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인 7인 특강 전문 [4] - 박찬욱 ②
2005-08-02
사진 : 이혜정
정리 : 문석

남동철 | 감독님 영화의 특징적인 것 중 하나가 어떻게 보면 궤변이랄 수 있고, 어떻게 보면 역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주장들이 많이 등장하거든요. <복수는 나의 것> 같은 경우는 ‘나쁜 유괴가 있고, 좋은 유괴가 있다’라는 그런 얘기가 그런 경우고. <올드보이>에서는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물에 가라앉는 건 마찬가지다’라고 얘기하지만 사실 모래알과 바윗덩어리는 큰 차이가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당연히 맞는 말 같지만 아무도 그렇게 표현하지 않는 그런 부분이 있거든요. ‘웃어라 온세상이 너와 같이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라’ 이런 말도 곰곰이 뜯어보면 무언가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틀린 말 같기도 한 말이 등장하는데, 그런 것과 감독님 영화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 맺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박찬욱 감독님이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을 굉장히 좋아하신다고 해서 하나 봤더니 다 그런 식의 표현들이에요. 그래서 저는 아주 재밌게 보지 못하겠더라고요.

박찬욱 | 뭘 보셨는데요?

남동철 | <고양이 요람>이요. 그런 것 속에서 감독님이 발견하는 게 뭣일지 좀 궁금해졌어요.

박찬욱 | 커트 보네거트를,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작품은 다 읽었는데 생각 밖으로 꽤 많이 번역돼 있어요. 그렇게 들으니까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커트 보네거트는 직접 영화에 큰 영향을 준 작가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도 제일 좋아하는 작가인 것은 또 사실이에요. 너무나 웃기고, 그런데 그 유머는 항상 도덕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를 한명 꼽으라면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원작을 영화로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기도 하고. 가끔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 있어요. <제5도살장>이란 게 있는데, 보네거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인데, 조지 로이 힐 감독이, 상당히 유능한 감독이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이지 못했어요. 잘못 만들었어요. 글렌 굴드가 음악을 맡았다는 게 기억할만한 정도이지. 영화로 만들기 참 어려운 사람이죠. <마더 나잇>이란 영화도 만들어졌는데, 그 영화도 잘 못 만들어졌어요. 키스 고든이 만들었는데.

닉 놀티가 참 좋아하는 작가죠. 닉 놀티가 그 사람 영화에 두편인가에 나왔어요. 영화로 만드는 일은 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의 작품은. 왜냐하면 그 사람 소설의 재미는 자기 등장인물에 대해 아주 객관적으로 묘사하면서 약간 비웃거나 냉소적인 코멘트를 하는 게 재미가 많이 오는데, 영화에선 그게 힘들기 때문에 안 만드는 게 좋겠지만, 그 사람의 농담하는 방식은 어떻게든 배워보고 싶어요. 아까 지적하신 그 대사들이 보네거트를 생각하면서 만든 것은 아닌데, 그런 되지 않는 소리, 말 안되는 소리를 정색하고, 아주 심각하게 하는 것. 제가 보네거트의 이야기 중에 가장 좋아하는 뭐냐하면, 언젠가 한번 글도 쓴 적이 있는데, <제5도살장>의 앞부분에 나오는 얘기에요. 어느 소설가가, 그러니까 보네거트 자신인데, 할리우드에서 열리는 파티에 가게 됐는데, 어느 술취한 할리우드 제작자가 와서 ‘뭐 하시는 분입니까’ 해서 ‘작가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작품을 쓰고 계십니까’ 해서 ‘반전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제5도살자>가 반전소설이에요. 그랬더니 이 제작자가 ‘차라리 반 빙하 소설을 쓰지 그러십니까’ 그랬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 빙하의 움직임은 막을 수가 없잖아요. 그런 것처럼 전쟁도 막을 수 없는 것인데. 반전이라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봐야 전혀 성사될 수 없는 헛소동이다, 라는 뜻으로 차라리 반빙하 소설을 쓰지 그러셨어요, 그랬다는 거죠. 그런 것이 보네거트 식의 농담이에요. 그래서 많은 양심 세력과 작가들과 많은 사상가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무슨 행동을 하고 작품도 쓰고 했지만 전쟁이 없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잔인해지고 더 많은 수를 한꺼번에 죽일 수 있게 되고.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잖아요. 보네거트의 세계관은 참 어둡지만, 비관적이지만, 그렇게 웃으면서 흘러가는 그런 염세주의자의 세계죠.

