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의 귀환. <박쥐>는 두말할 것 없이 2009년 최고 기대작이다. 그가 다시 하드보일드한 누아르의 세계와 손잡은 것 같은 이미지, 우정출연이었던 <친절한 금자씨>를 제외하자면 <복수는 나의 것>(2002) 이후 송강호와 사실상 7년 만의 만남, 그리고 실제 신학교에 갈 ‘뻔’했을 정도로 엄격한 가톨릭 환경에서 성장한 그 자신의 치열한 자기고백이 담길 것 같다는 점에서 <박쥐>는 올해 가장 뜨거운 영화다. 내용은 이렇다. 존경받던 신부 상현(송강호)이 아프리카에서 비밀리에 진행되는 백신 개발 실험에 자원했다가 정체불명의 피를 수혈받고 뱀파이어가 되고, 친구 강우(신하균)의 아내 태주(김옥빈)를 만나 위험한 사랑에 빠진다. 그러던 어느 날, 태주가 남편을 살해하자고 제안한다.
시놉시스만으로도 <박쥐>는 분명 그가 언제나 얘기했던 윤리, 구원, 그리고 폭력의 문제까지 다룬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가 ‘쉬어가는’ 영화라 생각했던 그의 팬들이라면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는 영화다. 게다가 그가 언제나 도덕적 딜레마에 처한 인물들을 관심있게 그려왔다면 ‘신부’와 ‘뱀파이어’, 그리고 ‘살인’이라는 세개의 삼각형은 그야말로 박찬욱이 지금껏 직면했던 ‘선택’의 순간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다. 그런데 그는 <박쥐>가 ‘사랑’에 관한 영화일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레 말끝을 흐린다. 그저 지금으로선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박쥐>는 현재 후반작업이 절반가량 진행된 상태다.
-<박쥐>는 꽤 오래전부터 얘기해온 아이템이었다. 그 사이 제목도 안 바뀌었다. 영어 제목은 맨 처음 <Evil Live>에서 <Thirst>로 바뀌었고.
=할리우드영화 중에 실제 <박쥐>라는 작품이 있더라. 또 영어로 직역하면 <배트맨> 같은 느낌이 들어 오해가 생길까봐 제목을 바꿀까도 생각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영어 제목 <Evil Live>는 Evil 철자를 바꿔서 한번 더 쓴 건데 그거야말로 B급 무비 같은 느낌이 났다. 그래서 해외영화제 같은 데 가서 차기작이 <Evil Live>라고 하면 열성팬들은 정말 열광하더라. 사인회하면 지금도 장도리 들고 사인 받으러 오는 애들 있거든. (웃음) 퍼뜩 ‘이건 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Thirst>라는 제목으로 바꿔 봤는데 폭넓게 인기있는 제목인 것 같다.
-송강호와 김옥빈 외 주변인물 캐릭터에 대해 좀더 얘기해달라.
=신하균은 남편이고 김해숙은 신하균의 엄마이자 태주의 시어머니다. 오달수나 송영창도 나오는데 그들은 신하균의 직장상사들이고 늘 그 집에 할 일 없이 자주 놀러오는 사람들이다. 수요일마다 퇴근해서 신하균 집에 모여 마작을 하며 시간을 때우는 한심한 인간들이다. 태주 입장에서는 꼴보기 싫은 사람들이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의 오달수의 모습을 좋아하는데 이번 <박쥐>도 그에 못지않게 좋다.
액션 많고 화려한 영화라고 오해마시라
-신부가 주인공인 영화라는 점에서, 당신의 개인적인 환경과 연결할 수 있을까.
=물론 종교영화적인 측면이 있다. 또한 나의 성장환경이라든지 개인사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여러 가지 것들을 정리하려는 의도로 기획했던 영화이기도 하니까. 물론 인물들이 나와 똑같다는 건 아니지만, <박쥐>라는 영화가 출발할 때의 문제의식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역시 뱀파이어 영화다 보니 송강호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 궁금하다.
=송강호가 뱀파이어가 될 때 아주 심하게 변하거나 하진 않는다. 가령 송곳니가 길어지고 하는 것들. 그저 미묘한 차이들을 만들고 있다. 머리 모양이나 피부 톤이 변하긴 하는데 확 달라지는 건 아니고 인상이 달라지는 정도라고나 할까. 엄청난 CG를 써서 인물의 외양을 크게 바꾸진 않는다.
-<렛미인>이나 <트와일라잇> 같은 영화들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혹시 보려는 생각은.
