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이데올로기와 이미지와 수사에 당신의 삶을 낭비하지 말라”
“저는 오늘 감독님 영화 처음 봤는데 너무 당황했습니다. 저어, 왜 이런 영화를 만드시나요?”
<극장전> 첫 시사회가 끝나고 감독과 배우들이 단상에 오르자 어느 솔직한 여성 관객이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홍상수 감독에게 묻는다. 대부분 홍상수 영화의 경험자인 듯한 다른 관객들은 “오 처녀여, 당신의 혼란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표정으로 짐짓 여유있는 미소를 보낸다. 하지만 정작 홍상수 감독은 심각하다. 왜 이런 영화를 만드는지 뿌리를 더듬어 정답을 말하고 싶어하며 무겁게 말문을 연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살면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사회가 제안하는 방법들이 믿음이 가지 않았거든요….” 홍상수 감독은 헛소리를 싫어한다. 술을 빨리 마시기를 즐기는 큰 이유도 쓸데없는 이야기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까닭이 크다고 전해진다. 그런 그의 인터뷰는 느슨한 듯 언제나 정연하다. 그런데 시사회 이튿날 강남 한 바 테라스에서 만난 홍상수 감독은 머릿속이 흐리다고 몇번이나 불평했다. 스스로 만족스러울 만큼 생각이 맑아지지 않는다며 내내 근심하던 그는 결국 늦은 밤 전화와 메일을 통해 말끔히 마무리되지 않았던 이야기의 실밥 몇 가닥을 마저 정돈하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오! 수정> 등 당신의 전작은 그저 들어서는 도저히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제목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물론 우리가 그간 홍상수 영화의 패턴을 교육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극장전>은 영화의 구조를 꽤 직설적으로 예언하는 제목이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모티브가, 살면서 반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극장전>의 경우는 영화와 현실의 평면을 잇는 구조부터 착안한 것인가.
=구조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영화를 보고 그 영향 아래에 놓이는 흔히 보는 상태가 재미있었다. 잠깐 사람이 딴 데 가 있는 상태랄까. 그런 생각을 한 건 오래됐는데 다음 영화 뭘 할까 하다가 문득 떠올랐다. 극장이라는 게 커다란 동굴 아닌가. 밖은 환하고 돈 얼마를 내고 들어가 있다가 나오는,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동굴. 옛날 원시인들을 생각했다. 동굴 입구로 들어서면 넓은 광장이 나오고 밤이 되면 횃불을 켜고 벽에 그림자가 생기는 거다. 거기다 낮에 본 사물과 동물도 그리고, 웅얼웅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그게 영화랑 비슷한 거다. 밤이 오면 거기 확 빠졌다가 아침이 되면 밖으로 나온다. 동굴에는 그린 들소가 있지만 밖에 나오면 진짜 들소가 즉 컨트롤할 수 없는 생존에 급급한 현실이 있고 그러다가 다시 밤이 되어 동굴로 들어가는 거다. 그런 느낌 알겠나?
-왜 사람들이 동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그런 행위를 하느냐가 당신에게 중요한 물음이었나.
=우리 머리의 용량이 기본적으로 많이 남는 것 같다. 감정을 완전 통제하기에는 많이 불충분한데 그렇다고 무감각하게 반수면 상태로 살기에는 머리가 남는 거다. 그래서 자꾸 쉬는 시간에 뭘 만들어내고 내재된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같은 것을 가동하는 거다. 심심함을 달래기도 하고 실체에 대한 통찰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왜곡시키기도 하고 자연의 법칙까지도 발견한다.
-영화를 보고 영화를 따라하는 사람들의 행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지만 어찌보면 형식적으로 비슷한 한쌍의 이야기- 서로 간섭하고 해석하게 만드는- 를 붙여놓는 구실처럼 보이기도 한다. 상원과 영실의 이야기는 영화, 동수와 영실의 이야기는 현실, 이렇게 완전히 구분된다기보다 두 편의 영화가 있는 거 같다. 그것을 <오! 수정>의 엇갈리는 기억이라고 말해도 좋고, <생활의 발견>의 경수가 겪는 우연한 반복과 모방이 만들어내는 한쌍의 연애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좀더 가까운 것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아닐까 싶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대한 평 가운데 황진미씨가 이 영화를 메타영화라고 말한 글이 있다. 문호가 운동장에서 꿈을 꾸는 대목에서 두 이야기가 나뉘어지고 뒤쪽 이야기가 앞에 나온 이야기, 즉 속물적인 지식인 남자를 다룬 영화를 비평하는 텍스트가 된다는 해석이었다. 영화 안에 영화가 들어간다는 점에서 같다고 볼 수 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와 이어지는 설정이라고 볼 수 있을까.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의도한 것은 직선적인 영화다. 그 영화는 내 영화 중 유일하게 의식적으로 하나의 선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거다. 단선으로 가다가 곁가지를 치고 갑자기 뚝 끝나는 것을 생각했다. 관객에게 어떤 느낌을 줄지는 몰랐지만 해보고 싶었다. 대구가 성립되면 안정감을 주고 뭔가 심은 것이 뽑히는 안도감을 주기 마련이다. 이전까지 내 영화들은 워낙 대구의 구조를 취했는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때 그걸 깨고 싶었나보다. 약간의 위험성도 물론 감지했다. 주인공이 셋인데 둘은 내팽개치고 가니까. 단선적인 구성으로 갈 경우 마냥 색다른 구성이야 찾을 수 있겠지만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따라올 수 있어야 한다. 단선으로 갈 때는 재미나 이해의 측면에서 볼 때 기승전결 구조가 너무 우리 의식에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싸우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단선 대신에 나는 대구 구조를 많이 썼다. 의식한 것이 아니고 찾다보니 나온 거다. 이번 영화도 대구의 구조로 볼 수 있다.