남동철 | 제가 준비한 질문 중에는 마지막인데, 박찬욱 감독님 영화에서 배우들의 개성이라고 하는 것들이 굉장히 뚜렷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거든요.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자면 감독님이 ‘송강호는 차가운 배우고 최민식은 뜨거운 배우다’라는 표현을 예전에 하신 적이 있는데, 사실 그 두편의 영화에서 그렇게 보여지기 전까지는 아주 일반적으로 모두가 그렇게 느끼진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개성들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사실 이번에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씨의 모습도, 그런 차가움을 언젠가 본 것 같긴 하지만 딱 집어서 무서울 것 같아,라는 느낌은 처음 받았던 것 같은데, (웃음) 감독님이 생각하는 배우에 대한 연출론을 여쭤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박찬욱 | 전에는 배우들로부터 좋은 연기를 이끌어내는 첩경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는 ‘술을 자주 많이 마신다’라고 대답을 많이 했는데, 이영애와 일하면서는 그런 대답을 할 수 없게 됐어요. 우리 현장은 술도 안 마시고, 저는 이 영화하면서 담배도 끊었고. 담배 끊게 된 것도 리딩을 하는데, 영애양하고 둘이 앉아서 대사도 읽어보고 작품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데, 내가 담배를 하도 피우니까 너무나 힘들어 하더라고요. 말은 못하고 계속 기침을 하면서 힘들어해서… 그게 어떤 다른 여자였다면 담배를 안 끊었을 수도 있지만. (웃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물론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고 그 전에도 끊어야지 생각은 했지만. (웃음) 하여튼 영애양 덕분에 웰빙현장이라고 부르고 있어요.(웃음) 송강호, 최민식과 일할 때는 정말 다르죠. 그래서 상당히 몸도 건강해진 것 같고. 어쨌든 술 마시면서 연기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더이상 적용할 수 없는 방법이죠.

연기… 참 연기는 정말. 내가 얘기해준 적 있잖아요. 신하균과 정재영과 술을 먹을 때, 내가 얘기해준 적 있나? 셋이서 술을 먹는데요, 정재영이 그랬나? 거기 누가 있었더라. 하여간 감독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예전에 <올드보이> 오디션을 할 때 강혜정양이 왔는데, 문승욱 감독의 <나비>를 찍었잖아요. 그래서 그 감독과 일할 때는 어땠냐고 질문을 했는데 너무나 인상적인 대답이 나왔어요. 문승욱 감독에 대해 아실지 모르겠는데 아주 책도 많이 읽고 굉장히 지식인이에요. 그래 가지고 이 장면의 연기를 설명할 때 한 10분, 20분을 굉장히 어려운 단어를 써서, 그리고 아주 복합적인, 도저히 동시에 하기 힘들 것 같은, 자기로선 도저히 자신이 없는,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고’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런 것을 10분동안 설명해주신대요. 그러면 자기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대요. 그때 같이 연기했던 사람이 김호정이잖아요. 호정 언니한테 가서 감독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데 이거 어떻게 하라는 소리야, 언니, 그러면은 “아 별 거 없어 그냥 울라는 소리야.”(일동 폭소) “그냥 울어” 그런대요. 그래서 그냥 울면, “아, 잘했다”고.(웃음) 그런 얘기를 혜정양이 해가지고…. 사실 오디션할 때 강혜정이 제일 점수를 가장 높게 받은 것 중 하나는 그런 얘기였어요. (웃음)

그런데 이제 신하균, 정재영과 술 마실 때 그 얘기가 다시 화제에 올랐는데, 공감하는 거지 이 두 배우도. 어떤 감독들은 뭐 이런대요. 하나의 컷이 있다고 한다면 ‘처음 시작은 5초동안은 굉장히 슬픈 듯이 있다가, 3~4초에 걸쳐서 기분이 나아지는 듯하다가, 그런 듯한데 갑자기 탁 꺾어서 뭐 어떻게 하고, 막 하다가 그런데 종합적으로는 뭐 웃겼으면 좋겠다’(웃음) 뭐 이렇게 얘기한대요. 그러면은 그런 것은 도저히 할 수도 없고, 그런데 초창기에는 그거 못하겠습니다, 그런데요. 이제는 안 그런대요. ‘예 이제는 알겠습니다’, 그러고서 자기가 생각한대로 한대요. 그러면 잘했다고 그런다는 거지. (웃음) 그래서 신하균에게도 물어봤죠. 그랬더니 장준환 감독이 그런대요. 주문이 너무 어렵고 까다로워서, 복잡하고. 그래서 자기는 똑같이 한대요. 네 그러고 그냥 자기 거 한대요. 그러니까 사실, 배우들은 다 그래요. 그냥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는 거지, 감독이 뭐라고 했을 때 끄덕끄덕만 하는 거예요. (웃음)

근본적으로 그런 존재라고 생각해요, 배우는. 그래서 가급적이면, 그날 두 배우랑 술마신 이후로 가급적으로 자세하게 설명 안하려고 그러죠. 연기는 사실 언제든지 복합적이고 복잡한 연기가 좋죠. 그런데 동시에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다, 이렇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아주 무리하다고 생각해요.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라는 것이 우리가 볼 때에는 참 좋지만, 동시에 그렇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따라서 잠깐 웃겼다가 잠깐 울렸다가, 또는 잠깐 슬펐다가 뭐 이런 식으로 빨리빨리 전환하는 것이…. 마치 점묘파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 다른 색깔이 분리돼서 찍혀있지만 멀리서 보면 합쳐져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재빨리 변화하고 전환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 결과를 봤을 때는 동시에 두가지 세가지 감정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들 중에 감독이 되려는 분이 있다면 절대로 배우에게 동시에 뭘 해달라고 하지 마세요. 그리고 너무 관념적인 설명은 피하는 게 좋겠죠. 그리고 항상 뭔가 상황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는 것이 쉬울 때 많고.

