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훈 촬영감독의 방은 비어 있다. 시나리오를 받으면 그는 블라인드부터 내린다. 밝으면 꽉 차는 느낌이 들어 생각에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게 이유다. 최대한 어두울수록 좋다. 그리고 긴 책상 위에는 컴퓨터 외엔 아무것도 놓아두지 않는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을 예전에 찍었던 일상적인 사진들을 늘어놓으면서 구체화하기 위해서다. 그 흔한 책이나 DVD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원하는 환경이 갖춰지면 그는 밖에서 얻은 단서들을 확장시키기 시작한다. 워낙 영화를 안 챙겨보는 성격이라 박찬욱 감독은 매번 그에게 참고해야 할 목록을 건넨다. 그러면 방에 들어와 영화를 보고 촬영의 밑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진이다. 미국의 사진작가 알렉 소스(Alec Soth)의 것들인데, <박쥐> ‘촬영’의 핵심이라고 한다. “배우들의 감정선이 제일 중요했다. 그래서 인물이 먼저 움직이고 카메라가 뒤따라가는 방식을 택했다.” 건조하리만치 중간에 서서 바라보는 것이 특징인 알렉 소스의 사진처럼 말이다.
‘이야기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는 촬영에 대한 그의 철학은 다양한 생각이 자유롭게 오갈 여지가 많은 그의 빈 공간과 맞닿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