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 청춘영화의 계보학] 우리를 매료시킨 청춘물과 청춘스타
2007-09-20
글 : 주성철

1970년대 하이틴영화부터 최근 인터넷 소설의 영화화에 이르기까지, 한국 청춘영화들은 매번 다른 얼굴로 나타났다. 영화가 시대의 거울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당대 트렌드의 가장 첨예한 현재라고 한다면 청춘영화는 바로 그 시대 젊은이들의 자화상이나 다름없다. 저 멀리 임예진부터 지금의 문근영에 이르기까지 그 청춘스타들의 면면 또한 젊은 관객과 함께 나이를 먹고 변화해가고 있다. 영화뿐만 아니라 TV드라마와도 끊임없이 대화했던 그 한국 청춘영화의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두 얼굴의 여친>
<엽기적인 그녀>

<두 얼굴의 여친>은 누가 봐도 <엽기적인 그녀>(2001)를 연상시킨다. 순진과 엽기를 오가며 봉태규를 당혹스럽게 하는 두 얼굴의 정려원은, <엽기적인 그녀>에서 무던히도 차태현을 괴롭히던 전지현과 그리 멀지 않다.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를 떠나 <두 얼굴의 여친>은 어쨌건 봉태규와 정려원이라는 캐릭터를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남들이 먹다 남긴 과자를 훔쳐먹고, 신입생 하나없는 해양소년단에서 대장 노릇을 하고 있는 봉태규의 모습은 <품행제로>(2002)에서 중필(류승범)을 보좌하던 ‘수동’, <방과후 옥상>(2006)에서 왕따 탈출 클리닉을 전전하던 ‘남궁달’의 연장선에서 ‘태현이도 가고~ 승범이고 가고~’를 되뇌었던 한국 영화계에 청춘 코믹캐릭터의 새로운 남성상을 열었다 할 만하다. TV드라마 <안녕, 프란체스카>(2005)와 <내 이름은 김삼순>(2005)을 통해 연기자로서의 완전한 변신에 성공했던 정려원도 느닷없는 360도 발차기와 욕설을 일삼는 두 얼굴의 여친으로 확실한 신고식을 치른다. 이처럼 청춘영화의 유쾌한 캐릭터들을 만나는 것도 무척 오랜만의 일이다.

얄개부터 문근영까지, 청춘스타의 변천사

사실 청춘영화를 명확하게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대개는 멜로나 코미디 같은 다른 장르들과 중첩되는 경향이 크며, 막연하게나마 당대의 트렌드에 가장 민감하다는 그 시대 젊은이들의 기호와 정서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영화들을 가리킨다 할 것이다. 아주 멀리 거슬러 가자면 이성구 감독의 <젊은 표정>(1960),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1964), 그리고 정진우 감독의 <초우>(1966) 같은 영화들을 한국 청춘영화의 원조라 일컬을 수 있겠지만, 지금과 가장 유사하게 맥락이 닿는 지점의 영화들은 바로 1970년대 중반 고교를 무대로 한 다수의 하이틴영화들이라 할 수 있다. 강대진 감독의 <여고시절>(1972)을 그 효시로 삼을 수 있는 이 시기의 하이틴영화들은 <진짜진짜 잊지마>(1975)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당시 한국영화의 주요한 불황 타개책이 됐다. 그 결과 1976년에만 무려 25편의 하이틴영화가 제작됐다. 이를 통해 10대 영화 관객이 주요한 흥행의 원천으로 등장함과 동시에, 이른바 청소년 문화가 대중문화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 시기 최초의 청춘스타로 기록된 배우들은 바로 임예진과 이승현이다. 또한, 여기서 시대를 초월하는 흥미로운 공통점은 당시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고교얄개>(1976∼) 시리즈가 바로 현재의 인터넷 소설처럼 조흔파의 유머소설 <얄개전>을 원작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1970년대의 하이틴영화보다 최근 청춘영화들의 직접적인 전범을 제시한 영화를 꼽으라면 단연 이규형 감독의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다. <엽기적인 그녀>의 제작자인 신씨네의 신철 대표는 <엽기적인 그녀>를 두고 ‘2001년판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주인공 강수연에게 찍소리 못하는 남자주인공 박중훈, 그리고 결국에는 행복한 로맨스로 귀결되는 구조는 지금의 인기 청춘영화들이 큰 변화없이 답습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손창민과 함께 <고래사냥2>(1985)는 물론 그보다 앞서 역시 손창민과 함께 <어딘가에 엄마가>(1978)를 통해 어린 청춘스타로 떠올랐던 강수연은 그 인기를 확고히 했고, 박중훈 역시 새로운 스타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뒤이어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는 청춘영화의 두 번째 황금기였다. 한해 차이로 만들어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와 <비오는 날의 수채화>(1990)는 이 시기 청춘영화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을 보여주는데, 후속작들은 후자의 서정보다는 전자의 각박한 현실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인생은 객관식 시험이 아니라고 말하다가, 그래 가끔 하늘을 보기도 하고, 급기야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다는 이유로 열일곱살의 쿠데타를 일으킨 뒤, 열아홉이 돼서는 절망 끝에 하나의 사랑노래를 부르고야 마는 이 시기의 영화들은 그 기나긴 제목들의 나열만으로도 꽉 막힌 입시지옥에 대한 항변이었다. 이미연과 최재성 등이 바로 이 시기의 청춘스타들이었다.