결국 감독이 배우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것은, 한번 찍고 나서 ‘이것은 아니다 다시 찍자’, 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물론 그것은 절대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지만 고작 그거예요. 어떻게 해라라고 말하긴 힘들어요. 어떻게 해라, 물론 말은 쉽게 할 수 있죠. 그리고 다들 끄덕끄덕하죠.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심플할수록 먹히기가 쉬운, 효용되기 쉬운 거지, 복잡하면 복잡해질수록 끄덕끄덕 시늉만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쉬운 거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배우들에게 아무 얘기도 안하고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진 않지만 좀 줄여보려고 하고 있어요. 뭔가 이런 연기를 만들어야지, 미리 머리 속에 상을 갖고 있으면 그게 참 힘들어져요. 한번 그 상이 딱 성립되면 배우가 아무리 좋은 연기를 해도 이미 고정관념이 박혀있는 한은 만족하기 힘들고, 오히려 좋지 않은 연기만 자꾸 유도하기 쉬워요. 항상 반쯤은 흐릿한 상을 만들어놓고 많은 부분은 가능성으로 남겨놓아야 돼요.

저도 그런 실수를 많이 했는데, 그러다보면 아주 작은 것, 무슨 억양이나… 자기가 생각하는 건 있는데 그게 아주 정확하게 표현돼야 만족스러우니까 별 쓸데 없는 것까지 자꾸 그것을 반복적으로, 그것이 될때까지 자꾸 찍게 되죠. 그러다보면 더 중요한 것은 날아가 버리고. 그래서 그것을 조심해야 되는데, 쉬운 일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영화를 만들어갈수록 미리 상상하는 일이 점점 더 쉬워지니까. 경험이 쌓일수록. 또 어떤 배우와 일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송강호와 한다면 송강호를 잘 아니까 이렇게 하겠지, 라고 딱 미리 성립된 게 생기니까. 그러면 새로운 연기는 나오지 않겠죠. 그래서 하여간 많이 열어놓고, 많이 맡겨두는 것이, 그리고 뭔가 요구할 때는 가능한 한 단순하게 하는 것.

그렇게 나도 말을 쉽게 할 수 있는데 실제 하기는 어려워요. 연기는 정말 감독이 관여할 수 없는, 정말 마지막까지 컨트롤할 수 없는,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에요. 기껏 할 수 있는 일은 ‘다시’라고 말하는 것 밖에 없어요. 그것은 아주 소극적인 방법이죠. 그러니까 아무리 스토리보드를 자세하게 꾸며도 현장이 긴장될 수밖에 없는 것은, 또는 재미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연기의 영역이 남아있기 때문이에요. 히치콕이 스토리보드를 갖고 있기 때문에 현장이 좀 재미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그의 영화에서 연기라는 것이 너무나 통제돼 있고, 발랄한 생명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것과 관계있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스토리보드를 갖고 있더래도…. 아마 제가 만드는 스토리보드는 히치콕이 만들었던 스토리보드보다 자세할 것 같아요. 하여간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자세하게 만들려고 하니까. 그런데도 현장은 항상 긴장되는 게 바로 배우들 때문이죠. 그래서 저들이 망치면 어떡하나, 라는 걱정에서부터 저들이 오늘은 나에게 어떤 충격을 안겨줄 것인지에 대한 그 설레는 마음까지. 그것이 영화일을 하는데 가장 큰 보람이고 재미죠. 그래서 언제나 배우들, 물론 잘 하는 배우여야겠지만. 그 배우에 대한 존경심. 아무리 어린 강혜정양이라고 하더라도 일 잘하는 배우들에 대한 존경심은… 어떤 사람보다도 나한테는 그들이 가장 사랑스럽고 제일 경의를 바치고 싶은 그런 존재에요.

이성욱 | 시간이 쏜살처럼 지나가는데요. 저도 다른 질문을 몇가지 준비했는데 하나만 질문을 던지고 마이크를 여러분께 넘길게요. 박 감독을 말할 때 장르적인 재미, 그 경계를 탈주하는 즐거움 뭐 이런 것을 말하는데. 사실 감독님을 얘기할 때 <공동경비구역 JSA>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감독님이 늘 만들고 싶어하는 인혁당 소재의 영화가 기다려지기도 하고. 현실에 대한 발언을 늘 아낌없이 하시는 감독님인데, 현실, 굉장히 민감한 현실, 혹은 시대에 관한 것을 영화화할 때 장르적인 재미랄지, 창작의 상상력, 그런 것들을 어떻게 절묘하게 배합할지 감독님만의 원칙이 있을 듯 한데, 감독님의 그런 원칙이라든가 말씀을 해주시죠. 사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 <살인의 추억> 같은 경우는 대중의 호응을 받았지만 <그때 그사람들> 같은 영화는 대중의 호응을 못 받았거든요.

