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인간의 고통과 구원에 대한 집요한 물음표
2009-10-20
글 : 이화정
<씨클로>를 잇는 트란 안 훙 감독의 ‘현대판 신약성서’ <나는 비와 함께 간다>

트란 안 훙이 입을 열었다. 조시 하트넷, 기무라 다쿠야, 이병헌이라는 톱스타의 캐스팅부터 제작까지 총 3년간의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이 작품이야말로 자신이 만들고 싶었던, 하고자 했던 언어라고 전했다. 그리고 자신을 불러 세우는 ‘베트남’을 벗어나 이제 그는 인간 본래의 영역을 탐구하고자 한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는 <씨클로>로 그가 던졌던, 그러나 매듭짓지 않았던 구원에 관한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인, 근래 들어 가장 용감한 그의 도전이다.

‘차기작은 <씨클로>를 끌어안은 작품이다.’ <씨클로>를 발표한 직후 트란 안 훙 감독은 이미 <나는 비와 함께 간다>의 연출에 대한 희미한 윤곽을 제시했다. ‘신약성서의 현대판이 될 것’이라는 짧은 힌트가 첨언의 전부였다. 알다시피 트란 안 훙의 다짐은 오랫동안 지켜지지 않았다. 차기작인 <여름의 수직선상>으로부터 9년, 닮은꼴인 <씨클로>로부터 무려 14년 만에야 <나는 비와 함께 간다>는 완성됐다. 톱스타들의 잇단 캐스팅이 보도되면서 궁금증은 증폭됐지만, 그의 신작은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사이, 앞서 언급한 <여름의 수직선상>이 발표됐지만, 영화는 전쟁 뒤에도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사는 묵시론적인 베트남 관찰기 <씨클로>의 연장선상이라기보다 데뷔작 <그린 파파야 향기>에 가까웠다. 베트남 가정사를 그린 세 자매의 이야기에선 <그린 파파야 향기>에서 보았던 (장점이지만) 또한 비난의 빌미를 제공했던 탐미적인 영상지상주의자 트란 안 훙의 화면이 다시금 재현되는 듯했다. 그 어디에도 <씨클로>를 연상시키는, 또 신약성서를 차용한 듯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고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씨클로>가 베트남 출신 감독이 건넬 수 있는 베트남의 현재를 그리고 있으면서도, 전작에서 더 나아가 인간 내면의 본질을 탐구할 길을 열어두었다면, <여름의 수직선상>은 어쩌면 그가 창작을 하는 데 얽매여 있을지도 모르는 베트남적인 소재와 가치로 다시 회귀하는 인상을 안겨주었다. 어쩌면 그건 한발 후퇴이자, 감독 스스로 몸을 수그린 자세였다. 염두에 두고 있던 <나는 비와 함께 간다>는 그래서 단순한 차기작을 넘어 트란 안 훙의 작품의 방향을 설정해줄 새로운 키워드로서의 기대가 뒤섞인 트란 안 훙의 실질적인 차기작이다. 이 영화의 시작은 그래서 연출에 착수한 3년 전이 아닌, <씨클로>와의 맥을 찾을 수 있는 1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단순 추리극도 또 액션 활주극도 아니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는 찾고자 애쓰는 자와 몸을 숨긴 자,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공존하는 추리스릴러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레이먼드 챈들러 소설의 필립 말로에게처럼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도착한다. LA 거대 제약회사의 회장에게 실종된 아들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전직 형사 클라인(조시 하트넷)이 필립 말로의 대체 역할인 셈이다. 오래전 집을 나간 아들 시타오(기무라 다쿠야)의 종적을 유추할 수 있는 건 그가 몇 차례 고아원을 돕기 위한 거액의 돈을 요구했다는 사실뿐이다. 그나마 그 요구가 끊기면서 지금은 연락마저 두절된 상태다.

단서는 아버지에게 건네받은 시타오의 사진 한장이 전부다. 의뢰를 수락한 클라인은 그가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홍콩으로 가 친분이 있는 조멩지(여문락)의 도움으로 수사를 진행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시타오를 찾는 또 한명의 남자 수동포(이병헌)가 등장한다. 클라인이 시타오를 ‘찾기’ 위한 게임을 펼친다면, 자신의 연인을 시타오에게 뺏겼다고 믿는 홍콩 마피아조직 보스 수동포는 시타오를 ‘쫓기’ 위한 게임을 전개하는 식이다. 두 게임은 어느 하나 쉽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추적을 하는 자에게 그 대상은 지극히 모호하기만 한 존재이며, 쫓는 자는 있지만 정작 그 대상은 자신이 쫓기고 있다는 걸 감지하지 못한다. 좀체 맞물리지 않는 세 남자의 원 그리기는 애초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한판의 ‘게임’이라는 단어로 정의하기에는 너무 많은 결들을 끌어안기에 생긴 결과다. 시타오라는 대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래서 이 영화의 중심축은 시타오와 그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고뇌에 빠져 있는 클라인, 수동포, 각각의 존재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각자의 깊디깊은 내면의 성찰에 빠져 있다.

