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나게 웃기는 코미디
영화에 대한 영화를 자기 반영적인 영화라 한다면, 홍상수의 <극장전>은 진정 ‘자기’ 반영적인 영화라 할 만한 영화다. 극장을 둘러싼 한겨울밤의 꿈 같은 영화는 궁극적으로 영화에 대한 영화일 뿐만 아니라 영화를 만든 홍상수 자신마저 패러디되는 경지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 어찌 웃지 않으리오. 김동수(10년째 백수로 지내는 예비 감독, <극장전>이란 영화를 보고 난 뒤 그의 한나절이 이 영화의 2부를 이룬다)-이형수(간암 판정을 받고 죽어가는 동수의 선배 감독, 그의 작품인 <극장전>이 이 영화의 1부를 이룬다). 이 ‘수’자 돌림 감독들은 분명 현실의 홍상‘수’에 대한 어떤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는 난형난제의 감독들이다. 이제, 더이상 홍상수는 숨기려 들지 않는다. 동수와 형수는 쿨하고 여자 좋아하는 면까지 닮았다. 그는 혹여 사람들이 이 대사의 숨은 의미를 잘 모를까봐 감독이라는 똑같은 직업을 주인공에게 얹고 ‘저게 바로 나요’라고 선언하는 것같이 보인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아, 그러고보니 김상경이 연기했던 이 백‘수’ 역시 수정과 함께 ‘수’자 돌림이다)와 성우가, 명숙과 선영이 혹은 경주와 춘천이 서로를 모방하고 반복했던 상황은 아예 현실과 영화가 서로를 모방하고 반복하는 것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홍상수의 <극장전>은 이렇게 영화 안이 현실 밖으로 흘러나오고 다시 현실이란 밖이 영화 안으로 흘러들어가는 순환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런 설정은 홍상수 영화에서 낯설 것이 없다. 그러나 <극장전>에 이르면 ‘이상’이란 욕망은 치환되어 주인공들은 이제 그 욕망의 대상에 완벽히 다다를 수 없게 되어버린다. 첫 장면에서 카메라에 포착된 남산 즉 재현된 이미지로서의 남산은 이윽고 그 촬영장소를 방문하는 동수로 인해 현실 속의 공간(물론 그것도 영화 속의 공간이기는 하지만)으로 치환되지만 동수가 막상 남산에 가보았을 땐 거기엔 아무도 없다. 동수는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읍소하는 영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몸의 가장 깊숙한 곳에 상처가 있다는 소문을 지닌 여배우 영실을 품에 안지만, 정작 잠자리에서 본 영실은 동수가 꿈꾸는 비극적 상처란 애초에 없었다.
그런데 이 지점에 아주 희한하게 느껴지는 게 바로 홍상수 감독이 택한 ‘줌’의 기능이다. 줌이나 1인칭 내레이션 등은 자꾸 쓰면 촌스럽게 느껴지는 이제는 한물간 영화 형식이다. 이 구닥다리 영화 기법을 홍상수 감독은 모두 쓴다. <극장전>의 전반 30분 정도는 영실과 상원 두 주인공 외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사실 <극장전>의 전반부는 두 사람을 잡는 투숏과 줌으로 온통 메워져 있다. 그래서 정사 뒤에 죽음이라는 비장한 이야기 구조를 지닌 1부 이야기는 이 두 영화 형식에 의해 자꾸자꾸 코미디가 되어간다. 감독은 아예 상원이 꾸는 꿈장면에서 사과(서양문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상징!)를 등장시키며 한 예술하는 영화들의 상징주의나 주인공의 심리를 치밀하게 축조하는 구문론적인 화술을 씩 웃으며 풍자한다. 그때 주인공의 심리 내부로 들어가는 영화 형식이었던 줌은, 컷을 대신하는 줌은 자꾸자꾸 주인공의 심리 내부에서 미끄러져서, 본연의 영화적인 전통에서 미끄러져서 엄숙한 풍모를 왕창 잃어버린다. <배리 린든>이란 역사물을 온통 줌으로 찍어냈던 스탠리 큐브릭 이후 참으로 재미있는 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극장전>은 웃겼다. 눈물나게 웃겼다. 엄지원이 술을 먹으며 ‘내가 니 첩 해줄까?’라고 물어보는 대목은 분명 <오! 수정>에서 이은주가 술에 취해 ‘내가 술 먹을 때만 애인 해줄까요?’라는 대사의 데자뷰였고, 관계의 부질없음을 메우려고 여관방에서 섹스를 하다 문득 돌연한 자살이나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주인공들의 상황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 이후 유구한 홍상수의 영화적 전통이다. <극장전>은 홍상수의 영화적 결산 혹은 홍상수가 이야기하는 홍상수 같은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붉은 조명 아래 술에 취해 옷 벗기 내기를 하다 결국 끝내 바지 벗기를 거부한 경수 혹은 상수는 이제 마지막 팬티 하나까지 내던졌다. 그렇다면 언젠가 홍상수 감독이 죽어버린 뒤 이 영화를 볼 누군가도 회고전을 여는 감독을 보며 웃을 수 있을까? 영화 속의 죽음 아니 자신의 죽음조차 코미디로 만드는 감독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 홍상수는 이제 둘 중 하나가 된 것 같다. 해탈했거나 혹은 조로했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