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인 7인 특강 전문 [5] - 문소리 ①
2005-08-08
사진 : 정진환
정리 : 박은영

강의는 무슨, 담소나 나누죠. (웃음) 제가 강의 제안을 많이 받아요. 교사인 친구들한테도 강연 요청에 시달리곤 하는데, 모든 강연을 정중히 거절하는 입장이예요. 저 보고 지적인 이미지라고들 하시는데, 진짜 지적인지는 어느 누구도 확인한 바 없으나(웃음), 그런 이미지 때문에 강연 요청에 시달리는 것 같아요. 제가 어느 누구에게 강의를 할만한 연배도 아니고, 일가를 이룬 것도 아니잖아요. 이제 시작했고 박차를 가하고 있는 와중이라,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엔 모자라죠. 그래서 10년 20년 하고 난 뒤에 생각해 보겠다는 말로 거절했는데, 씨네21에는 거절 못했어요. 애정이 있기도 하고, 친분을 통한 압박도 있었고, 그래서 거절을 못했어요. 일방적인 강연이 아니라 서로 궁금한 것들을 나누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네요.

오늘 강연 제목이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캐릭터’로 돼 있던데, 다양한 장르 안에서 다양한 캐릭터 소화한 배우로 판단해 주셨던 것 같네요. 나에 대해 무슨 할말이 있을까, 내가 정말 다양한 장르 안에서 다양한 캐릭터 소화해냈나, 생각하게 되네요. 제가 지금까지 <박하사탕> <오아시스> <바람난 가족> <효자동 이발사>를 개봉했구요, 개봉 대기중인 작품들로 <사과> <엄마 얼굴 이쁘네요>를 찍었고, 이제 촬영에 들어갈 <여교수의 은밀한 매혹>이 있어요. 이 일곱편이 제 필모그래피인데, 이게 다양한 장르인가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소재나 형식에서 반복적인 요소가 있어서 분류할 수 있는 것들이 장르일 텐데, 제가 한 영화는 대부분 장르에 맞추기 어려운 영화들, 비장르 영화들이었더라구요. 드라마라고 얘기하기도 하는데, 저는 <오아시스>를 멜로라고 생각했는데, 혹자는 호러라 그러고, (일동 폭소) 어떤 장르에 넣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면 넌 왜 장르영화와 손 잡고 일하지 못했니? 자문하게 되고, 30년 인생 통틀어 돌아보게 됐어요. 생각해 보면 제가 인형 같은 외모 보다는 사람 같은 외모를 가진 관계로 장르 영화와 친해질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장르 영화 배우들은 데뷔부터 정해진 타입이 있잖아요. 김지미씨는 모던 여성, 최은희씨는 고전 여성, 정윤희씨는 백치미 있는 순박한 여인, 장미희씨는 지적인 이미지, 문근영양은 국민 동생으로 타입화됐죠. 저는 <오아시스> 통해서 모든 이미지 깨버린 거라고 생각해요. 하나 있다면, 뭐든지 한다, 어려운 것도 뭐든지 한다 정도? 장르 영화는 친해지기 힘든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출연한 작품 중엔 <효자동 이발사>가 장르 영화와 가깝지 않은가 생각되기도 하네요. 김상진 감독님 코미디에 출연할 뻔도 했다가 연이 안돼 잘 안됐어요. 6월에 들어가는 다음 영화도 비장르 영화예요.

그런 인연은 내 관심이 거기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도쿄 필름엑스라고, 아시아 젊은 감독들을 지지하는 영화제 다녀왔는데, 영화 보고 심사하면서 자극 많이 받고 많이 배웠어요. 돌아와 받은 시나리오들 을 보니 천편일률적이더라구요. 그밥에 그 나물. 아시아로 뻗어나가는, 산업적으로 파워 있는 한국영화가 나는 왜 새롭지 않을까, 산업 안에서 영화들이 서로 비슷해져 가는 걸까, 고민스러웠어요. 그리고 다른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더 확고해졌어요. 그런 영화들이 앞으로 한국영화가 발전하는데 더 큰 디딤돌이 되고 자양분이 될 거라는 내 나름의 단순한 생각이 있거든요. 90년대를 남자배우 전성시대라고 하죠. 80년대는 65% 이상이 여배우 주연 영화였다고 하는데, 호스티스 영화가 대부분이었다죠. 규제도 있었지만, 나름 여배우 전성 시대였던 것 같아요. 90년대 블록버스터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인류를 구하고 전쟁을 하는 것 같은 세상의 큰 고민은 다 남자들이 하게 됐잖아요. 왜 그런 고민을 여자에게 안 맡기냐는 불만이 아니예요. 작은 고민을 하는 영화,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는 상대적으로 작은 영화로 인식되는 데다, 여배우 주연 영화가 현실적으로 만들기 어렵다는 얘기 듣곤 해요. 제 관심은 그런 영화와의 끈을 놓지 않는 데 있습니다.