고통과 구원의 수레 바퀴를 도는 세 남자

세 남자에게 주어진 공통의 과제는 다름 아닌 고통과 구원이다. 가장 직접적으로 이 키워드를 실천하는 이는 구원자의 몸을 받은 시타오다. 자본가라는 아버지의 몸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몸은 타인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걸 정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 대신, 그는 남의 고통을 받아들여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숙명의 존재다. 부호의 아들이지만 그가 필리핀의 빈민촌을 전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약과 곤궁이 지배하는 사회를 정화하는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볼 때 그는 정확히 ‘현대’라는 부패한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선지자에 가깝다. 그건 마치 마이클 셰이본의 소설 <유대인경찰연합>에서 추악한 현대에 몸을 드러낸 선지자가 더러운 호텔방에서 마약으로 찌든 채 생을 마감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시타오가 타인의 구원을 실천하고 있다면, 클라인은 자신 내면의 구원을 얻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고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존재다. 클라인의 ‘현재’는 시타오를 찾는 여정이지만, 사실 그의 ‘내면’을 끈질기게 장악하고 있는 것은 그가 형사였던 시절 예술가이자 연쇄살인마인 하스포드와 가졌던 씻어낼 수 없는 기억의 트라우마다. 영화의 첫 장면, 아틀리에에서 펼치는 형사와 연쇄살인마의 접전은 형사 장르가 보여줄 수 있는 액션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종말의 그날까지 그리스도는 고통 속에 계신다’는 말을 내뱉으며 예술가는 이로 클라인의 살점을 파고든다.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깊게 파고드는 이는 가장 극명한 고통의 시각화다. 예술가는 기괴한 얼굴, 늘어진 목, 새를 연상시키는 몸통의 살덩어리들로 자신의 작품을 형상화한다. 마치 프란시스 베이컨의 <십자가 발치에 있는 인물들에 관한 세 습작>을 그대로 재현한 듯, 상상을 넘어선 역겨운 육체의 형상 속에 인간 몸의 원초적 고통이 표현된다. 육화된 그의 고통 속에서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모습을 유추해내는 건 어렵지 않다.

<씨클로> 속 누이와 시인을 닮은 시타오와 수동포

고통은 두 남자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수동포에게도 짐지워진다. 시타오의 희생이 베트남전쟁 이후의 혼란한 사회, 순결을 내주고 창녀로 전락할지언정 가난한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씨클로>의 누이(트란 누 엔케)를 닮아 있다면, 수동포는 악인이지만 결코 극단적인 악으로 다다를 수 없는 번민의 존재인 <씨클로>의 시인(양조위)과 맞닿아 있다. 수동포는 외적으로 볼 때 명백히 악을 수행하는 존재, 고통을 주는 자에 불과하다. 피가 흥건해질 때까지 직접적인 폭력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반하는 사람을 벌주는 장면은 수동포가 지니고 있는 악을 명백하게 시각화해준다. 타인의 신체를 끔찍한 방법으로 훼손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는 유형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을 헤집어본다면 그가 고통을 주는 자로서뿐만 아니라 고통을 받는 자로서의 쾌락도 함께 구가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자신을 떠난 여인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그가 사도마조히즘적인 내면에 사로잡혀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다. 고통에 관해서라면 명백한 답안을 가지고 있는 것과 달리, 이 과정에서 구원은 절실한 그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부패한 세상에서 그가 찾은 구원은 희망이 아닌 절망이다. ‘구원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니힐리즘적인 태도는 바로 그가 포기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절대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이 엇나간 심성은 그가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을 받는 순간, 중대한 질문이 되어 그에게 다시 되돌아온다. 결국 수동포는 구원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 영화의 가장 직접적인 촉매제다.

라디오헤드의 음악 위로 색채의 향연은 계속되고

끈덕지게 라디오헤드의 <Creep>이 따라붙던 <씨클로>의 잊을 수 없는 색채의 향연은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도 지속된다. 조각을 이어붙인 사진 한장, 사라진 시타오를 찾기 위해 필리핀의 밀림을, 홍콩 마천루의 밤풍경을 헤집는 클라인의 모습. 그리고 시타오를 향해 사라진 자신의 여인을 찾기 위해 고뇌하고 안달하는 수동포의 모습. 여전히 라디오헤드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이 세 남자는 쫓고 쫓기는 인고의 게임을 유려한 영상과 함께 오랫동안 지속한다. 그리고 영화는 살로메가 치켜든 머리라는, 살점을 기어오르는 구더기라는 즉각적인 비유의 방식들을 소도구로 하여, 끊임없이 이어지는 겹겹의 중첩된 해석들을 발사한다.

트란 안 훙은 결국 이 과정에서 부패로 오염된 사회, 지구 멸망이라는 징후들이 가득한 지금의 현대에 구원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가장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실종된 남자, 그를 찾아 헤매는 추적자, 그리고 조직의 보스라는 상투적인 캐릭터, 별스럽지 않은 스토리라인으로도 이 영화가 단순 추리극이, 또 액션 활주극이 되지 않는 이유 역시 이 때문이다. 14년 전 <씨클로>의 시인에게서 유추할 수 있었던 구원자의 모습이 스크린에 또렷이 각인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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