박찬욱 | 허, 어렵네요. <공동경비구역 JSA>는 실화는 아니었기 때문에 똑같이 말하긴 힘들 거예요. 사실 처음에 명필름에서 제의를 받았을 때 그것이 미스터리영화다, 라는 설명이 없었다면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 같아요. 물론 원작을 읽은 다음에 결정했겠지만, 책을 건네주면서 했던 얘기가 이것은 판문점에서 벌어진 의문의 총격사건을 수사하는 탐정영화다, 라는 말이… 그것이 재밌겠다고 생각했던… 덥석 그냥 책을 읽기도 전에 하겠다고… 사실 그때는 뭐가 됐든…(일동 폭소) 거절할 계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읽은 다음에 대답을 했을텐데, 그 얘기에 혹해서 바로 하겠다고 얘기를 했어요. 그만큼 이렇게 아주 현실적인,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거나 실화를 갖고 만든다거나, 어떤 주장을 담은 영화를 만들 때, <공동경비구역 JSA는> 명백히 어떤 주장을 담은 영화잖아요. 그럴 때는 장르가 참 유용하다고 생각해요.

장르의 클리셰, 장르의 컨벤션, 이런 것이 뜻밖에 아주 유리하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대중을 끌어들이기 좋아서… 뭐 그런 면도 있죠. 그러나 자칫 설명적이거나 너무 교훈을 강요하려고 한다든가, 또 구성상 지리멸렬해진다거나 그런 일을 막을 수 있는 장치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인혁당 얘기를, 제목은 <4월9일>이라는 건데, 언제 만들지 몰라도 만들게 되면 가능한한 그런 구성을 갖고 싶은데, 이 스토리가 그게 좀 어려운 스토리에요. 이게 장르적으로 좀 해결하기 힘든 애기라서 가닥을 못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아주… 그냥 사건을 연대기 순으로 푼다거나 어떤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잡아서 보통의 드라마로 해결하거나 그렇게 되겠지만. 그리고 <그때 그사람들>은 아직 못봐서 모르겠어요. 영화를 못 본 게 참 아까운데. 아, 인혁당 얘기와는 별개인데, <그때 그사람들> 사태를 보면서 아 좀 더 있다 만들어야겠구나. (웃음)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들 때는 이은 감독하고 저하고 국보법 위반으로 재판받고 달려갈 것 각오하고 시작했던 영화인데, 근데 그거는 어떻게 참겠는데 영화가 이렇게 잘리고 막 이런 것은… 진짜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면서도 그렇게까지 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인혁당 사건도 이미 가해자측의, 대부분 살아있고 상당히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고, 그러니까 그들이 어떤 짓을 할지 모르겠고. (웃음) 그런데 참 그런 문제는 힘들어요. 또 피해자측, 유족들은 그분들이 혹시라도 뭔가 상처를 받거나 뭔가 불만족스러운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은 더 두려운 일이죠. 봉준호 감독이 느꼈던 심정도 그런 것이겠죠. 그러니까 가해자와 피해자 어느 쪽을 생각해도 겁이 나는 프로젝트예요. 그래서 계속 미뤄두기만 하고 자료조사만 하는, 각본은 한줄도 쓰지 못한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관객과의 대화

이성욱 | 그럼 여러분의 질문을 받겠습니다.

관객1 | 만나뵙게 돼서 반갑고요, 꼭 질문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안녕 프란체스카>를 보면 박찬욱 감독이 나오고 있는 것 혹시 보셨어요? (웃음)

박찬욱 | 신해철 나온다는 그것? 몰라요.

관객1 | 모르신다고 하면 할말 없는데….

박찬욱 | 아, 저 <친절한 금자씨> 포스터 패러디한다는 거죠? 얘기 들었어요.

관객1 | 그걸 보면서 너무 놀라고 너무 즐겼던 이유 중 하나가, 여태까지 세상이 박찬욱 감독님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 존경이라든가, 그런 태도였다면, 되게 재미의 재료로 삼았다는 게 재밌었거든요.

박찬욱 | 이영애씨만 패러디되는 게 아닌가 보죠?

관객1 | 감독님도 나오시는데…. (웃음)

박찬욱 | 진짜요? (웃음)

남동철 | 반찬욱 감독님…(웃음), <건방진 금자씨>는…(웃음).

박찬욱 | 아니, 그 얘기는 들었어요. 포스터 얘기는 들었는데. 포스터 얘기죠, 그게?

관객1 | 아뇨. 영화장면, 촬영하는 장면도 나오거든요. (웃음)

박찬욱 | 아, 그래요?

관객1 | 실제로 감독님과 비슷하게 생긴 분이 나오셔갖고 연기지도 하고 막 이러는 것도….

박찬욱 | 아니 장동건이 거기에 나와요? (웃음, 소란)

관객1 | 보셨다면 소감이 어땠는지 여쭤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오시니까 좀….

박찬욱 | 왜 주위에서 아무도 얘기를 안해줬을까.

