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테리 길리엄의 <그림형제: 마르바덴 숲의 저주> [2]
2005-11-21
글 : 오정연

와인스타인 형제 vs 테리 길리엄, 승리는?

현실과 맞서는 판타지, 환상을 굳게 믿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면, 이것은 누가 봐도 테리 길리엄의 프로젝트다. 그러나 맷 데이먼과 히스 레저, 모니카 벨루치를 아우르는 캐스팅에 판타지 액션 모험이라는 대중적인 장르로 포장된 <그림형제>는 누구나 확신하는 기대작이 아니었다. 1975년 애니메이션 <몬티 파이손과 성배>로 데뷔한 이래 30년 동안 열편의 영화를 만든 테리 길리엄의 신중한 작업 편수를 고려하더라도, 그의 마지막 영화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 이후 7년이란 공백기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2000년 가을. 길리엄이 10년을 준비했고 죠니 뎁까지 끌어들인 필생의 역작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가 세트장을 물바다로 만든 폭우와 스탭간의 불화, 주연배우인 장 로수포르의 건강 악화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재앙을 차례로 겪으며 좌초됐다. 테리 길리엄은, “언제나 나의 첫번째 선택”이라 부르며 아낌없는 애정을 과시하는 죠니 뎁과 함께 약속한다. 각자 “돈 되는 영화를 만들어” 못다 이룬 돈키호테의 꿈을 완성시키겠다고. 죠니 뎁은 <캐리비언의 해적들>을 비롯한 화제작으로 약속을 지켜나갔다. 길리엄은 2002년에 네 편의 영화가 다양한 이유로 ‘엎어진’ 끝에, <그림형제>를 만났다. 문제는 그의 악운이 거기서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애초 MGM에서 시작된 프로젝트, <그림형제>는 프라하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시작한 이후, 미라맥스의 자회사인 디멘젼 필름으로 둥지를 옮겼다. 미라맥스와 디멘젼필름을 설립한 와인스타인은 감독과 사사건건 대립하며 참견하기로 악명높은 제작·배급자요, <브라질>의 편집권을 놓고 유니버설과 싸우다가 끝내 감독판을 따로 개봉한 테리 길리엄은 할리우드의 못말리는 괴짜 감독. 둘의 대립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와인스타인은 그림 형제를 도와 숲의 저주를 푸는 데 앞장서는 씩씩한 여주인공 안젤리카로 사만다 모튼을 캐스팅해야 한다고 우겼고,(결국 안젤리카 역은 리나 헤디에게 돌아갔다) 촬영 중간에는 길리엄과 <라스베가스의 혐오와 공포>에서 함께 작업했던 촬영감독 니콜라 페코리니 자리에 다른 이를 앉혔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된 이후에는, 주연배우들의 분장이 문제였다. 맷 데이먼과 히스 레저가 무비스타처럼 보이는 걸 원치 않았던 길리엄은, 레저에게는 덥수룩한 턱수염을 기르도록 했고, 데이먼에게는 우스꽝스러운 인조코를 붙여줬다.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는 주연배우의 모습을 원치 않았던 밥 와인스타인에게, “윌은 엉뚱한 동생 제이콥을 지키기 위해 험한 상황을 많이 겪은 인물. 그래서 코가 그렇게 부러진 것처럼 변한 것이다”라는 길리엄의 설명은 뒷전이었다. 맷 데이먼이 직접 감독편을 들어주었지만, “어쨋든 돈을 내는 건 우리들이다. 그 지랄맞은 코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면 3백만불의 예산을 더 책정해주겠다”는 제작자의 협박이자 회유 끝에, 결국 윌의 코는 애초보다는 다소 무난한 수준으로 자리잡았다.(이 인조코는 이후 영화 포스터 촬영 때까지 문제가 됐던 부분이다) 길리엄이 “일반적으로 나의 싸움은 영화를 끝낸 뒤 편집실에서 시작되곤 했는데, 이건 정말 심각하게 안 좋은 시작이었다”며 마할 만큼 어리둥절할 만한 길고도 지난한 싸움은, 영화의 막판 편집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테리 길리엄은 포기와 패배를 모르는 돈키호테다. 그와 함께 작업했던 이들은 “그와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안장 없는 조랑말을 타는 것과 같다” “테리와 함께 있을 땐 아무것도 간단하거나 단순하지 않다”며 혀를 내두른다. 촬영장에서 욕설을 퍼부으며 안달을 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스탭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이 다혈질의 노장은, 결국 “큰 희생 없이” <그림형제>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우디 알렌은 영화를 찍다가 배우를 바꿔도 아무도 뭐라 않으면서, 왜 유독 이 영화만 엄청난 재앙이라도 겪은 양 난린지 모르겠다. 영화를 만들 때 갈등이야 언제나 존재하는 것 아닌가” 그는 스튜디오와 <그림형제>의 최종편집을 놓고 진행되던 지리한 분쟁을 잠시 중단할 무렵, 상상속의 친구를 따라 마약중독자 아버지로부터 도망쳐나온 어린 소녀의 기괴한 모험담을 다룬 영화 <타이드랜드>를 촬영할 정도로 실속을 챙겼다. 이 영화는 베니스영화제와 맞물려 열린 올해 토론토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됐다. 결과적인 상황과 베니스에서 길리엄이 보여준 변함없이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종합했을 때, 그와 스튜디오의 싸움이 <그림형제>를 망쳐놓았다거나, 길리엄이 자신의 영화를 포기했다는 일부 언론들의 우려는, 별다른 근거가 없어 보인다.

