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머영화사의 유전자는 여전히 브리튼 섬사람들의 핏줄 속에 남아 있는 모양이다. 대니 보일의 <28일후…>(2002)와 닐 마셜의 <독 솔져>(2002), 런던 지하철을 무대로 한 크리스토퍼 스미스의 <크립>(2004)과 워킹 타이틀의 패러디 좀비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까지, 미국 호러영화계가 PG-13등급의 안온한 취향에 화답하며 오래된 걸작들의 리메이크에 전념하는 동안 영국인들은 창의적인 호러영화들을 생산해왔다. 그런 가운데 지난 2005년 영국의 여름을 비명소리로 도배한 <디센트>는 중흥기를 맞이한 영국 호러영화계가 어떤 정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플롯은 군살없이 날씬하다. 존 부어맨의 불쾌한 호러영화 <서바이벌 게임>처럼 막을 올리는 <디센트>는 스코틀랜드에서 래프팅을 즐기는 한 무리의 여자친구들을 비춘다. 그들은 행복하고, 대담하고, 모험을 즐기는 여자들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주인공 사라의 남편과 딸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그로부터 1년 뒤, 사라를 위로하기 위해 모인 여자친구들은 광활한 애팔래치아 산맥의 동굴 탐험에 나선다. 이제 본격적인 비명의 롤러코스터가 시작된다. 먼저, 좁다란 동굴의 입구가 무너져내린다. 여자들은 미로처럼 얽혀 있는 동굴을 헤쳐나가 또 다른 입구를 찾아야만 한다. 물론 그들은 혼자가 아니다. 수만년 동안 동굴 속에서 진화해온 인간형 포식자들이 신선한 날고기 사냥에 나선 것이다.
이를테면 <디센트>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호러영화(무서운 영화)다. “당연히 18금 호러영화만 만든다”는 닐 마셜은 관객을 좌석 아래로 끄집어내 끊임없이 하강(Descent)시키는 데 전념한다. 그래서 준엄하기로 소문난 영국 평론가들의 반응이 IMDb에 몰려든 장르팬들의 호들갑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모든 폐소공포증 환자들은 이 영화를 보지 말라는 엄마들의 충고를 듣는 게 좋을 것이다.”(<가디언>의 피터 브래드쇼) “놀라서 좌석에서 뛰어올랐고, 질렸고,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영화 보는 내내 나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옵저버>의 마크 게모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한쪽 손을 귀에다 대고 다른 손은 눈앞에 대고 있었다.”(<타임스>의 제임스 크리스토퍼)
특별한 CG도 없이 영국 파인우드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진 <디센트>는 닐 마셜의 데뷔작인 <독 솔져>를 쏙 빼닮았다. 저예산의 화면을 고어와 코미디로 버무린 <독 솔져>에서는 일단의 군인들이 늑대인간들에 의해 오두막에 갇혀 사투를 벌인다. 하지만 <디센트>에서는 B급 영화적 유머는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직설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오멘> <샤이닝> <엑소시스트> <죠스>.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은 스스로를 심각하게 믿고 앞으로만 달려가는 데 거리낌이 없다.” 감독의 말처럼 <디센트>의 힘은 시종일관 장르의 법칙 속에서 정공법으로 밀어붙이는 데서 나온다. 더욱 음미할 만한 것은 <디센트>가 관객과 벌이는 심리적 줄다리기다. (60억원이라는 저렴한 제작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닐 마셜은 주인공들의 몸에 지닌 조명만으로 영화를 전개하며 폐소공포증을 유발하고, 여자들의 우정이 생존 본능과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무너져내리는 과정을 매정하게 묘사한다. 이 점에 주목한 <버라이어티>의 데릭 엘리는 <디센트>를 “아시아 모델에 가장 가까운 형이상학적 호러”라고 정의하며 “여성간의 라이벌 의식과 긴장의 미묘한 초상을 통해 적어도 서구 장르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특별한 느낌을 자아낸다”는 찬탄을 보냈다.
최근 열린 제8회 영국 인디영화제는 <콘스탄트 가드너>의 페르난도 메일레스, <미세스 헨더슨 프레젠츠>의 스티븐 프리어즈, <콕 앤드 불 스토리>의 마이클 윈터보텀을 젖히고 닐 마셜에게 최우수 감독상을 안겼다. 이것은 영국이 자생적인 장르영화의 성공을 자축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한편, 배급사인 파테(Pathe)는 영국 개봉 8개월 뒤 미국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28일후…>의 전례에 따라 올여름경 <디센트>를 미국시장에 배급하기 위해 저울질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닐 마셜은 “미국에 진출한다면 결국 <무서운 영화5>나 만들게 될 것”이라며 계속해서 영국에 머무를 것임을 단언한 상태다. <독 솔져>와 <디센트>에서 거대한 자연과 이방인에 대한 섬나라의 본능적 공포를 읽어낸 사람들이라면, 그 공포가 얼마나 섬칫한 결과로 스크린에 펼쳐지는지 확인한 사람이라면, 닐 마셜이 신경증적인 브리튼 섬에 머물러 주기를 은근히 바라 마지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