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내 머리 속의 지우개> 공동작업한 소설가 김영하 VS 감독 이재한 [2]
2004-11-16
글 : 이영진
사진 : 오계옥
공동작업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끝낸 소설가 김영하와 감독 이재한의 대화

이재한의 SOS, <내 머리 속의 지우개> 공동작업 개시

구하는 자에게 길이 열린다 했던가. 2003년 7월. 이재한은 안면 있던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차 대표는 이재한에게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원작인 일본 드라마 <순수한 영혼>(Pure Soul)을 복사한 테이프를 넘겨줬다. 받아들긴 했지만 이재한은 메가폰을 쥘지는 선뜻 대답하기 쉽지 않았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20대 여자의 이야기라. 망설였던 건 자신있는 주종목이 아니어서였다. “멜로영화를 멀리해왔던” 그는 10개의 에피소드 분량이 담긴 테이프를 보면서 괴로웠다고 한다. 그렇다고 현장을 다시 밟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연출 제의를 받아들인 그는 억지스러운 부분은 버리고 자신이 감동한 부분들만 취해서 시나리오 초고를 썼다. 그러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 이야기가 과연 관객의 누선을 자극할 수 있을지는. 그는 미국 아이오와에 있던 김영하에게 급전을 쳤고, 그가 돌아오자마자 모니터를 요구했다. ‘한번 봐달라’는 말이었지만 속으론 ‘좀 도와달라’는 요청이었다.

김영하 l 이 감독의 시나리오에서 가장 좋았던 건 정면승부 한다는 거. 정직한 멜로영화처럼 보였거든. 개인적으로 한국 멜로영화들에 불만이 많았는데 대개 전반부는 코미디이다가 후반부는 갑자기 멜로로 접어드는 식이잖아. 그런 변종멜로 보면서 처음부터 신파로 가면 안 되나, 정면돌파 못하나 싶었거든. 소설도 그렇지만 적당한 예술적 터치에 애매모호한 설정들 더하고 마지막은 열린 결말로 가는 게 더 쉽다고. 우리가 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웃음)

이재한 l 3고까지는 믿음이 있었는데 시나리오 회의 하면서 자신감이 흔들렸어요. 가족 이야기는 다 빼자는 말이 나왔고. 그런데 그걸 빼고 가면 밀어붙일 힘이 없더라고. 후반부의 편의점 장면 같은 경우는 그 장면을 먼저 떠올리고 난 뒤에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던 핵심장면인데 그것마저도 작위적이라며 빼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으니까. 그래서 SOS를 친 거죠.

김영하 l 싸이더스 기획실에 마녀들이 좀 있지. 아주 무서운. (웃음) 나야 사랑과 기억을 다룬 것도 좋았어. 알츠하이머가 뭐야. 기억이 소멸해도 사랑은 남느냐는 문제를 던지잖아.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고 할 때도 난 그 인간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건 멜로만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불안과 관련있다고. 예를 들어 치매 걸린 엄마가 날 보고 ‘안녕하세요’ 그런다 쳐봐. 나를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수진처럼 오줌 싸고 그러는데도 보살펴야 하는가. 남편조차 기억 못하는 아내를 남편은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연극으로 치면 정극 같은 느낌이 있었고, 그게 매력적이었던 것 같아.

이재한 l 절대적인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영원하고 변치 않고 어떤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는. 철수는 그런 의미에서 영웅이에요. 사랑의 화신이고. 철수는 결혼에 도달하기 전까지 사랑을 부정하잖아요.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갖고. 그런데 그런 철수가, 아홉살 이후 울지 않았던 소년 철수가 가장이 돼서 울잖아요. 그런 아이러니가 영화의 핵심인 것 같아요.