<비트>
<어린신부>

이후 1990년대 말에는 이전 청춘영화들과는 좀 다른 스타일의 다양한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임순례 감독의 <세친구>(1996)는 사회성 짙은 청춘영화의 전형을 보여줬고, <여고괴담>(1998)은 공포 장르와의 결합을 통해 이후 성공적인 시리즈로 안착하게 된다. 방황하는 청춘의 상실감과 분노를 강렬하고 역동적인 카메라 기법으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이 시기 가장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낸 영화는 바로 정우성 주연의 <비트>(1997)다. 이것은 또한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 극장가의 단골 메뉴였던 홍콩 누아르의 비장미와의 접목으로 읽을 수 있다. <비트>에서도 죽고 <본 투 킬>에서도 죽고 급기야 <무사>에서도 죽었던 정우성은 역대 한국영화의 청춘스타들 중 가장 우울한 청춘의 초상이었다. 전지현과 류승범, 그리고 문근영의 ‘명랑’ 이미지로 회귀하기까지 그것은 당시 청춘영화의 변함없는 정서였다. 그로부터 완전한 전환을 이뤄낸 문근영은 지금까지도 가장 중요한 한국 청춘영화의 아이콘이라 할 만하다. 그는 언제나 자기 나이대의 인물을 실제 연기했다는 점에서 가장 현실감 넘치는 청춘 캐릭터였다. 더구나 <어린신부>(2004)는 왕년의 청춘스타 김정훈 주연의 <꼬마신랑>(1970)의 성별 전환이라 할 수 있기에 더 흥미롭다. 그렇게 한국 청춘영화들은 매번 일정한 주기를 두고 변화를 꾀해왔다.

<종합병원>의 신은경과 <커프>의 윤은혜 사이

2000년대 들어 <엽기적인 그녀>나 <동갑내기 과외하기>(2003), 혹은 <어린신부>(2004)가 한국 영화계의 청춘스타를 복권했다는 자부심을 드러냈으나 그것은 그 배우들의 성장과 더불어 쉽게 잊혀져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화는 언제나 그 청춘의 담론과 트렌드를 TV드라마에 선점당하는 처지였다. KBS의 <학교>와 MBC의 <논스톱> 시리즈가 배출한 그 수많은 신인배우·탤런트들의 명단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그 엄청난 격차는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그렇게 영화는 언제나 TV보다 한발 늦었고 늦은 만큼 <오! 해피데이>(2003)의 장나라, <그녀를 모르면 간첩>(2004)의 김정화, <내 사랑 싸가지>(2004)의 김재원, <그놈은 멋있었다>(2004)의 정다빈, <백만장자의 첫사랑>(2006)의 현빈처럼 뒤늦게 영화로 뛰어든 대부분의 젊은 탤런트들은 브라운관에서의 높은 인기가 아연할 정도로 크나큰 실패를 맛봤다. 반면 영화 <청춘>(2000)으로는 별다른 인지도를 얻지 못했던 김래원이 한참 뒤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2003)로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됐으니, 충무로의 청춘영화란 무던히도 그 청춘관객과 유리된 상태였다. 그 사이 한국영화는 TV가 아닌 대학로를 그 근거지로 하는 ‘노련한’ 30대 남자배우들의 경연장이 됐다. 그만큼 충무로에서 ‘청춘배우’들의 입지는 좁고 좁았다.