=물론 최근에 바빠서 보지 못했다. 뱀파이어 영화는 늘 꾸준히 나왔던 것 같은데 달라진 점이라면 요즘 흥행에서도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 정도랄까. 두 영화 모두 기존 뱀파이어 장르의 컨벤션들을 적당히 비틀었다고 하는데 그런 점에서는 비슷할 수도 있겠다. 물론 이제 많은 사람들이 뱀파이어가 낮에 돌아다녀도, 십자가나 마늘이 등장하지 않아도 쉽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박쥐>가 기존 뱀파이어 장르의 전통에서 따르는 건 낮에 활동할 수 없다는 것과 감각이나 완력이 더 예민해지고 강해진다는 것 정도? 그리고 흡혈귀의 피가 다른 사람 몸 안으로 들어가야 그 사람이 흡혈귀가 된다는 건 분명하게 한다. 어떤 이유에선지 뱀파이어가 물기만 해도 그 사람이 뱀파이어가 된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건 아마 좀비영화들과 혼동해서 그런 것 같다.
-감각과 완력, 그런 점에서 뱀파이어 액션의 강도는 어떨까.
=액션장면이 많거나 화려한 볼거리가 있는 영화라고 하면 안될 것 같다. (웃음) 으레 예상하듯, 망토를 확 펼쳐서 날아다니고 추격전을 벌이거나 하는 건 없다. 물론 높은 데서 떨어지기도 하니까 그런 액션장면들이 아주 없지는 않고 시퀀스 2개 정도는 있다. 기본적으로는 거의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화려한 세트의 집은 아니지만 굉장히 공들여서 만들었다. 숨 막힐 정도로 밀도 높은 집이다.
-낮에 활동하지 못한다면 밤장면이 가장 많은 박찬욱 영화라 하겠다.
=그렇다. 그래도 송강호가 뱀파이어가 되기 전의 장면도 꽤 있다. 뱀파이어가 되는 순간은 영화 시작하고 20분 정도 지나서인데 그때까지는 전체적인 콘트라스트를 위해 대개 낮장면이다. 그리고 자신이 뱀파이어가 됐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거기서 좀더 지나야 한다.
남녀주인공 나이 차이 문제 없어
-송강호는 그 기나긴 필모그래피 안에서 본격적인 멜로드라마를 한 적이 없다. <밀양> 역시 그렇다고 보긴 힘드니까. 불륜이건 어떻건 <박쥐>는 송강호 최초의 본격 로맨스가 아닐까.
=송강호가 사제로서의 갈등도 있고, 뱀파이어가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측면도 중요하지만 제일 강조하고 싶은 건 태주와의 사랑이다. 송강호의 그런 모습이 아주 낯설지도 모른다. 촬영현장에서 본인도 그랬고, 그걸 보는 우리도 그랬으니까. (웃음) 그래서 <박쥐>가 진짜 새로운 영화라면 그런 면 때문이지 않을까. 물론 처음에는 어색해도 금방 적응된다. 워낙 잘하는 배우니까. 송강호가 남성미도 있지만 은근히 섹시하기도 하다.
-사실 송강호가 몸매가 된다. 다리도 길고 슈트를 입은 뒤태도 꽤 좋다.
=감량을 많이 했다. 얼굴선도 좀 샤프해지고 멋있어졌다. 사제복을 입은 모습도 상당히 잘 어울리고. 그런 그가 뱀파이어가 되면서, 사제로서 억제해온 여러 종류의 욕망의 뚜껑을 더이상 눌러놓지 않게 되면서 격정적으로 된다.
-파격적인 정사신 얘기가 돌면서 제작 초기부터 여배우 캐스팅은 난관이 많았다. 송강호와 김옥빈, 두 사람의 호흡은 은근히 호기심이 동한다.
=실제 나이 차이가 꽤 난다. 그런데 김옥빈이 나를 만나기 전부터 ‘애’ 같은 느낌의 배우는 아니었다. 그 나이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성숙하다. <박쥐>를 하면서는 더 그렇게 된 것 같고. 촬영 전부터 신하균 등과 연습도 많이 하고 함께 어울리고 리딩하고 술 마시면서 점점 늙어갔다. (웃음) 정말 실제로 영화를 보면 그런 차이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올드보이> 때도 최민식, 강혜정을 두고 그런 우려를 했었는데 나중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송강호와 다시 조우한 소감은.
=워낙 가깝다보니 특별히 이번 영화라고 해서 다른 느낌은 없다. 그냥 뭐 이전보다 더 잘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점점 더 나아지고 있는 배우다. 경력도 오래되고 해서 믿어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사실이다. 이거 다른 배우들이 좌절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웃음)
-‘복수 삼부작’이라는 표현처럼 <박쥐>가 새로운 시작 혹은 이전에 못다한 이야기의 연장이라 볼 수도 있을까.
=그렇게 볼 수는 없지만 <스크린>의 김형석 편집장은 이런 말도 하더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 이어 비인간이 주인공인 새로운 시리즈 아니냐고. 안수현 PD 얘기로는 내가 제작한 <미쓰 홍당무>까지 포함하면 이미 제목에서부터 싸이보그와 홍당무에 이어 ‘비인간 삼부작’이 된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