캐릭터에 대해 얘기해 보자면, 제가 다양한 역할을 한 것 같긴 하네요. 특별하거나 새롭진 않았어요. <오아시스>는 좀 특별했지만, <박하사탕>의 순임이는 구원의 존재였죠. 한 남자를 각박한 세상에서 구원의 빛이 되는 여성 캐릭터는 기존 영화에 많았잖아요. <바람난 가족>에서 전통적 도덕과 관습에 저항 캐릭터를 하긴 했지만, <영자의 전성시대> 무렵부터 얘기돼 왔던 부분이구요. 도금봉, 황정순 선배님들이 보여주신 것과 다르지 않다고 봐요. 결말이 다르다는 차이 정도? 옛날 같으면, 자비로운 남편의 구원을 받거나, 처벌을 받거나 그랬을 테니까요. 다르게 보이지만, 특별한 캐릭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른 캐릭터라면 <오아시스>가 있고, <사과>도 남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긍정적이지 않은, 착한 이미지로 승부하지 않는, 정면으로 ’나 재수 없어요’라고 도전하는, 새로운 캐릭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한국영화가 많이 다양해지고 발전하고 있기도 하지만,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 강금실이 법무장관이 되는 시대에 때를 잘 만나 저도 영화 배우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스펙트럼이 더 넓어지길 바래요. 더 새롭고 독특하고 도전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많이 나타났으면, 저도 그 안에서 할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궁금해하시는지, 그게 더 궁금하네요. 

오기민 | 상투적인 질문부터 던지겠습니다. 연기를 하게 된 경위랄까, 남들과 마찬가지로 대학시절에 고민도 많았고, 연극도 했고, 영화는 <박하사탕> 오디션을 통해 입문했다는 건 알고 있구요, 거기 이르기 전까지의 생활이 궁금합니다.  

문소리 | 고등학교 때까지 갇혀 지냈어요. 집이랑 학교 외에는 간 데가 별로 없어요. 친구들이랑 시내 구경을 다녀본 적도 거의 없었어요. 그러다 친구따라 용기 갖고 본 연극 있었어요. 최민식 선배님이 주연하시고, 신구, 이주실 선생님이 출연하신 <에쿠우스>였는데, 엄청 쇼크를 받았어요. 세상에 이렇게 재미난 게 있다니, 나는 왜 몰랐을까. 열여덟살 학생이 보기엔 노출도 심했어요. 여주인공이 전라로 나오기도 하고, 최민식 선배님은 팬티 바람으로 계시고, 말들이 가죽띠만 두르고 왔다갔다 하구요. 김아라씨 연출이었는데, 굉장히 새로왔어요. 심장이 뛰어서 일주일동안 잠을 못잤어요. 그 감동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밤마다 감상문을 썼죠. 동문지에 기고하기도 했는데, 지금 보면 유치할 거예요. 나는 무엇인가, 고민하게 한 연극이라고 썼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대학 가서도 연극반에 들어갔는데, 스탭으로 끼어도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몸이 약해서 몸으로 하는 것의 신성함 잘 몰랐고, 그것이 주는 경이로움을 잘 몰랐는데, 창작이 이렇게 좋은 일이구나, 절감했죠. 제가 다닌 학교가 대학로 왼쪽에 있었는데, 어느날 오른쪽으로 발길을 옮겨서 극단 사무실로 출근하기 시작했어요. 그 학기에 올 에프를 받아서, 복학하고 한학기를 더 다녔어요. 절실한 게 중요했어요. 나한테 무엇이 중요한가. 피가 끓는 나이였으니까요. 그러면서 연극을 시작했는데, 영화를 해보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못했어요. 극단 관두고 대학 졸업 억지로 하고 나서, 서울예대 연극과 다시 가려고 했죠.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기도 했어요. 그때 남자친구가 종이 한장을 주더라구요. <씨네21>에 난 오디션 광고였어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니까 내가 예뻐보이나 본데, 나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난 연극을 할 거다, 왜 헛바람을 넣고 그러냐, 막 화를 냈죠. 그런데 남자친구가 자기 말을 하나도 안 들어 준다면서, 더 화를 내더라구요. 그럼 들러보지 뭐, 그랬어요. 남자친구 화를 풀어주려고 갔는데, 가 보니까 코디랑 매니저들로 난리들이더라구요. 날 왜 이렇게 난처한 곳에 보냈나, 남자친구 원망을 했죠. 그때가 전무후무한 대규모 공개 오디션이었고, 당일에 발표가 나는 거였어요. 그런데 1차를 보고 나와서, 마음이 바뀌더라구요. 뭔가 해보고 싶어졌어요. 작은 역할이라도 하고 싶었어요. 2차, 3차 하다가 합격을 했죠. 예대 연극과는 가야 되는데, 등록금은 냈는데, 영화는 언제 찍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이창동 감독님께 여쭤 보니까, 언제 찍을지 모른다,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시더라구요. 그러면서도 연극과에 다시 가는 건 권할만하지 않다고 하셨어요. 그러지 않아도 연기할 수 있을 거라구요. 그래서 등록금 찾아서 엄마 갖다 드리고, 유예 기간을 가졌죠. 감독님은 결국 난관을 뚫고 절 캐스팅해줬고,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오기민 | 처음 봤던 때가 생각납니다. 술자리에서 많은 감독들 사이에 섞여 있길래, 저 친구 누구예요? 하고 물었더니, 명계남 대표가 일러주면서, 투자 고민을 털어놓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까 문소리씨가 스스로 사람답게 생겼다고 했는데, 인형같이 생겼다면 <박하사탕>에 캐스팅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창동 감독은 문소리라는 배우의 어떤 매력을 보고 뽑았다고 하시던가요.  