<발리에서 생긴 일>
<미안하다, 사랑한다>

인상적인 캐릭터들을 떠올려봐도 그렇다. 단언하건대 지난 몇년간 충무로의 청춘영화에서 TV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2002)의 복수(양동근)나 경(이나영), <발리에서 생긴 일>(2004)의 재만(조인성)과 수정(하지원), <미안하다, 사랑한다>(2004)의 무혁(소지섭)과 은채(임수정), 그리고 최근 종영한 <커피프린스 1호점>의 한결(공유)과 은찬(윤은혜)을 능가하는 매력적인 청춘의 아이콘들을 마주한 기억이 없다. 양동근과 이나영, 조인성과 하지원 모두 드라마만큼 영화 출연이 잦은 배우들이지만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자신의 드라마 이미지를 넘어서는 캐릭터를 영화에서 투사한 기억이 없다. 하지만 이들 역시도 딱히 훨씬 나은 처지는 아니었다. 청춘스타들이 출연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어딘가 ‘청춘드라마’라 말하기에는 곤란한 <가을동화>(2000)와 <겨울연가>(2002) 등 윤석호 PD의 심각한 이른바 ‘계절멜로연작’과, <태조왕건>(2000)과 <대장금>(2003)을 시작으로 현재의 <주몽>과 <대조영>에 이르는 사극드라마의 인기에는 비할 바 못 됐던 것이다. 그만큼 영화에서나 드라마에서나 발랄한 청춘들의 자리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황량한 청춘의 땅에서 유독 눈에 띄는 두 캐릭터는 저 멀리 <종합병원>(1994)의 신은경과 바로 지금 <커피프린스 1호점>의 윤은혜다. 당시 드라마 <마지막 승부>(1994)의 연장선에서 짧은 단발머리에 선머슴 같은 씩씩한 이미지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신은경은 여성 캐릭터의 고정성을 깨버린 혁신적 캐릭터였다. 그 앞뒤에서 비슷한 이미지를 보여준 탤런트를 꼽으라면, 드라마 <아들과 딸>(1992)에서의 남성적 여성 이미지를 바탕으로 영화 <가슴 달린 남자>(1993)에 출연했던 박선영과 역시 씩씩한 이미지로 어필했던 김지호가 있다. 당시 <종합병원>에서 신은경의 상대역이었던 구본승은 <엽기적인 그녀>의 차태현이나 <두 얼굴의 여친>의 봉태규 같은 역할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런 점에서 신은경이 이후 임권택 감독의 <노는 계집 창>(1997)에 출연하게 된 것은 한국영화 청춘 캐릭터의 계보학에서, <이재수의 난>(1999)에 이정재가 출연한 것만큼 상징적/단절적 순간이었다. 한편, <커피프린스 1호점>의 남장여자 윤은혜는 <종합병원>의 신은경의 또 다른 얼굴처럼 보인다. 논리적인 측면에서 따지자면, 누가 봐도 여자임이 분명해 보이는 그녀를 두고 묘한 사랑의 감정이 오간다. 이제 사람들은 ‘아니 왜 여자인지 몰라?’라고 딴죽을 거는 게 아니라 그 드라마 속에서 부유하는 감정 자체에 몰두한다. 아마도 <커피프린스 1호점>은 청춘순정만화의 화법을 가장 효과적으로 담아낸 사례일 것이다. 앞서 <왕의 남자>(2006)의 이준기가 닦아놓은 길, 혹은 점점 보편화된 컬트로 자리잡아가는 야오이물의 인기 속에서 ‘은찬’ 캐릭터는 청춘드라마의 외연을 몇 인치 더 넓혔다.

