소를 눈여겨봐둔 상태다. 장 감독은 “피를 흘리게 하지 않고 고통없이 상대의 목숨을 끊는” 훈족의 전쟁장면 묘사를 위해서 몽골의 국민감독 발 딘 얌에게 전쟁장면 연출을 의뢰할 계획. 공동 프로듀서인 명계남 대표와 류진옥 프로듀서는 몽골쪽에 촬영 지원을 요청해둔 상태이고, 프랑스, 일본의 배급사 등과 투자 논의를 구체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것이 성사되면, 파격과 실험의 지그재그 행보를 계속해온 장선우 감독의 ‘자유론’은 다국적 프로젝트 형태로 가시화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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