문소리 | 어려운 질문이네요. 대사 안하고, 말하는 사람, 진짜 감정을 보여주는 사람을 찾았다고 하셨어요. 그때 연기 잘하는 사람은 많이 왔지만, 저는 연기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연기를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구요. 무식하면 용감한 거죠. 감독님이 말하는 나의 인상적인 점이 있긴 해요. 전화하는 연기를 해야 했는데, 저는 오랫동안 좋아하던 남자선배,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선배한테 사랑을 고백하라는 주문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제 얼굴이 시뻘개졌대요. 화가 나도 그런데, 목이 얼룩덜룩해질 정도로 새빨개져요. 몇천명이 연기하는 걸 봤지만, 부끄럽다고 얼굴 빨개지는 모습, 요즘 처자치고 드물다 하셨대요. 다른 이유는 감독님께 직접 물어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오기민 | 메인 롤이었던 데다, 영화 외적인 부분, 사회적인 의미가 큰 작품이었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연기 자체에 영향을 미쳤거나 본인 생각에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었나요.  

문소리 | 그 당시에는 시나리오가 무슨 얘길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한 장면 한 컷을 감독님이 만족하실 때까지 표현하는 것이 절대절명의 위기처럼 느껴졌거든요. 어디 물어볼 데도 없고, 조폭처럼 생긴 스탭들 사이에서 허리 펴고 연기하는 것 자체가 힘겨워서, 아무 생각 없었어요. 그 난관을 뚫고 날 캐스팅한 이창동 감독의 용기나 그런 힘이 영화와 더불어 의미있게 여겨졌어요. 처음부터 안티 스타 시스템으로 가겠다고 했으니까. 그건 제가 살아오는데 큰 영향을 미쳤어요. 신인 감독과 일하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고 생각하죠. 저를 캐스팅하는데 얼마나 많은 걱정과 염려가 있었겠어요. 지금까지 일곱편째 작품을 하면서, 새로운 신인 감독의 가능성을 같이 열어가 줄 수 있는, 발견해 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배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늘 생각했어요. 그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요.

이성욱 | 작년 이맘때 인터뷰가 기억이 납니다. <사과> 촬영을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어느 때보다 긴장해있다고 했죠. 나 자신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을 만큼 일상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연기 필요하다, 그래서 달리 기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구요. 온전히 드러내야 한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다 찍었으니,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합니다. 배우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배우는 연기 속에 자신을 숨기게 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고 했는데, 드러내기에 대해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지도 궁금하구요.  