<엽기적인 그녀>와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넘어

<종합병원>의 신은경과 <커피프린스 1호점>의 윤은혜, 혹은 상대 남자를 마음껏 주무르는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과 <두 얼굴의 여친>의 정려원을 보면서, 단지 ‘뒤바뀐 성(性)의 구도’나 더욱 엽기적이고 발랄해진 여성 캐릭터의 등장만으로 이들이 지닌 대중적 재미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여기에 덧붙여 설명할 수 있는 영화는 바로 김경형 감독의 <동갑내기 과외하기>(2003)다. 당시 <엽기적인 그녀>와 더불어, 동시에 여러 가지 면에서 그와 비교되며 역시 전국 관객 400만 관객을 돌파한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가장 영리한 방식으로 인터넷 소설의 장점을 취합한 영화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엽기적인 그녀>가 당시 PC통신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동명의 통신소설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이다. 영화는 종종 전지현이 끊임없이 써나가는 시나리오들이 구현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소설 <소나기>이기도 하고 영화 <쉬리>이기도 하다. 그렇게 영화는 전체적인 기승전결의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는 서사들을 순간순간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묘한 쾌감을 끌어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언어로 이뤄진 캐릭터였다. 알다시피 ‘귀여니’로 대표되는 인터넷 소설의 세계는 거의 일기에 가까운 극단적으로 주관적인 문체와 ‘어른들은 몰라요’식의 생생한 구어체로 이뤄져 있다. 그것은 마치 평범한 픽션으로 도달할 수 없는, 오직 청춘영화만이 줄 수 있는 소소한 재미들의 종합선물세트 같았다.

<엽기적인 그녀>
<동갑내기 과외하기>

<동갑내기 과외하기> 또한 통신소설이라는 출신성분에서부터 권상우와 김하늘이라는, 이후 이한 감독의 <청춘만화>(2006)로 다시 재회하게 되는 두 청춘스타의 한없는 망가짐과 구어체 대사에 대한 과도한 경도를 보여준다. “오늘 컨셉은 삽질이냐?” “이거 완전 아낙네 스타일이잖아”라며 주고받는 그들의 대화와 더불어, 당구장과 옥상을 번갈아가며 주기적으로 터져나오는 액션신들은 오로지 ‘유희’라는 지상과제 앞에 절대적으로 헌신한다. 어이없는 신파나 감상으로 젖어들 만할 때 멈춰서는 영리함은 오히려 <엽기적인 그녀>보다 한수 위다. ‘촌닭’으로 나온 김하늘은 이후 <그녀를 믿지 마세요>(2003)로, 권상우는 <말죽거리 잔혹사>(2004)로 또 한번 성공적으로 변신했다. 한편, 섹스와 코미디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아메리칸 파이>(1999)의 벤치마킹이라 할 수 있는 정초신 감독의 <몽정기>(2002)와 윤제균 감독의 <색즉시공>(2002) 또한, 이 시기 한국 청춘영화 시장에서 새로운 하위 장르의 개척자였음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새로운 얼굴을 기다린다

최근 3, 4년간 한국 청춘영화들은 귀여니 원작에다 당대 가장 ‘새끈한’ 청춘스타들인 강동원, 조한선이 출연한 <늑대의 유혹>(2004)이나 ‘국민 여동생’ 문근영 주연의 <어린신부> 정도를 제외하고는 올해까지 흥행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조인성 주연은 물론 정초신 감독의 후속작으로 기대를 모았던 <남남북녀>(2003), 역시 당대의 청춘스타들인 김래원과 임수정이 만났던 <…ing>(2004), 올해 개봉한 <동갑내기 과외하기 레슨2>처럼 먼저 ‘속편’을 시도했던 <몽정기2>(2005), 가장 어린 청춘영화라 할 수 있었던 <제니, 주노>(2005), 제목부터 노골적인 학원섹스 코미디 <누가 그녀와 잤을까?>(2006), 개봉과 동시에 논란에 휩싸였던 <다세포 소녀>(2006), 슈퍼주니어 모두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꽃미남 연쇄 테러사건>, 그리고 완성을 하고도 개봉시기를 잡지 못하고 있는 또 귀여니 원작의 <도레미파솔라시도> 등 이후 속시원한 청춘영화의 후속타가 여전히 없는 상황이다.

<늑대의 유혹>
<커피프린스 1호점>

청춘영화는 그 사회의 변화하는 관객성을 드러내는 가장 첨예한 지표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트렌드의 주체들이 가장 먼저 반응하는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당대의 청춘영화들이 재미없고 인기없다면 그 자체로 생명력이 없는 사회라 해도 틀리지 않다. 그래서 <동갑내기 과외하기>와 <늑대의 유혹>, 그리고 <커피프린스 1호점>을 낡아 보이게 만드는 새로운 스타들을 언제나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