관객1 | 그런데 재밌었나 봐요. 지지난주에 한번 나왔는데 지난주에 또 나오더라구요. 그 부분이 참 재미있었는데, 넘어가야할 것 같고요. 두번째는, 감독님 작품을 보면 계속 작품을 해오던 배우분들과 계속 하게 되는데, 배우들이 계속 작품에 나올 때 많은 변화를 가지려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캐릭터나 그 사람의 그런 게 있기 때문에, 변화되지 못하고 고정적인 있을 법한데도 불구하고 감독님의 작품 속에서는 너무 다양하게 변화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재미를 얻고, 마찬가지로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이영애씨가 어떤 모습으로 나올까 굉장히 기대가 되거든요. 감독님도 마찬가지로 대중이 그 배우에게 가진 이미지나 그런 것 같이, 더 알기 때문에 더 많이 그런 것도 있을텐데, 실제 배우를 캐스팅하는데 있어 권한을 갖고 계신다거나 그런 부분하고, 실제로 어떤 캐릭터를 만들어낼 때 여태까지 보여왔던, 달라지는 배우의 모습을 어떤 식으로 구상하는지에 대해서 궁금하거든요.

박찬욱 | 캐스팅을 하는데 있어서는 <공동경비구역 JSA>가 끝나고 <복수는 나의 것>에서부터 전권을 가졌죠. 그리고 대중이 스타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이란 게, 그런 것을 따지고 고려했다면, (<복수는 나의 것>의) 그 역을 송강호에게 맡기진 않았을 것 같아요. 분명히 그런 송강호는 보고 싶지 않았던 거고.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인데. 뭐 설마 그러겠어, 라는 식으로 그냥 넘어가버렸던 것이 흥행실패의 큰 이유죠. (웃음) 그렇지만 송강호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또 <남극일기>를 하고 있죠. (웃음) 영화 한편을 만드는 동안에 그 배우에 대해 많이 알게 되잖아요. 그런 생활을 할 때 뭔가 발견되는 게, 그 영화의 역할 말고도, 그러니까 <공동경비구역 JSA>를 찍을 때, 그 영화에 나오는 송강호 말고 다른 송강호를 발견하게 되잖아요. 맨날 어울려서 살다 보면. 거기서부터 만들어지는 거겠죠. 송강호라는 사람이 되게 웃기다고 하지만, 사실은 또 아주 엄격하기도 하고 냉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잔인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냉정한 면도 있고, 아주 단호하고. 뭐 그런 여러가지 면을 보게 되니까. 사실 그게 뭐 송강호만 유독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런 것처럼,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그에게도 그런 면이 있다 이거죠. 그런 것을 한번 보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거고.

영애양도 아주 생글생글 눈웃음치고 조용조용 말하고 그런 이영애가 있는가 하면, 또 예를 들면 완전히 날조된 스캔들 기사 같은 것을 보면 마약검사를 경찰에 가서 받았다더라, 그런 작문성 기사가 나오고, 그런 데 대해서 분통을 터뜨릴 때도 있고. 또 뭐 하여간 사람이니만큼 어떤 때 무표정하게 있을 때에는 좀 무서워보이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푼수같이, 실없는 소리, 썰렁한 소리를 해서 빈축을 사기도 하고. (웃음) 그런 여러가지 모습이 있잖아요. 그렇게 본 것이 <친절한 금자씨>에 나오는 거지. 그러니까 한번 일해본 사람과 또 하나는 것이 쉬울 수 있죠. 뭐, 예를 들면 누가 있을까요. 뭐 심은하 양이다. 영화만 봤지 모르니까 그 사람은. 어떤 캐릭터로 만들어야 할 지 아무 감이 안 오잖아요. 그래서 아마 한 사람과 또 하게 되고 그러는 것 같아요. 최민식씨가 <친절한 금자씨>에 악역으로 나오는데, 그것도 최민식씨가 실제로 갖고 있는 개구쟁이 같은 면, 또 어떨 때는 얄미운… 그런 데도 있고. 그런 것이 섞여서 만들어진 캐릭터예요. 그래서 최민식씨로서는 한번도 보여지지 않은 모습인데, 그를 잘 아는 사람이 볼 때는 맨날 보던 모습이기도 해요. 그런 거죠. 그래서 전혀 안 해본 사람과 처음 하는 일이 두려운 거고, 또 설레기도 하고 그렇죠. 늘 해본 사람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배두나도 끌어오고, 강혜정도 끌어오고. <친절한 금자씨>의 경우에는 아주 중요한 조역으로 처음 일해보는 사람이 수십명 등장해요. 또 그럴 때는 그럴 때 나름대로 재미가 있고, 이런 생각을 하게 돼죠. 아, 다음 작품에는 저 사람을 이렇게 해봐야겠다.

