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로이드 작동법> <사랑니> <좋지 아니한가>의 정유미
눈꺼풀의 떨림으로 청춘의 불가사의를 말했다. 그녀는 다만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빌리러 왔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육중한 플라스틱 외관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옆가늠만으로 남자의 목덜미를 쳐다봤고, 그 미세한 움직임만으로도 떨리고 긴장되고 서럽고 슬프고 답답하고 애틋한 마음이 진동했다. 그 순간, 김종관의 <폴라로이드 작동법>은 극영화를 넘어 다큐멘터리의 영역으로 스며들었다. 그건 진짜였다.
정유미의 얼굴은 동세대의 젊은 여배우들처럼 능수능란한 아프로디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니, 대부분의 경우 그녀는 카메라를 불편해하거나 카메라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한다. 기백만원짜리 협찬품을 입혀놓은 패션지의 화보에서도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얼굴로 입술 한쪽을 삐뚜름하게 치켜올리거나 하관이 커 보이도록 입을 다물고 만다. 화보와 CF용 배우로서는 실격이다. 이런 얼굴을 어디서 또 본 적이 있던가. 아마도 우리는 정유미의 표정과 비슷한 무언가를 배두나로부터 본 적이 있음에 틀림없다. <고양이를 부탁해>와 <플란다스의 개>에서 배두나는 커다란 눈을 끔뻑이는 것만으로 열여섯 반 정도의 감정을 스크린에 담아내는 배우였다. 하지만 정유미는 다르다. 배두나는 다른 은하계로부터 도착한 길 잃은 생물처럼 지레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을 직접 통제할 줄 아는 데 반해 정유미의 문제는, 정말이지 통제 불능의 백지라는 것이다.
정유미는 지나칠 정도로 비어 있는 탓에 감독들로부터 탄식을 내놓게 만드는 배우다. “정형화되거나 정의하기 힘든, 나 역시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느낌 같은 것이 있다”며 그녀를 선택했던 정윤철 감독은 후발주자의 이득을 취한 재주꾼이다. 선발주자였던 정지우 감독은 그보다 훨씬 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게다. 그러나 “마음대로 움직여 포커스 맞추기도 너무 힘들다. 들고 찍는 것이 그 사람을 찍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라는 정지우의 말은 불평이 아니다. 통제 불능의 매력을 지닌 배우는 섬세하고 여린 감독의 심장을 무너지게 만든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섬세하고 여린 감독들의 심장은 통제 불능의 청춘에게 자연스레 삼켜지게 마련이다.
야속하게도 청춘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언젠가 매니지먼트사를 제발로 걸어나와버렸던 정유미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거대한 매니지먼트사에 소속되어 있다. 그녀가 드라마 <케세라세라>에 출연하게 된 연유에는 분명 매니지먼트사의 요구와 설득이 있었을 것이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자신을 팔아서 벌어먹어야 하는 상업배우다. 언제까지나 사려 깊은 청년 작가들의 품에 머무르며 빈 캔버스 노릇을 할 수는 없다. 못내 비명을 지르고 싶은 팬들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싸움에 몰두하는 도시남녀의 통속극에서 정유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정유미는 통속극의 정형화된 여우로 몰락하는 대신 통속적인 캐릭터를 정유미의 차원으로 슬그머니 데려가버렸다. 그건 ‘될 대로 돼라’(케세라세라)가 아니라 ‘어떻게 되든지 간에’(케세라세라)라는 청춘의 집념이었다.
자본의 섭리와 이어질 통속극을 넘어서, 그러니까, 지금보다 세상의 이치를 더 알게 된 뒤에도 정유미의 매력적인 이물감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모두 다 헛된 걱정이다. 원래 청춘은 오래 살아남지 못하는 법이다. 그건 청춘의 영원한 속성이니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 그만이다. 이 불가사의한 소녀는 지금 우리에게 청춘의 통제할 수 없는 불가사의함을 불가사의한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