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 청춘영화의 계보학] <두 얼굴의 여친>의 봉태규
2007-09-20
글 : 김도훈
사진 : 이혜정
21세기 하류청춘

<눈물> <방과후 옥상> <두 얼굴의 여친>의 봉태규

누가 길거리 캐스팅을 믿으랴. 대체로 길거리 캐스팅이란 빈틈없이 기획된 매니지먼트사의 신인배우 홍보용 계락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봉태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도대체 봉태규 같은 남자를 길거리에서 줍지 않는다면 어디서 발견할 것인가. 전문 오디션장이었다면 그가 들어서자마자 “다음!”이라는 외침이 터져나왔을 테고, 연기학원이라면 “여기는 개그맨 육성학원이 아니”라며 공손하게 돌려보냈을 게다. 어느 사진작가는 봉태규의 첫인상을 기억하냐는 질문에 씨익 웃으며 말했단다. “<눈물> 촬영현장엘 갔는데 이상하게 생긴 애가 하나 앉아 있는 거야. 뭐 저렇게 생긴 애가 배우를 하냐 싶었는데 지금은….”

성격파 배우에 대한 오랜 오해 하나가 있다. 성격파 배우라는 사람들이 못나거나 평범한 외모를 극복하고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는 괴상한 믿음이다. 좋은 성격파 배우들은 외모를 극복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타고난 외모를 제대로 이용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봉태규도 마찬가지다. 그의 장점은 찌질한 한국 소심남의 관습적인 외모다. 청담동보다는 화양리 언저리에서 마주칠 법한 하류청춘의 이미지는 젊은 배우들에게 아도니스적 미학을 요구하고 착취하는 한국 영화계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게 아니며, 그 덕분에 봉태규는 변두리 청춘에 대한 절절한 생태학 보고서의 주역을 독차지해왔다. <눈물>은 질주하고 싶으나 질주할 만한 대로를 허락받지 못한 반항아의 생태 보고서,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성적으로 숙성해가는 사춘기 소년의 마지막 몽정 보고서, <광식이 동생 광태>는 성적으로 불손한 청년의 내적 성장 보고서이며, <방과후 옥상>은 고등학교라는 지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왕따의 생존 보고서다.

먹이사슬의 바닥에서 박박 기는 봉태규식 캐릭터들의 비참한 생태는 곧잘 해피엔딩 비슷한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마냥 웃어버리기도 힘들다. 그건 간혹 슬랩스틱의 언저리에 숨은 채플린의 비애를 연상시킨다. 데뷔 초 봉태규가 ‘류승범의 아류’로 종종 불렸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확실히 두 배우는 도태되고 버림받은 채 비틀거리는 청춘의 이미지를 공유한다. 하지만 지금의 봉태규는 선배 류승범으로부터 조금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온 존재다. 류승범이 예민한 동물적 신경으로 하류청춘의 비범함을 끌어낸다면 봉태규는 나태한 식물적 무신경으로 하류청춘의 비루함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비슷한 컨셉으로 시작하더라도 류승범의 영화는 결국 열혈액션이 되고 봉태규의 영화는 캐릭터 코미디의 장르 속에 가벼이 안착한다.

최근작 <두 얼굴의 여친>에서 봉태규는 <엽기적인 그녀>의 차태현을 그대로 인용한 듯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하지만 봉태규는 차태현의 아우라를 답습하기에는 차태현과 출신신분부터 다르다. <엽기적인 그녀>의 차태현은 뼛속까지 선하기 때문에 난봉꾼 여자의 애정을 의심할 리 없는 귀공자였다. 하지만 <두 얼굴의 여친>의 봉태규는 애정결핍의 극단적인 상태에 놓인 나머지 여자친구가 이중인격이라도 상관없으니 애정만 좀 달라며 울부짖는 남자다. 두 캐릭터는 공히 어떤 유아기적 상태에 머무르고 있지만 적어도 봉태규에게는 순정남의 탈색된 판타지가 없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여친의 애정’이 아니라 ‘애정’ 그 자체다.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찌질한 욕망도 부릴 수 있다는 현실적 21세기 소년은, 여기 지금 봉태규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방과후 옥상>
<두 얼굴의 여친>

봉태규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험은 자기복제의 손쉬운 안락함에 빠져드는 것이다. 시대를 대표하는 청춘의 얼굴은 종종 그 시대에서 생명을 다하고 만다. 하지만 그가 소심한 하류청년의 이미지로만 남더라도 우리로서는 크게 손해볼 것은 없으리라. 어쨌거나 봉태규는 거친 세상의 중심에서 소심하게 사랑을 외치던 2007년 청춘남들의 표본으로서 영원히 남게 될 테니까. 그러니 기억하자. 그는 길거리에서 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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