-당신의 영화를 소설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보통의 내러티브영화를 옮긴 영화소설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데도 말이다. 당신이 선택한 서술의 패턴은 당신의 매체가 영화이기에 선택한 방식인가? 만약 소설가였다면 어떻게 이야기했을까.
=어떤 형태의 소설을 언젠가 써보고 싶단 생각은 가끔 든다. 아주 짧은 건데. 다르다고 막연히 생각한다. 지금 난 영화에 그냥 빠져 있는 거다. 가끔 스탭들이 내가 쓰는 현장대본을 보고서 그런 소리를 하면 듣고 웃는다. 나중에 그런 시간이 올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그런 복수의 이야기를 나누는 지점이 떠오르면서 당신의 영화가 시작되는 건가.
=실제로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작업하진 않는다. 기승전결 구조라는 것이 인과관계를 중요시하고 재미로서 반전을 중요시하는데 나는 그 둘 다를 별로 안 좋아한다. 그 자체가 사고의 틀이다. 그것보다는 마음 편하게 반복과 차이를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서 사용하고 싶은 삶의 재료를 담아내는 게 쉽다. 인과적 관계에 집어넣고 보면 결국은 수없이 보아온 영화들과의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패러디는 싫다. 패러디는 패러디일 뿐이다. 나라는 한계, 시야를 통해서 모여지는 삶의 조각들을 모을 수 있는 틀을 계속해서 찾는 것이고 반복이나 모방, 대구적인 구조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발견된 것이다. 언제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내가 택한 그릇이 마음에 든다. <극장전>에서는 그냥 인물이 “어떤 영화를 봤다”로 제시하거나 플래시백으로 앞서 본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그 영화를 관객도 같이 ‘보아야’ 했다. 아예 같이 몇십분 왕창 봤으면 했다. 그게 시작이 된 거다. 그렇게 틀을 잡으면서 반복이 또 나온 거다. 그리고 1부의 이야기는 원형적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사춘기의 이야기가 나온 거다.
-그런데 <극장전>을 영화의 일반적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말하기에는, 영화 속 영화가 아무 영화가 아니다. 영화 속 영화 <극장전>은 동수가 자기 이야기라고 믿고 있는 영화고, 역시 당신이 만든 2부와 아주 닮은 특수한 영화다.
=처음 생각으로는 보통 일반적 영화가 있었다, 1부로. 그런 일반적인 영화를 보고 나오는 남자, 그런 영화에 의한 영향, 이런 도식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구체적으로 들어가니깐 나한테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1, 2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생각들이 구체성을 띠기 시작했다. 아예 적극적으로 연결돼 있는 것을 만들기로 한 거다.
훨씬 밝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 이번 영화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비해 훨씬 밝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런 점에선 <생활의 발견>과 비슷한 정서적 느낌이 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남성의 속물적 느낌 때문에 어떤 거부감을 줬다는 생각도 들고 그만큼 어두운 영화였던 탓일 것이다. 사회화된 남자의 성 정체성이 두드러지게 부각됐고 역겹거나 혐오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 영화에서는 사회화된 남자의 성 정체성보다 인물들 자체가 덜 사회화된 사람이라는 느낌도 들고 섹스가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고 그런 이유들이 있는 거 같았다.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말한 대로 소재의 차이일 수도 있고 배우의 차이일 수도 있다. 영화를 만들기 전에 내가 어떤 정서적인 톤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안 한다. 어떤 계절에 찍고 싶다는 느낌은 있다. 그냥 내가 할 거리를 먼저 찾는 것 같다. 충분히 호기심을 느끼고 형태가 재밌다거나 상황이 내게 개인적으로 다시 한번 질문하고 싶게 만든다든가 하는, 일상 속에 숨겨져 있었는데 한번도 안 봤는데 보면 뭔가 나올 것 같은….
-영화가 밝아진 데는 상원과 영실의 이야기가 풋풋한 청춘들의 이야기라는 점도 있을 것 같다. 아직 어린 친구들이어서 그들의 자살시도가 진짜 자살로 이어지지 않고 소동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아이들의 자살소동을 귀엽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이와 관련해 궁금한 것이 있다. 당신은 영화매체와 창작에 접근하는 태도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된다고 느껴진다. 세상을 보는 눈, 인간을 보는 눈은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나? 혹은 없었나?