관객2 | <복수는 나의 것> 보면, 마지막에 송강호가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응징을 당하는데, 맨 처음에 봤을 때는 당연히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문득 봤더니 경찰이 얘기할 때 알고보니 당원이 한명 밖에 없다고 그러잖아요.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웃음)

박찬욱 | 관객은 대개 형사들이 하는 소리를 믿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 대사를 썼어요. 사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는데, 단지 형사들, 법 집행자들이 하는 얘기니까 꼭 사실일 것 같잖아요. 그래서 관객들이 영화 보는 어떤 관습이랄까요, 어떤 버릇이랄까, 그런 데 일대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웃음)

관객3 | 혹시 과거와 그리고 지금, 그리고 미래에 감독님을 지탱할 가치관이 있다면 그게 어떤 것인지 궁금하고요. 지금까지 감독님 영화를 보면 특히 주인공에 대해서 봐주는 게 없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특별히 그 점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인지.

박찬욱 | 가치관을 말로 정리해놓고 있는 건 없어요. 그냥… 가훈. (웃음) 우리 딸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자마자 숙제로 가훈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받아서 급조된 가훈이 있어요. ‘아니면 말고’. (폭소) 그렇게 적어보냈더니 (웃음) 무슨 뜻이냐고 또 알아오라고 선생님이 시켰어요. 그래서 사람 힘으로 안되는 일에 너무 매달려서 속썩이지 말자, 그런 뜻이라고 했어요. 그게 사실이에요. 대개 많은 책이나 TV나 그런 데 보면 사람 힘으로 의지가 있으면 다 해낼 수 있을 것처럼, 뭐든지 이룰 수 있을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아니잖아요. 우리 다 알고 있잖아요, 아니라는 것. 그렇게 안되는 걸 갖고 이룩해야 되겠다고 그러는 것은 아주 어리석고 미련하고 불쌍한 일이죠. 안될 건 빨리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가치관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좌우명 같은 거라곤 말할 수 있어요. 그리고 주인공 인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해왔는데, <친절한 금자씨>부터 달라졌어요. 아무래도 송강호, 최민식과 이영애는 다르지 않겠어요. (웃음) 그러니까 이번에는 이금자라는 인물에 대해 동정심을 듬뿍 가지고 만들었어요.

관객4 |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 만드시고 쫄딱 망하시고, (웃음) 택시 한번 타기 위해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그런 기간을 거치시고 <삼인조>를 만드시고 또 쫄딱 망하시고, (웃음)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드셨는데요. 아까 방금 <친절한 금자씨>를 찍기 전에는 안 되는 일은 빨리 포기하라는 그런 가치관이었는데, 기나긴 시간동안 될 걸 알아가셨기 때문에 포기를 안하셔 가지고,(폭소) 그 기나긴 시간동안 <비디오 드롬>이란 불후의 명작을 내시고 영화평론도 하시면서 영화감독이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신 그 원동력이 궁금하고요. 그리고 뒤에 (박찬욱 감독 뒤에 걸린 현수막에 적힌 행사의) 타이틀이 ‘한국영화의 현재를 묻는다’인데 한국영화의 현재를, 백윤식씨와 문소리씨와 박찬욱 감독님에게 물은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웃음) 그래서 2005년 대한민국에서 감독님이 영화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이렇게 두가지가 궁금합니다. 아, 그리고 그 기나긴 시간동안 겪으셨던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박찬욱 | 왜 포기하지 않았냐 하면, 솔직히 말하면,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될 줄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건 안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를 생각해보면 무얼 근거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그때는 오기였겠죠. 그때는 아무리 곰곰히 생각을 해봐도, 예를 들면 유학을 간다거나 그런 길이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활동 중인 감독이나 준비 중인 지망생이나 주변에서 이렇게 봐도 나만큼 영화를 잘 만들 것 같은 사람이 안 보이는 거예요. (웃음) 근데 내가 실패한 두편의 영화를 근거로 생각해봤을 때는 내가 그렇게 스스로 믿을만한 구석이 없거든요. 근데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앞으로 만들 영화를 구상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그게 재밌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 하여간 아주 괜찮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러니까 이것을 그만두는 것이 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웃음) 그런 과대망상이 있었으니까. 그게 합치면 한 7~8년 되는 시간인데, 그동안 계속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한편을 만들겠다고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뭐 재밌는 일이 있었나고요? 재밌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그 기간 동안에 이훈이라는 친구를 사귀게 됐는데, <달콤한 포로> <마스카라> 두편의 영화를 만들고 화재사건으로 죽었어요. 그 친구가 미국에서 영화공부를 하고 한국에 왔을 때, 누구 소개로, 누구 소개로 만났더라? 하여튼 누구 소개로 만나서 친하게 지냈어요. 몇년동안, 죽을 때까지. 그때 같이 어울렸던 친구들, 이무영 감독 하고 영화음악하는, <올드보이>도 했던 조영욱 하고… 또 그런 몇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어울려 다니면서 매일 술 마시면서 영화 보고 그랬던 그 시절이 하여간… 그 친구들 덕으로 버텼다고 할 수도 있겠죠. 한편으로는 와이프 덕으로 버티고, 한 편으로는 그 친구들과 놀면서. 그리고 그때 영화를 보는 눈도 많이 달라졌고, 좀 더 성숙했다고 할까. 아까 히치콕 얘기도 했지만, 히치콕 스쿨을 졸업한 것이 그 친구들과 어울리면서였다고 생각해됴. 전혀 내게 생소한 세계를 보여줬고. 왜냐하면 이훈 감독은 취향도 그랬고, 또 자기 취향에 미국에서 많은 비디오를 많이 사오기도 했고 케이블TV에서 하는 것을 많이 녹화를 해왔어요. 처음 보는 영화들을 많이 접했어요. 그러니까 컬트영화라 할 수 있는 것들이죠. 그래서 눈을 뜬 것 같아요. 그런 좋은 친구들과 잘 논 것, 그것이 역시 친구라는 게 힘들 때 중요한 거고, 그 좋은 사람과 어떻게 잘 노느냐가 참 인생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 같아요.