아날로그에서 CG의 세계로 건너가다

<그림형제: 마르바덴 숲의 전설> 촬영현장

지난 8월말 <그림형제>가 미국에서 개봉됐을 당시, 평론가들 중 상당수는 빈약한 플롯과 불안정한 캐릭터를 이유로 영화를 비판했다. 그러나 <브라질>을 제외한 테리 길리엄의 영화가 언제고 대다수 평론가들의 지지를 이끌어낸 적이 있었던가. 과장과 극단의 비주얼을 스타일로 밀어붙이는 길리엄의 세계는, 동의하고 열광하지 않는 관객에게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주술이다. 그러므로 테리 길리엄의 진정한 팬이라면, 영화의 내용과 조우하는 비주얼을 먼저 궁금해할 것이다. 눈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를 정도의 디테일이 거의 잡다한 경지에까지 이르곤 했던 그 영상은 <그림형제>에서도 여전하다. 맷 데이먼은, “테리 길리엄은 인물이 프레임에 크게 잡히는 샷에서 대부분 25mm, 어떨 때는 14mm에서 20mm 사이의 렌즈를 사용한다. 그러니 항상 수십 가지의 요소들이 한 프레임에서 한꺼번에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다. 거위들이 마당을 떼지어 다니고, 배우들은 프레임의 전경과 후경에서 각자의 대사를 하고, 굴뚝 위에서는 연기가 나오고……”라며 70번째 테이크까지 갔었다는 끔찍한 소문의 배경을 설명한다. 테리 길리엄은 몇 마디 대사나 연속된 상황보다는 한번에 보여지는 공간으로 더 많은 정보가 전달될 수 있다고 믿는 감독이다. 그저 공간과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관료주의의 극단을 치닫는 미래 사회의 풍경을 제시했던 <브라질>, 마약중독자의 눈에 비친 예사롭지 않은 세상을 그대로 재연한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 19세기의 평범한 삶과 그 안에 숨어 있는 동화적 세계를 동시에 표현해야 하는 <그림형제>에서 길리엄이 광각렌즈에 비친 화면을 선호했던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비주얼과 관련해서 테리 길리엄이 느꼈을 가장 큰 문제는,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처럼 이미 보여졌거나 앞으로 공개될 장르로서의 판타지영화와 어떻게 차별화될 것인지가 아니었을까. 어마어마한 규모와 진짜같은 CG보다는, 꿈과 환상 그 자체에 매혹되어왔던 테리 길리엄은 “그림동화는 세계에서 가장 큰 건물이나 가장 큰 괴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좀 더 작고 덜 영웅적인 인물, 좀 더 규모가 작은 숲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타임 밴디트> <브라질> <12 몽키스> 같은 영화에서 아날로그적이고 수공업이며, 더 영화적인 방식으로 특정 시대를 재연했던 길리엄은, 이번 영화를 통해 기괴한 숲을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오히려 숲 전체를 세트로 만들어야 하고, 촉감까지 자극할 만한 디테일의 일부는 CG를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거울 속에서는 절세의 미모를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500년 세월 동안 참혹하게 늙은 거울의 여왕, 여왕의 주술을 완성하기 위해 마을의 아이들을 한명씩 집어삼키는 숲속 괴물 등은 첨단의 기술과 기존의 방식을 고유한 방법으로 혼합시킨 길리엄의 대안이다. 사실적이지만 환상적이고, 금새 부서지는 신기루지만 진짜처럼 생생하다. 우리 모두가 아직도 꿈속에서 맞닥뜨리는 동화 속 세계처럼.

중요한 것은 건강한 상상력이다

빨간 모자 소녀와 헨젤과 그레텔이 괴물에게 납치를 당하고, 라푼젤을 연상시키는 마법의 걸린 여왕이 첨탑 안에서 주술을 풀어줄 누군가의 키스를 기다리는 <그림형제>의 세계.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림 형제 동화의 서늘하고 기괴한 기원이 아니라, 그림 형제 동화를 가능하게 했던 건강한 상상력 혹은 뒤틀린 인간의 욕망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법의 콩’을 포기하지 않는 제이콥은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반복되고 변주되는 이야기의 결말을 기억하는 유일한 어른이다. 어지럽고 혼란한 그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도 살아남아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을 매혹시킨 이야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테리 길리엄은 <그림형제>를 통해 관객들과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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