김영하 l 사랑의 중독자인 수진은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조차 기억 못하게 되고 말이지. 20대 알츠하이머 자체가 우화라고 봐. 난 정우성이 수염 깎고 양복 입은 건축사가 되는 것이 개구리 왕자 이야기 가 생각나더라고. 사랑을 받아 왕자로 변하는. 물론 공사판에 있는 정우성도 멋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웃음)

이재한 l 이솝우화도 좋아하고, 안데르센도 좋아해서 그런가. 음악하는 김태원씨가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첫곡을 만든 다음 제목을 붙였는데 동화라고 해놓은 거예요. 그래서 왜 그랬냐고 했더니 이 스토리가 동화 같잖아 하더라니까요.

김영하 l 작업하면서 큰 이견은 없었던 것 같아. 두 남녀가 만나서 서로 변화한다는 컨셉을 갖고서 어렵게 꼬지 않고 간다.

이재한 l 마지막 편의점에서 수진이 “이게 천국인가요?” 하는 대사 같은 거는 의견이 달랐잖아요.

김영하 l 이 감독의 경우에는 주제를 가능하면 대사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내려고 하는 스타일이니까. 나야 암시든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든 대사에서 그걸 다 걷어내고 싶어했고. 근데 셰익스피어도 주제를 첫장에 다 까고 간다면서 우겼잖아. (웃음)

이재한 l 영화야 시골 극장의 할아버지도 봐야 하는 거니까. 소설과 다른 부분이죠.

김영하 l 일리 있는 말이야.

아쉬운 첫 번째 결실, 그리고 차기작 <검은 꽃>

첫술에 만족할 리 없다. 신인작가와 데뷔감독의 랑데부는 아니었지만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이재한과 김영하의 공동 작업이 결실을 맺은 첫 번째 작품이다. A편집본을 포함하여 세번이나 영화를 관람한 김영하는 시나리오에서 달라진 부분들, 특히 가족들의 이야기를 누락시킨 것과 철수와 수진의 캐릭터를 단순화시킨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했다. 백번은 더 돌려봤을 이재한이 그걸 모를까. 물론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다음 작품 <검은 꽃>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소설이 출간되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영하에겐 <검은 꽃>의 영화화 제의가 몇건 들어왔는데 원안자에 대한 도의를 저버릴 수 없었던 그는 맨 먼저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검은 꽃>에 관심이 있다면 이재한이 연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었다고. 생각해보겠다던 차 대표는 ‘OK’ 사인을 줬고, 그들은 <내 머리 속의 지우개>가 끝나면 다시 원작자와 감독으로 만날 예정이다.

이재한 l 뭐가 제일 좋았어요?

김영하 l 내 대사 나오는 부분. (웃음) 농담이고. 철수가 문살 들고 사찰 갔다가 이게 뭐냐고 늙은 사수에게 핀잔 듣는 장면. 그러고나서 그냥 물 뜨러 가는데 하이 앵글이잖아. 정우성이 굉장히 큰 배우인데 의도했던 대로 뒷모습이 소년처럼 보였거든. 다만 기대했던 것보다 울림이 좀 적은 것 같아. 가장 중요한 편의점신이 힘을 받으려면 구질구질한 가족사가 중첩되고 또 축적돼야 하는데. 김부선이 정우성의 사무실에서 돈 꿔달라는 장면도 날아갔고, 수진이의 과거를 두고 철수가 비난하는 장면도 잘렸고. 철수는 도덕에 대한 엄결성이 있는 소년 같은 인물이잖아. 부도덕 때문에 자신이 버려졌고, 그래서 여성을 모질게 몰아붙이기도 하고. 그런 인물이 변해야 아이러니가 사는데. 스티브 맥기가 그러잖아. 메인 아이디어가 살려면 메인 전제를 방해하고 부정하는 서브 플롯도 그만큼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왜 반전만을 죽어라 반복해서 외치는 영화를 보면 스크린에 총을 갈기고 싶다잖아

이재한 l 믹싱하는 데 보니까 감정은 살아 있는데 철학이 빠져버린 것 같아요.