=기본적으로 인물을 만드는 데 있어서 그 근거로서 어떤 태도가 내게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우리가 이러려니 믿고 싶은 이상이 있지만 실제로는 그와 상관없는 우리가 있을 뿐이다. 사람은 한순간도 상징이나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게 또 진짜라고 믿는 것도 위험한 거다. 흩어지는 조각들을 부둥켜안고 있는 사람들이란 걸 한편으로 잊지 않고 가는 게 건강한 것 같다. 그렇게 된다고 비참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진짜 가슴 쫙 펴지는 시원함 같은 게 오고 앞에 사람 덜 괴롭히는 인간이 되기도 쉬워진다. 남들은 내 영화가 어둡다는데 나는 만들 때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사람은 이래야 한다는 당위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내 영화를 보고 “저거 왜 저래?” 혐오스러워할 수도 있지만 그 사람들은 당위 덕에 비위가 못쓰게 나빠진 거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이 영화에서 보여준 것의 몇배는 더 비위 상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삶의 사실들을 이상한 걸로 치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이데올로기들에 휘둘리지 않고 앞에 있는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자격이 획득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비위가 약해져서 웬만한 것에도 깜짝 놀라고 혐오스럽게 생각하고 아예 상상조차 못하게 돼서 허구적인 이데올로기 손아귀 안에 꼼짝도 못하고 잡혀 살다 죽는 꼴이다. 나올 엄두를 못 내는 거다. 한발만 내어놓으면 속이 메스껍고 심장이 답답해지고, 온갖 신체적인 반응이 일어나니깐. 그것을 통해 그들이 보라는 것만 편하게 바라보고 그 나머지 우리가 삶의 자연스러운 부분으로 인정해야 할 부분은 백안시하고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런 잣대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 눈에는 앞에 존재하는 대상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잔인하고 비경제적이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는 말은 많이 하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실제로 중요한 문제에서는 자신 속에 심어진 관습적인 반응에 질문조차 하지 않으면서. 그런 억압을 깨겠다고 다른 대안 이데올로기로 튀지도, 새로 만들지도 말아야 한다. 그냥 지금 그 이데올로기의 허구성만 깊이 쳐다보고 느끼면 된다. 그래서 내가 필요한 만큼의 자유를 얻고 덜 힘들어지고 그 사람한테 덜 나쁜 사람이 되면 된다. 완전한 인간은 없다. 우린 결국은 대부분의 시간은 남의 이데올로기와 이미지와 수사 속에 매여서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면서 낭비적으로 살 것이다. 하지만 자기를 너무나 힘들게 하는 몇개의 문제에서만이라도 꼭 제대로 싸울 필요가 절대로 있다.
-정서적으로 좀더 밝은 영화라는 느낌을 주면서도 특이한 것은 이 영화가 소재에선 훨씬 어두운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이다. 죽음이라는 문제가 그렇다. 1부에선 자살이, 2부에선 극중 감독 이형수의 죽음이 문제가 된다.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가, 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도 든다. 상원과 영실의 자살시도는 결국 코미디가 된다. 2부에선 이형수 감독이 죽어간다는 것 때문에 사건이 벌어지고 결국 동수가 “생각을 해야겠다”고 말한다. 한편으로 죽음을 살아가는 과정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코미디로, 다른 한편으론 산다는 것에 대해 되돌아보는 계기로 보고 있다.
=죽음만이 아니라 섹스나 사랑이 죽음과 자꾸 나란히 놓인다. 그런 두 가지 이미지의 결합이 내 속에서 자꾸 나온다는 걸 감지한 적이 있다. <강원도의 힘>도 그렇고 <생활의 발견>에서 김상경이 추상미와 섹스할 때도 그렇고 “그래 우리 깨끗이 죽자” 하는 식의 대사가 나올 때도 그렇다. 김상경을 기용한 이유의 일부다. <극장전>의 1부는 <생활의 발견>의 원형과 같다. 남한테 전달이 안 되더라도 이런 반복이, 만들 때 재밌다. 그걸 통해서 뭘 상징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열려 있는 구현 과정에서 잘 묶이면 물건이 되고 사람들에게 뭘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말로 다 정리된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재료를 수집하는 게 아니다.
-<극장전> 시사회에서 많이들 웃었다. 인물들이 자살 기도까지 하며 아무리 진지한 대사를 간절히 말해도, 아니 진지하고 간절할수록 웃음을 터뜨리는 우리를 포함한 관객을 보면서, 말을 말이 아니게 만드는, 말의 의미를 완벽히 탈색시키는 홍상수 영화의 맥락이 재미있었다.
=재미있는 관찰인 것 같다. 또 다르게 보면 그런 정도의 심각한 상황은 하도 많이들 자극적으로 그려온 것이라 굉장히 더 지독한 표현을 찾지 않으면 사람들이 온전히 보아주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