문소리 | 긴장해 있었어요. 지금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사과>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어요. 저는 평범하지 않고 센 캐릭터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매끈하고 부드럽고 말랑한 것보다 거칠고 센 것에 더 어울리고 거기서 폭발하는 데 강점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죠. 앞으로 그럴 기회가 있을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사과>를 선택했어요. 내용도 캐릭터도 특별하지 않아요. 영화는 그 모든 게 어우러져, 그 지점에서는 만족하고 있구요. 드러낸다는 것에 대해선, 진실이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고, 가식만이 중요한 풍토이기 때문에 배우를 하는 게 힘들어지고 더 감추게 되는 것 같아요. 문을 더 만들게 되구요. 배우를 하는 동안 크게 바뀌지 않을 것 같아요. 작품 안에서는 닫힌 빗장을 활짝 열어야 하는데, 평소 닫아오던 대로 작품 안에서도 그러려고 하는 버릇이 남아 있으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오기민 | 같이 작업한 감독 중 셋은 기성이고, 둘은 신인입니다.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한 <사과> <엄마 얼굴 예쁘네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는 일단 논외로 하고, 개봉한 영화들을 중심으로 보면, 감독들 중에서 연기 공간을 넓게 주는 이가 있는가 하면, 틀을 짜주고 그 안에서 활동하게 하는 이도 있을 겁니다. 그런 기준에서, 감독님들 말씀을 듣고 싶네요.  

문소리 | 이창동 감독님은,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같이 작업하는 기간이 고난의 시간이예요. 도를 닦으려면 밥을 안 먹던가, 벽만 보던가, 일부러 고행하잖아요. 거의 그런 심경이예요. 그래, 발레리나 강수진은 발이 문드러지도록 발레를 했다는데, 배우로서 나는 마음이 문드러지도록 일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해야 했어요. 이 감독님은 내 정신, 마음, 가슴에 들어있는 무엇을 막다른 코너에 몰아 놓고 꼼짝 못하게 하시고, 모든 걸 인정하고 직시하고 포기하게 하세요. 그리곤 새로운 걸 연기하게 하세요. 뒤로 넘어갈 만큼 힘든데도, 마약처럼 다시 땡기는 그런 작업이죠. 겉으론 아무 것도 제한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너 지금 마음이 어떠니, 뭘 하고 싶니, 그러시면서, 자유방임적으로 풀어놓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으로 내 마음을 코너로 몰아 넣고 뾰족한 걸로 찌르시는 거죠. 임상수 감독님은 대사를 그대로 하게 하세요. 원하는 말투가 있거든요. 재수없게 잘난 척하는 말투. (웃음) ‘난 다 이렇게 얘기했으면 좋겠다’ 그러세요. 욕은 마음대로 하라면서, 모든 대사는 시나리오 그대로 하라 하세요. 대신 몸은 움직이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해주시는 편이예요. 물론 <오아시스> 다음이라, 훨씬 더 자유로움을 느꼈겠지만요. 훨훨 날아다니는 것 같은 자유로움이랄까. 섹스신이나 혼자 돌아다니는 장면에서 과감하고 자유로운 몸짓 보이는 걸 좋아하셨어요. <효자동 이발사> 감독님은 신인이셨죠. 그 영화에선 제가 확실한 조연이었기 때문에 강호 선배님과 감독님의 작업 지켜보고, 그 사이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내 자리를 마련할까 고민했어요. 임찬상 감독님은 여자친구가 없는데, 연애하고 싶어하세요. 꿈에서 여자 얼굴 보고 눈 뜨면 잊고 그러신대요. 그러면서 저더러 마음대로 하라 그러시더라구요. 청와대 뒷길 걸어가는 장면에서 궁시렁대는 장문의 대사는 제가 지어내야 했어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표현하려는 바가 있었지만, 엄마 부분은 여자를 잘 모른다며 제게 많이 맡기셨어요.  