아, 그 다음에 2005년에 한국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 허허, 그런 생각을 참 안해보는데. 제 영화를 보면 시대라는 것이… 물론 크게 봐서 몇년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잖아요. 점점 그렇게 돼가는 것 같아요. 그때그때의 사회적 이슈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얘기로 가는 것 같아요. 그게 뭐 좋은지 나쁜지는 말할 수 없고. 그것이 심각해지면 아주 개인적 이야기로 가버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계속해서 도덕의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도덕적 딜레마를 다루고 있으니까, 그것이 사회와 완전히 유리된 개인 내면의 얘기로, 그렇게만 빠져들진 않으리라고 생각해요. 도덕은 항상 사회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으니까. 그래서 지금의 한국사회, 지금의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인간 삶의 도덕적인 여러 측면에 대해서, 살면서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여러가지 크고 작은 죄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한국사회가 점점 더, 또 한국만 그런 게 아니라 어느 나라든지 도덕적으로 점점 더 타락하고 있으니까 그것은 언제나 유효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관객5 | 아까 감독님께서 영화를 만드는데 영향받은 감독이라든지, 셰익스피어나 소포클레스를 언급하셨는데, 그런 학습적인 것 말고요. 감독님이 자라온 과정에서 주변 환경으로나 아니면 주변 사람에 의해서 정신적 충격이라든지 감명을 받는다는가 해서 자기도 모르게 자연 몸에 체득되거나 해서 영화를 만들 때마다 드러나지는 그런 부분이 있는지.

박찬욱 | 그게 주로 이탈리아나 프랑스가면 많이 받는 질문인데,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했다는 정보를 알고 그 영향을 많이 질문들을 해요. 게다가 대학도 가톨릭계 대학을 나왔고. 거기에 대해서는 뭐 약간, 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어려서부터 가톨릭 집안이었고. 그런데 유럽인들이 이해 못하는 게 한국 가톨릭은 유럽에 비하면 좀 더 진보적이잖아요.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거칠 때. 그리고 가톨릭 하면 떠올리는 억압적인 분위기, 막 원죄와 지옥에서의 형벌을 강조하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기 때문에 유럽인들이 제 영화를 보면서 바로 연결시키는 그런 가톨릭의 이미지와는 좀 다른 것 같아요.

그러나 어쨌든 같은 종교니까 그런 죄의식의 문제라든가 또는 워낙 개신교에 비하면 가톨릭은 뭔가 아이콘도 많고 뭐 비주얼적으로 풍성한 것이 있잖아요. 쉽게 말하자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라든가 십자가도 그냥 십자가가 아니라 거기에 달린 예수의 몸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거나. 그 예수의 몸이라는 것은 굉장히 끔찍한 장면이잖아요.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서 그렇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마어마하게 잔인한 형벌인데, 그 모습을 아주 그대로 묘사하고 있잖아요. 어렸을 때 성당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는 것은 그렇게 그로테스클한 이미지 속에서 살았다는 것과 같은 뜻이죠. 그밖에 많은 순교화들, 순교 성인들의 일화… 제가 희랍비극이나 셰익스피어에 대해 언급할 때 떠오르는 것이, 또 호머의 서사시, <일리어드>나 그런 것을 떠올릴 때 아주 잔인한 묘사들이 많다는 점을 들 수 있어요. 실제로 폭력묘사가 굉장히 강해요. 우리가 고전이라고 하고, 우아하고 고상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막상 트로이 전쟁을 묘사한다거나 전투장면을 묘사할 때는 아주 잔인한 묘사가 많아요. 그런 것처럼 가톨릭의 순교 성인들의 역사도 엄청나게 끔찍한 게 많죠. 수많은 잔인한 형벌들과 고문, 그런 것을 듣고 살았으니 영향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것이 계속 지속되지는 않았고 어느정도 철 이 들었을 때는 더 이상 성당에 가지 않게 됐고. 충격을 준 사건이란 게 있긴 있어요. 제가 고등학교 올라갈 때, 중학교 3학년이죠, 그때 우리 동네 성당의 신부님이 아버지를 찾아와서 쟤를 신학교로 보내라고. (웃음) 신부 시키라고. 자기가 보기에는 추기경 감이라고. (웃음) 그러면 독신으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때부터 성당에 안 가기 시작했어요. (폭소) 그게 큰 충격이었죠. 그리고 예술적인 면에서는 어머니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제 영화에 약간 냉소적인 분위기가 있잖아요. 그런 시니컬한 면이 어머니를 닮은 거라고들 집안에서는 얘기해요. 그리고 아버지는 그렇진 않았는데 예술 애호가세요. 그래서 그런 분위기를 많이 만들어준 것 같고. 그리고는 아까 말씀드린 이훈 감독과 그때 어울렸던 친구들이 있고. 뭐 그 정도인 것 같은데요.