김영하 l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게 핵심 아이디어였는데, 행복한 사랑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로 바뀐 거지. 2시간 안에 끊어야 하는 강박관념이 아무래도 컸겠지. 2시간이라는 시간 제한은 풍부한 디테일들을 클리셰로 처리하게 만드니까. <매트릭스>나 <반지의 제왕>처럼 6시간짜리 영화들이 나오는 건 어쩌면 2시간이라는 시간의 제약이 더이상 창조성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방증은 아닐까.

이재한 l 1시간50분 안에 멜로영화는 끝내야 한다니까. 다들. 2시간 10분 정도로 늘렸으면 어떨까 했는데 주위에서 말리던데요. 내러티브를 좀 풍부하게 가져가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된 것 같아요. 사랑에 대해 울고 불고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성적인 부분들을 건드릴 수 있는 부분들이 살았어야 했는데.

김영하 l 난 말랑말랑한 사랑영화 보러 왔다가 관객이 ‘아, 징하다’ 그러면서 한방 맞길 바랐거든. 근데 혹시 그 장면 찍었나? 수진이 철수를 갑자기 끌고 들어가서 섹스하는데 느닷없이 과거 남자인 영민의 이름을 부르는.

이재한 l 아니오. (웃음)

김영하 l 하긴 연출부들이 그런 상황에서 남자가 발기할 수 없다고 했을 테니까. (웃음) 그래도 침대까지 가서 눕는 장면은 찍었어야 좋았을 텐데. 남녀가 연애할 때 드러내지 않지만 왜 그런 감정들 있잖아요. 나한테 여자가 잘해줄 때 딴 남자에게도 과거에 저랬겠지. 여자도 남자가 친절을 베풀면 다른 여자한테도 그랬겠지 하는. 물론 바깥으로 드러내진 않죠. 그럼 의부증, 의처증이니까. 멜로영화에서는 이런 위험한 곡예를 하지 않지만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시나리오에는 애초 그런 느낌이 있었다고.

이재한 l 맞아요.

김영하 l 나야 극장을 찾은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속에 있는 숨어 있는 깊은 곳의 불안감과 대면하길 바랐거든. 그래야 철수가 영민을 폭행하는 장면도 설득력이 있다고 봤는데. 이런 여자조차도 받아들여야 하는가. 다른 남자한테 했던 행동을 내게 그대로 하는. 사랑이란 건 당연히 그래야 하는 슈드 비(should be)의 세계잖아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고, 알츠하이머는 그 간격 사이의 갈등을 다루는 게 핵심이라고 봤는데. 찍었으면 DVD에라도 넣었으면 좋았을걸.

이재한 l 그런데 나중에 관객 반응 보면 수진이 철수 앞에서 영민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을 받더라고요.

김영하 l 그래요? 음… 그래도 얼굴이 좀 나아졌네. 영화 끝나니까. 감독이 좋긴 좋아. 소설가야 한 작품 끝내고 나서 ‘야 끝났다’ 그러고 주위 둘러보면 세벽 3시, 썰렁하거든. 그 시간이면 어디 전화도 못한다고.

이재한 l 그것도 아니에요. 시나리오 끝나면 콘티해야죠. 콘티 끝나면 촬영해야죠. 촬영 끝나면 스탭들 좋아하는 데 편집실 가야지. 편집 끝나면 편집기사 끝났다고 소리치는 데 녹음실 가야지.

김영하 l 좀비 같은 존재네. 벌떡벌떡 다시 일어나서 본 영화 보고 또 보고 해야 하니. (웃음) 그러니까 장가를 잘 가야 해요. 나처럼. 예술가는 안 된다는 사람하곤 살면 안 된다고. 미스 세이 예스랑 결혼해야지. 옆에서 당신을 믿어요, 하는 사람하고 말이야. 소설만 해도 내가 구상 이야기 하면 주위에서 다 노, 라고 한다고. 그럼 아무것도 못 쓰는 거야. 사람들은 대개 노라고 말하는 게 안정적이라고 생각하거든. 아니면 자신이 책임을 떠안게 되니까. 우리 작업이 소수의 낙관을 대다수의 비관에 맞서 현실화하는 거 아냐.

이재한 l 나도 어서 장가 가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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