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서울독립영화제 2005 [3] - 이성강 감독
2005-12-08
글 : 박은영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살결>의 이성강 감독

거친 살갗을 보듬는 내면의 풍경화

시작은 <마리 이야기>가 개봉했던 2002년 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이성강 감독은 그의 첫 장편애니메이션이 대중과의 소통에 실패했다고 생각했고, (훗날 안시영화제 대상 수상으로 재평가되는 반전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몹시 심란하고 암울한 상태에서 ‘뭔가’ 떠오르는 대로 써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당시 그의 복잡한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온 존재가 ‘귀신’이었다. “주변에서 멀쩡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걸 봤다. 이명이 있다든지 환상을 본다든지 하는. 그런 초현실적인 일들이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이 세상에서 우린 귀신과 함께 살아가는 셈이다. 생각해보면, 귀신을 본다는 것은 자기 삶에 결핍이 있고, 그런 마음이 반영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한 남자의 경험으로 수렴하면서, 이성강 감독의 시나리오 <살결>은 틀을 잡아갔다. 옛 애인과 시한부적인 관계를 맺던 남자가 자기 곁을 맴도는 한 소녀의 슬프고 외로운 영혼과 조우한다는 이야기로.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살결>은 ‘살’의 노출과 접촉이 많은 영화다. 제작 초기에 ‘유부녀의 불륜’ 이야기로 알려지면서, 심지어 ‘포르노’라는 오해까지 일면서, 이성강 감독은 “순수하던 분이 왜 갑자기 그런 음탕한 영화를 만드냐”며 뜨악해하는 반응을 적잖이 접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꼬여 있는 것 아닌가. (웃음)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내 나이대 사람들의 경험에서 이야기를 가져오곤 한다. 애니메이션은 대상을 고려해 우화적으로 표현했지만, 실사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살결>을 ‘야한 이야기’로만 단정하는 건 잘못이다. 주인공 남자가 옛 애인과 육체적인 관계에 탐닉하게 되는 일, 그 전후엔 많은 사연이 있다. 남자는 연인은 물론, 일, 가족, 친지, 그 무엇에서도 위안을 얻지 못한다. 언젠가부터 그가 보고 느끼는 소녀의 영혼도, 떠나간 연인과 가족의 굴레, 절망의 늪에 빠진 그 자신의 모습을 빼닮았다. “멀리서 보면 윤기가 흐르는 피부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그냥 거친 살갗일 뿐이다. ‘살결’은 그런 의미에서, ‘내면적 풍경화’라는 뜻을 품고 있다.”

실사영화여야 한다는 고려가 앞섰던 것은 아니다. <살결>을 실사영화로 만들겠다는 건, 이야기에 어울리는 매체를 따른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이성강 감독이 실사 작업에 호기심을 품게 된 것은 <나쁜 영화>에 삽입된 애니메이션 <도둑놈>을 만들면서부터. “촬영하는 걸 몇번 구경했는데, 영화 만드는 게 재밌는 일이구나, 그때 처음 알았다. 같이 어울려 노는 분위기도 그렇고, 압축적으로 일하는 데서 오는 짜릿함도 그렇고. 속기 바둑을 두는 것 같다고 할까.” <나쁜 영화> 때부터 알고 지낸 류진옥 프로듀서와 조용규 촬영감독이 합류하고, 1억원 남짓한 저예산 HD 프로젝트로 합의하면서 촬영에 착수한 것이 지난해 여름. 무더위가 한창이던 7월 말∼8월 말에 촬영했고, 후반작업은 여건이 될 때마다 드문드문 손을 봐서, 올 4월에 마무리했다. HD의 특성상 조명에 많은 공을 들였어야 했는데, 여건상 충분한 조명을 쓰지 못한 것도 안타깝지만, “애니메이션이랑 가장 다른 부분이 배우가 연기를 한다는 점일 텐데, 배우들이 표현할 수 있는 걸 더 찾아주지 못해서, 그게 많이 아쉽다”는 고백이다.

<살결>

사랑을 나누는 연인, 갑작스런 교통사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남자와 거울 속의 여자. 이성강 감독의 팬이라면, <살결>의 몇 장면에서 그의 초기 단편 <연인>을 겹쳐 떠올릴 수도 있겠다. “<연인>은 초기작이라서, 내러티브가 제대로 없었다. 이번 작업에서 그때의 삽화를 생각했고, 일부를 그대로 집어넣었다.” 초기 단편 시절을 연상시키는 것은 이런 모티브만이 아니다. <연인> <덤불 속의 재>에서처럼 극명한 명암 대비와 모노톤의 차분한 색채를 선호하는 그의 취향은 <살결>의 영상에 부활해 있다. 한 작가의 애니메이션과 실사 사이에 어떤 호환이 가능한지를 발견하는 일은 <살결>을 보는 또 다른 재미다. “현실 자체가 판타지라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삶에 근원을 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상상력을 더 펼쳐야 한다면 애니메이션으로, 리얼리티를 살려야 한다면 실사로. 가능하다면, 둘의 접점을 찾아내보고 싶다.” 유난히 숨가빴던 ‘속기 바둑’ 한판을 마친 이성강 감독은 이제 또 다른 ‘대국’을 치르러 간다. 열살배기 소녀 구미호의 우정과 모험을 그린 장편 애니메이션 <천년여우: 여우비>를 내년 여름께 선보일 참이라는 반가운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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