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상식과 베스트 목록 작성의 계절이 다가오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낯선 영화들이 외신을 점령하고 있다. 이들 중 몇몇은 국내영화제를 통해 조용히 소개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직접 보기 힘든 영화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사이드웨이>가 그랬듯 느닷없는 희소식이 들려올 수도 있고,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처럼 제작된 지 몇년이 지나고 나서 갑자기 개봉하는 영화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니 <씨네21> 통신원들과 필자들이 선정한 이 영화들은 유효기간 없는 장바구니와도 같을지 모르겠다. 기억하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챙겨볼 수 있도록. 이중에는 <그리즐리 맨>의 베르너 헤어초크와 같은 거장도 있지만,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스리랑카 감독 비묵티 자야순다라 같은 낯선 이도 섞여 있고, 예술보다는 대중문화의 전통을 흡수한 <로드 오브 독타운> <디센트> 같은 영화들도 있다. 세계 각국에서 끌어모은 제멋대로 리스트다.
<그리즐리 맨>은 한국에서 소개되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이유일 수도 있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도, 작품의 내용이 야생 곰들과 함께 생활하던 남자가 무리 중 한 마리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실화를 전제로 한 것도 하나의 이유일 수 있다. 더 큰 이유는 작품이 개봉된 지난해 여름 시즌 같은 동물을 소재로 했지만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펭귄: 위대한 모험>에 밀려 큰 빛을 보지 못한 것. 극장 앞 관객의 모습이 상상된다. “음, 곰한테 물려 죽은 남자 이야기 아니면 귀여운 팽귄 이야기?” <펭귄…>은 7743만여달러의 수익을 올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콜롬바인>을 제치고 <화씨 9/11>에 이어 다큐멘터리 올타임 랭킹 2위를 차지했고, <그리즐리 맨>은 317만여달러의 수익을 열려 올타임 랭크 2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리즐리 맨>은 평론 전문 웹사이트인 ‘라튼토마토닷컴’에서 93%의 신선도를 받았고, 영화 데이터 사이트 IMDb에서는 팬들로부터 8.2/10라는 높은 평점을 받는 등 관객으로부터 열정적인 지지(?)를 받았다. 뉴욕과 LA평론가협회 등 대부분의 평론가 어워드에서도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즐리 맨>을 우리가 놓친 외화에 꼽는 이유는 감독 때문도 아니고, 평론가의 호평 때문도 아니다. 물론 처음 관람을 결심하게 된 것이 평소에 철석같이 믿는(?) 몇몇 평론가들의 극찬에 있기도 했지만, 관람 뒤 작품뿐만이 아니라 한동안 잊고 살았던 많은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점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티모시 트레드웰은 알래스카의 캐트마이 국립공원 보호지역에서 2003년까지 13년간 북미산 회색곰과 함께 여름 시즌을 보냈고, 마지막 5년간은 100여 시간 분량의 활동 사항을 비디오 카메라에 녹화했다. 이 자료화면은 트레드웰의 생존 당시 수천명의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교육 자료로 이용됐고, 이후 곰과의 생활이 알려져 <데이비드 레터맨 쇼> 등에 출연하는 등 일종의 유명인사가 됐다. 하지만 2003년 항공사 직원과의 말다툼으로 9월 말 철수 일정을 미뤘던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곰들은 이미 동면에 들어간 10월 초가을에 여자친구 에이미 후겐하드와 함께한 배고픈 늙은 곰에게 죽임을 당했다.
자료화면을 통해 언뜻 보기에도 트레드웰은 금발의 쇼맨십이 강한 40대 미남형으로, 야생동물 보호를 실천하는 열정적인 운동가로 보인다. 동물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고, 이들을 보호하려는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좀더 자세히 보면 그의 내면적인 갈등은 물론 정신 불안정, 과대망상의 요소도 함께 볼 수 있다. 트레드웰은 자신을 회색곰 중 하나라고 생각할 때도 있고, 자신만이 인간세계의 위험으로부터 곰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헤어초크 감독은 트레드웰의 가족이나 친구, 전문가 등과의 인터뷰를 통해 상반되는 의견을 제시한다. 캐트마이 국립공원은 20년간 밀렵꾼들의 흔적이 없는 안전한 곳이고, 트레드웰의 곰들과의 생활은 곰들을 보호하기보다 곰들이 인간에게 익숙해져 위험해질 가능성을 높였다는 것이 일부의 의견이다. 친구와 가족들에 따르면 자신을 호주 출신 고아라고 주장했던 것과 달리 트레드웰은 뉴욕 롱아일랜드 중산층에서 자랐고, 알코올 중독과 등 부상으로 수영선수로 얻은 장학금을 포기한 뒤 캘리포니아로 이주, 배우가 되려다 실패한 알코올과 마약 중독자였다. 마약 과다복용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 ‘그리즐리 맨’이라는 페르소나로 자신을 재탄생시킨 것. 일부는 “야생동물에 무엇을 바라는가, 트레드웰이 지금까지 살아남았던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며 “안타까운 것은 트레드웰이 죽을 때 여자친구까지 함께 끌고 간 것”이라는 등 잔인하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의견들도 나온다.
하지만 이 작품은 트레드웰의 삶을 조소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헤어초크는 자료화면과 인터뷰 등을 통해 단편적이 아닌 입체적인 모습으로 주인공을 보여준다. 그 자체 또는 그의 행동에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자연에 대한 사랑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일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인생을 사랑했고,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것이다. 트레드웰의 친구들은 그가 해마다 여름 곰과의 생활을 위해 떠나기 전 했던 말을 기억한다. “만약에 이번 여정에서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슬퍼하지마. 내가 원한 길이었으니까.” 평원에서 곰들이 뛰어노는 것을 보며, 10여년 동안 애완견처럼 그를 따라다니는 여우를 보며 행복감에 북받쳐 울던 트레드웰의 모습은 어리석게 보이기보다는 작은 것에 행복할 수 있는 그에게 부러움을 느끼게 했다.
한편 최근 DVD로 출시된 이 작품은 극장에서 상영된 버전과 다르게 출시돼 약간의 물의를 일으키고 있기다. DVD에서는 트레드웰이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출연한 장면이 삭제됐다. 삭제 부분은 레터맨이 트레드웰에게 “언젠가 당신이 곰에게 잡아먹혔다는 기사를 보게 되는 거 아니냐”며 농담을 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