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5년 우리가 놓친 외화 10 [10] - <크래쉬>
2006-01-17
글 : 옥혜령 (LA 통신원)

폴 해기스 감독의 <크래쉬>는 이른바 ‘날이 선’ 영화다. 등장인물만도 계층과 피부색이 다른 미국인이 한 다스. 이들이 로스앤젤레스 곳곳에서 본의 아니게 얽히고 설키면서 마음속에 숨은 증오와 두려움을 한바탕 드러내고야 마는 소동극이니 오죽하랴. 이들의 감정적 충돌이 얼마나 날이 섰는가 하면, 비평가들은 <크래쉬>를 미국영화 역사상 가장 터프한 대사들로 가득한 영화로 꼽길 주저하지 않는다. 상당히 미국적인 이 터프함의 실체는 현대 미국사회의 금기 중 하나라 할 만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인종 비하 발언들이다. ‘인종’ 문제야말로 숨기고 싶으나 숨길 수 없는 미국사회의 비수 아닌가.

지난해 5월, <크래쉬>가 개봉했을 때는 <그랜드 캐년> <숏컷> <매그놀리아>의 맥을 잇는 복합 인종 도시 로스앤젤레스에 대한 또 한편의 영화라고 생각했다. 브랜트우드, 사우스캠튼(사우스햄프턴??), 다운타운, 샌타모니카, 차이나타운 등 지명만 들어도 그곳에 사는 사람의 계급과 피부색이 감이 잡히는 섬들로 연결된 로스앤젤레스의 삶의 한 단면을 하룻밤의 소동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촌철살인의 시선에 눈이 갔다. 그런데 ‘크래쉬’는 로스앤젤레스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오랫동안 텔레비전 극작가로 활동했던 캐나다 출신의 폴 해기스 감독은 이 영화가 인종 문제라기보다는 9·11 사태 이후 ‘타자와의 접촉’에 대해 신경증과 불신의 골이 깊어진 미국사회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종’이야말로 미국인의 정체성을 그 시작부터 정의해온 핵심적인 척도였음을 고려할 때, <크래쉬>의 파열음은 9·11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어디 미국뿐이랴. 카트리나 홍수나 프랑스의 인종 소요 사태, 호주의 인종 충돌 사태를 거치면서, 나와는 다른 ‘타자의 존재’와 ‘더불어 살기’가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신경증의 무게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크래쉬>는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이 증오와 두려움, 신경증의 실체를 직시할 것을 시의적절하게 요청한다. <뉴욕타임스>가 지적하듯, <크래쉬>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몬스터 볼> <모래와 안개의 집> <21그램> 등에서 나타난 최근 미국영화의 어떤 경향, ‘(인종·계급적으로) 서로 다른 미국인 사이의 관계’라는 주제의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지만 강요하는 생생한 대사들이 전달하는 사실성에도 불구하고 <크래쉬>는 휴머니즘으로 무장한 사실주의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크래쉬>는 인종별로 스테레오 타입으로 구성된 등장인물과 <매그놀리아>식의 얽힌 내러티브 구조를 통해 인물들이 충돌하는 매 순간의 예측불허의 반응을 관찰하는 일종의 실험보고서의 형식을 띤다. 입으로는 진보주의자든 인종차별주의자든 막상 상황에 부딪혀서 어김없이 자신도 모르게 ‘정치적 올바름’의 가면 밑에 숨겨진 두려움과 현실과 타협하고 마는, 그래서 미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우리 같은 인간들의 캐리커처.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도 지적하듯, 로스앤젤레스의 하루라는 시공간 속에,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전형적인 인종 갈등의, 예측불가능한 양태를 극적으로 집약한 이 우화의 구조가 영화의 매력이라고 하겠다. 골든 글로브(최우수 남우조연상과 시나리오상 후보), 전미 비평가협회(테렌스 호워드 조연상, 최고 캐스팅상) 등은 맷 딜런, 샌드라 불럭, 라이언 필립, 돈 치들, 로렌스 호워드 등 독립영화에는 좀 넘친다 싶은 배우들의 호연과 탄탄한 시나리오의 힘에 점수를 줬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로스앤젤레스와 쌍벽을 이루는 다인종 도시 뉴욕의 비평가들과 로스앤젤레스의 비평가들의 견해가 대체로 상반된다는 것. <뉴욕타임스>와 <빌리지 보이스> 등의 비평가들은 <크래쉬>의 전형적인 인물 묘사, 도식적인 이야기 구조를 비판하는 반면, 인종별 안전지대에 모여사는 로스앤젤레스의 비평가들은 전형성이 가진 현실성에 좀더 공감한다. <크래쉬>는 미국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종들의 스테레오 타입 전시장처럼 보인다. 그 스테레오 타입이 어떻게 까발려지고 뒤틀리고, 스크린 너머로 그 상처를 전달하는지 주목하라. 주위를 둘러보면, 오늘도 ‘정치적 올바름’의 가면 아래 비수를 숨긴 스테레오 타입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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