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이기 때문에 넘어야 하는 벽들이 있다.
섹시하고 화려한 외모로 주목받은 경우라면 연기력을, 순수한 느낌으로 인기를 얻은 경우라면 그것이 가식이 아님을, 털털하고 남성적인 매력으로 호감을 얻은 경우라면 그것이 여성스러움의 반대말이 아님을, 여배우들은 증명해야 한다. 여배우의 이미지는 바꾸기도 힘들지만 그 자체로도 아슬아슬하다. 청순함이 내숭이 되고, 섹시함이 천함이 되며, 털털함이 주책이 되는 건 보는 사람 마음이다. 대다수의 대중은 여배우를 청순, 섹시, 털털, 신비 정도의 이미지로 기억하고 그 범주를 넘어선 것들을 수용하길 꺼린다. 그리고 안티가 된다. 여배우는 억울하겠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박예진이 <패밀리가 떴다>에 출연한다. 그녀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신비스런 여고생 효진으로 시작했고 이후엔 로맨스물의 착하거나 나쁜 주인공이었다. <발리에서 생긴 일>의 영주는 차가웠고 <작은 아씨들>의 혜득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브라운관과 스크린의 단골 여자 캐릭터였다. 박예진은 그냥 무난한 여배우였다. 크게 주목받은 적도 없지만 안티들에게 크게 내몰린 적도 없다. 미니시리즈보단 일일연속극에 가까워 보였고, 어느 집의 몇째 딸로 들어가면 별 무리없이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토크쇼 형태의 예능프로그램도, 일회성 게스트 출연도 아니다. <패밀리가 떴다>에서 박예진은 고정 멤버로 매주 1박2일을 TV에서 산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포장해준 탄탄한 로맨스물의 구조없이 박예진이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1화에서 유재석이 박예진에게 던진 말처럼 정말 묻고 싶었다. “예능을 하신단 말씀이세요?”
리얼리티형 오락프로그램은 여배우들에게 가장 위험한 영역이다. 완결된 이야기 속에서, 남의 얼굴로만 살아오던 그들이 본인의 이름과 삶을 들춰내며 카메라를 마주할 때 시청자는 주저하게 된다. 보지 못했던 캐릭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머뭇거리게 된다. 박예진 역시 2화 정도까지는 캐릭터가 명확히 잡히지 않았다. 문어를 맨손으로 잡고, 숭어의 눈을 칼로 쳐 터뜨리며, 모든 남자가 실패한 흑돼지 잡기에 성공한 뒤인 지금은 ‘달콤살벌한 예진씨’로 통하지만 그전까지 박예진은 그냥 불안했다. 하나의 사건이 터지면 그 안에서 박예진이 과연 무슨 일을 해낼 수 있을지 매번 의문이었다.
하지만 시골이란 공간은 그녀가 평소 작품으로 보여주기 힘들었던 자신의 모습을 마음껏 풀어놓게 도와줬다. 밥하기, 시골일 하기 등 프로그램이 가진 고정 코너들은 그녀를 돋보이게 했다. 박예진은 대부분이 ‘덤 앤 더머’처럼 보이는 패밀리 무리 안에서 일종의 해결사가 되었다. 드라마나 영화로는 시도한 적 없었던 캐릭터 변신을 리얼리티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통해 이룬 셈이다. 박예진은 <패밀리가 떴다>의 이미지를 그대로 살려 OCN에서 TV무비 <여사부일체>도 찍었다.
<패밀리가 떴다>에서 박예진이 넘어야 할 산은 이미지 변신 외에 하나 더 있었다. 이효리 넘기. 다섯 혹은 여섯에 이르는 남자 멤버 수와 달리 <패밀리가 떴다>에서 여자 멤버는 (몇 회를 제외하면) 박예진과 이효리뿐이다. 그리고 이효리는 국내 여자 톱스타다. <패밀리가 떴다>를 보는 시청자는 리얼리티를 표방한 이 프로그램에서 보이지 않는 이효리와 박예진의 리얼리티를 상상하게 된다. 둘은 친할까, 혹은 박예진은 이효리 앞에서 한마디도 못하는 건 아닐까. 게다가 프로그램의 마지막 코너 잠자리 순위 매기기에서 박예진은 초반 연속해서 졌다. 여배우가 굴욕으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할 때 그 이미지는 위험해진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효리는 박예진을 ‘예진아~’라며 친근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박예진은 이효리에게 효리 언니라며 안겼다. 시청자는 그제야 둘의 관계를 마음 편히 볼 수 있게 되었다. ‘달콤살벌 예진씨’의 시작이 박예진의 실제 모습이라면, 그 끝은 이효리란 스타가 가진 이미지의 힘이다. 이효리가 버린 예진씨를 좋아해줄 시청자는 어디에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