오기민 | 남성 감독들이 여성에 대해 모르고, 잘못 다룬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감독님들의 여성에 대한 이해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문소리 | 대부분 남자 감독은 여성 캐릭터에 판타지가 있는 것 같아요. 현실에서 얼굴 보는 여성에겐 그런 게 없으면서 영화 캐릭터엔 판타지를 부여하더라구요. 아님 자신을 억압하는, 무서운 어머니 같은 존재로 바라보구요. 같이 붙어서 살아갈 만한 존재로 보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 데서 서운한 지점이 많았죠. <사과> 찍을 때도 그런 논의를 많이 했어요. 여자가 이랬으면 좋겠다, 원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곤 했어요. <바람난 가족> 캐릭터도 급하게 몰리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감독님을 못살게 굴었어요. 여자들 멋있어 보이는 부분만 모아서 만든 거지, 이런 여자는 실제로 없다,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자 아니다, 그러면서 따졌죠. 하도 그러니까, ‘너 같이 독한 년은 처음이야. 그만 얘기하자’ 그러시더라구요. 그러면서 자신이 멋있다고 여기는 여자친구들을 만나게 해 주더라구요. 훌륭한 분들도 계시긴 했지만… 임 감독님도 여성에 대한 판타지가 강한 분이예요. 남자에겐 잔인하고, 스스로에게도 잔인하지만요. 이창동 감독님은 워낙 저를 애처럼 다뤄 주셨기 때문에 여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나이 많은 선생과 학생이 얘기하듯 했으니까. 이 감독님도 판타지가 많으신 분이죠. 여자에게 남자의 인생을 회개하게 하는 역할을 주시잖아요. <박하사탕>는 말할 것도 없고, <오아시스>의 인간 말종 홍종두에게 같이 자자고 잡는 것도 여자잖아요. 여자가 속이 넓은 인간이다, 라고 인정해주시는 면은 있는 것 같아요.  

이성욱 | <바람난 가족>에서 연기하신 캐릭터는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강수연씨가 연기한 캐릭터의 아줌마 버전인 것 같습니다. 쿨한 여성들의 아줌마 버전이랄까요. 영화사적으로는 진전돼 있고 그래서 반가운 캐릭터죠. 하지만 지적인 자유주의자의 판타지적 측면이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여성 캐릭터가 남성에게 이용당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문소리 | 영화에서 온몸으로 보여줬는데, 말로 정리까지 해야 하나요. (웃음) 은호정은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강수연씨 캐릭터의 아줌마 버전으로 볼 수도 있어요. 이름이 같거든요. 그런데 저는 김여진씨의 아줌마 버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영화 찍으면서 그런 느낌을 더 많이 받았어요. 몸은 자유로워보이지만, 실제로 그 여자가 얼마나 자유롭게 섹스했는지 나타나지 않거든요. 그 여자가 별 거 하나요? 집에서 옷 벗고 돌아다닌 것 말고는 대체로 집안일만 충실히 해요. 아이와 시부모도 열심히 챙기구요. 남편 밖으로 도는 걸 알면서도 집에 있죠. 그런 여자지만, 무용을 하고 옷을 벗죠. 몸이 예민한 여자라서요. 감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요. 그러다 옆집 봉군(봉태규) 만나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 거죠. 자신의 몸이 원하는 것, 욕망을 찾은 거죠. 거기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여자는 욕망을 찾아서 해결할 줄 알았던 거예요. 남편과 섹스하다가 자위하고, 옷을 벗고 춤을 추고, 무용실에서의 섹스를 벌이고. 성 모랄이 대단히 남다른 여자가 아니라, 그렇게 찾는 기회를 가진 것 뿐이예요. 그 여자의 특징이고 훌륭한 점이라고 생각해요. 살다 보니, 그게 참 어려운 일이더라구요. 자유롭게 즐기는 것보다, 그게 더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오기민 | 촬영 없을 때 현장에서 뭐하세요.  

문소리 | 어슬렁거려요. 차에 갇히는 거 답답해서 싫어해요. 막내 스탭들 하드도 사주고, 다른 배우들 연기하는 거 지켜보기도 하고.  

오기민 | 폴란드에서 촬영할 때 보니 모니터가 없더라구요. 러시를 중간에 볼 때도 배우를 부르지 않구요. 배우가 화면 속에 나온 연기를 보고 수정할 수도 있으니까, 그걸 못하게 하려는 거래요. 우린 그런 건 없죠. 대부분 보여주잖아요. 아예 러시를 안 보는 배우도 있고, 남의 것까지 보는 배우도 있는데, 어느 쪽이신가요.  

문소리 | 보는 편이예요. 아직은 보면서 배우는 게 많아요. 내 마음 속엔 늘 그런 자격지심이 있어요. 영화를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현장에서 커 온 사람이 아니다, 영화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현장 어슬렁거리는 것도, 이게 씨스탠드구나 그런 거라도 배우려고 그래요. 그러다 여기까지 왔구요. 녹음기사님 하는 거 보면서도 마이크 생김새에 따른 차이도 배우구요. 연기는 컷하면서 즉각적인 느낌으로 알아요. 모니터 통해서는 다른 시스템과의 조화를 보는 거죠. 그림자나 각도처럼 다른 파트와의 조화를 보는 거예요. 그게 공부가 되고 그렇게 버릇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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