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 청춘영화의 계보학] <개와 늑대의 시간>의 이준기
2007-09-20
글 : 정재혁
사진 : 오계옥
남성성을 버린 스위트 보이

<왕의 남자> <플라이 대디> <개와 늑대의 시간>의 이준기

이준기의 부상은 급작스러웠다. 2005년 12월 영화 <왕의 남자>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그는 2006년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랐다. 가늘고 길게 찢어진 눈과 날카롭게 떨어지는 턱선, 양쪽 볼을 가파르게 가르는 높고 섬세한 콧날. 여기에 화장과 여장이 추가되면서 그는 지금까지 없었던 스타의 도상이 되었다. 왕과 광대 사이에 선 남자 공길은 지금껏 한국 대중문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환영받은 동성애자다. 여성은 광대놀이를 빌려 남성 옆에 앉았고 남성은 시대의 슬픔을 가면으로 여성의 미소를 지었다. 여기엔 혼합된 성적 이미지가 없다. 공길은 정확히 남성과 여성의 경계, 그 위에 위치해 있다. 공길에겐 그간 동성애자에 대한 문화적 텍스트들이 보여줬던 훼손된 남성성, 오염된 여성성이 없다. 이는 곧 대중에 대한 공길의 보호막이었지만, 커밍아웃을 하려는 배우 이준기에겐 아슬아슬한 가면이었다.

<개와 늑대의 시간>
<화려한 휴가>

실제로 공길 이후 이준기는 헤맸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이미지는 공중을 배회하는 부표처럼 어디에도 정착되지 못했다. <왕의 남자> 상영과 비슷한 시기에 방영됐던 <마이 걸>의 바람둥이 서정우는 “동시에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이준기 본인의 욕심을 채우지 못하고 그냥 잊혀졌다. 당시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서정우란 캐릭터는 거의 대중에게 무시된 느낌이다. 이준기의 팬들 사이에선 ‘남자 캐릭터’로서의 서정우가 언급되곤 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공길의 이준기만을 원했다. 이는 최근에 대중이 스타를 수용하는 방식과 맞물린다. 장동건, 송승헌, 원빈 등과 달리 이준기의 공길은 야오이 만화와 팬덤 문학의 텍스트를 배경으로 한다. 그가 전달하는 이미지는 이전 스타들이 만들어온 맥락과 차이를 보이며, 기존의 드라마와 영화가 보여준 캐릭터와도 다르다. 오히려 공길은 인터넷이 만들어내는 이슈, 10대 문화가 추구하는 일회적인 판타지를 닮았다. 이제 스타는 대중에게 소구되는 특정한 이미지를 재현하는 도구로도 소비되는 것이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MBC 미니시리즈 <개와 늑대의 시간>. 이준기는 다시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모 스포츠신문사가 조사하는 인기 남자배우 순위에선 연속 5주 1위를 차지했고, 드라마 게시판에는 “눈빛으로 모든 감정을 소화한다”, “대역없는 액션연기가 놀라웠다” 등 연기에 대한 호평이 올라오고 있다. <왕의 남자> 열기가 식은 뒤 그에게 쏟아졌던 ‘인기 거품 의혹’이 좋은 연기와 이미지 변신으로 상쇄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역으로 지금 이준기의 인기는 변신의 성과물이 아니다. 그의 눈매와 턱선은 여전히 공길이 아니고서야 수용되기 힘든 남자의 얼굴이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yukki)는 <발레교습소>의 동완이나 반항적인 고교생으로 남성성에 도전했던 <플라이 대디>의 승석은 이준기란 이미지에 달라붙지 못했다. 최소한 반항아 승석을 연기해줄 남성적인 느낌의 배우는 이준기 말고도 숱하게 많다. 오히려 <개와 늑대의 시간>의 수현은 이준기가 찾아낸 또 다른 공길이다. 잊혀진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수현의 이중성은 이준기의 가는 눈과 잘 어울린다. 이준기는 마초적이거나, 폐쇄적인 남성성이 아닌 혼란과 실패의 무게를 담아낸 남성성의 캐릭터를 마치 본래 자신의 것인 양 자연스레 연기한다. 이전까지 공길 외에 대중과의 접점을 찾지 못했던 그가 이번 드라마를 통해 답변을 제시한 셈이다.

<왕의 남자>에서 <개와 늑대의 시간>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지금도 이준기의 위치는 뭐라 말할 수 없다. 대중이 인정한 수현이 연기자 이준기로서의 변신이었는지, 애정의 또 다른 대리물로서의 수용이었는지 판단은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그는 종종 인터뷰를 통해 ‘장동건의 성장 모델’을 언급하지만 그의 외모가 일반적인 남성의 캐릭터를 어떻게 담아낼지는 또 다른 문제다. 연기파 배우가 되든, 개성파 배우가 되든 이준기의 시간은 여전히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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