관객6 | 감독님의 엄청 팬이라서 이런 자리에 오면 항상 질문을 하는데, 궁금한 것은 감독님 한국에서만 만들고 계시지만 제가 외국영화 사이트에서 가보면 거의 추앙받고 칭송받는 수준에 이르신 것 같고. 제가 최근에 얘기 듣기로는 정정훈 감독은 해외 유수의 프로젝트에 참가하기로 결정됐다고 들었고.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만 전해 들었습니다. 감독님께서는 굳이 미국에 나가서 영화를 할 필요가 있냐는 답변을 하시면서 해외에서의 러브콜을 거절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처음에는 영어가 안되셔서 그런가 생각을 했는데 (웃음) 외국에서 DVD 많이 사셔서 보신다는 걸 보면 영어문제는 아닌 것 같고, 뭐 감독님의 작품을 사랑하는 팬 입장에서나 외국의 팬 입장에서나 감독님이 좀 더 자본의 여유가 있고 상상력의 제한이 없는 미국에서 보다 하시고 싶은 일을 하기는 게 세계 영화계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생각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고요. 최근에 샘 레이미가 <이블 데드> 리메이크 를 제의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재미있는 프로젝트인데 왜 거절하셨는지. 해외에서의 러브콜이 어떤 것이 있는지 종합적으로 궁금합니다.

박찬욱 | 이번에 <올드보이> 개봉 때문에 이탈리아에 갔었는데, 밀라노에서 만난 어떤 기자의 첫 질문이 왜 <이블데드> 리메이크를 거절했냐는 것이었어요. 나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것은 정말 비밀이었거든요. (웃음) 그래서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했더니 그 사람이 오히려 깜짝 놀라면서, 아니 IMDB에 다 나와요,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출력한 것을 보여주는데 진짜 거기 써 있더더라니까. 그게 샘 레이미가 어떤 대리인을 보내서 <이블 데드>의 몇 주년 기념판 DVD를 주면서 리메이크해달라고, 리메이크를 하겠다는, 판권을 달라는 요구가 수없이 많았지만 안 하고 있다가 이것을 제의하는 거라고 하면서. 그래서 꼭 만나고 싶다고 제의가 왔어요. 왜 거절했냐 하면 그때 일본 감독들이 미국에서 공포영화들로 진출하잖아요. 또 <디 아이> 만든 감독들도 그렇고, 하여간 아시아 감독들이 할리우드로 갈 때, 공포영화로 시작을 하는 게 유행처럼 돼 있었기 때문에 그런 데 휩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고. 그리고 <이블데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그런 식으로 조잡하게 만든 것이 좋았어요. 많은 돈을 들여서 그렇게 하는 것은 망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가 그 영화를 맡아서 내 예상을 뛰어넘어서 걸작을 만든다면 정말 축하할 일이겠지만, 하여간 내 능력으로는 안될 것 같았고. 그쪽에서는 내가 안 한다면 다른 감독을 섭외해야 하기 때문에 소문 나지 않게 해달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해서 나는 아무에게도 얘기 안하고 있었는데 그게 미국 쪽에서 소문이 나서 IMDB까지 올라가게 됐어요.

그리고 제안들이 뭐 많이 오는데 다들 비밀로 해달라고 그러니까 뭐라고 말할 수는 없고. 그렇게 아주 썩 매력적인 것은 아직까지 없었어요. 아, 그리고 영어문제는 정말 심각해요. (웃음) DVD를 살 때 영어자막이 없으면 안 사요. 자막을 읽을 줄은 아는데 대화를 할 수준은 못 되고. 할리우드 사람들도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는지. 내가 영어를 못 하는 것을 알면서. 그런데 그들도 처음에는 그게 문제가 될 수 있겠다, 좀 배우면 되지 않겠냐, 이렇게 나오다가 요즘은 전혀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일본감독들이 박스오피스에서 너무나 큰 성공을 거두고 있으니까 자기들도 이제는 걱정 안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나는 걱정이 돼요. 왜냐하면 오우삼 감독처럼 액션영화로 시작한다거나, 별 대사가 중요치 않은 호러영화들, <링> 같은. 물론 영어를 모르는 감독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는 그런 영화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 장애가 될 것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더불어 아직 좋은 각본을 못 읽어봤다는 것. 그러니까 나는 좋은 프로듀서가 생기고 그러면 근본적으로 못할 것은 없다라고 생각하지만, 뭐 내가 급할 것은 없다, 안해도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아주 뛰어난 SF영화라든가 웨스턴이라든가 제임스 엘로이 풍의 필름 누아르라든가, 그런 정도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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