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에 무리수인 동물영화에 대한 염려는 틀리지 않았다. 국내 최초를 표방했던 경주영화 <각설탕>(2006)은 제법 야심찬 기획 의도에도 불구하고 관객 150만 동원이라는 저조한 실적에 그쳐야 했다. <괴물>과 맞붙은 대진운을 탓하기에 앞서 제작진은 동물영화가 빠질 수 있는 함정에 주목했다. <그랑프리>는 <각설탕>으로부터 4년 뒤, 다시 일어선 일종의 절치부심 후속작이다. <각설탕>의 기획과 제작을 담당한 이정학 PD가 또다시 기획했고, 그간 드라마 <아이리스>로 대중의 요구를 확인한 양윤호 감독이 <가면> 이후 연출한 3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이다. <각설탕>이 대중과 만나지 못했던 바로 그 지점. <그랑프리>는 바로 <각설탕>이 이루지 못한 흥행이라는 과제를 바통으로 이어받아 출발한다.
중심축은 <각설탕>과 마찬가지로 여자 기수다. 그러나 말과 인간의 교감이 주를 이루었던 <각설탕>과 <그랑프리>는 초반 이후 궤를 달리한다. 영화는 경주 도중, 사고로 말을 잃은 기수 주희(김태희)의 좌절과 함께 말문을 연다. 함께 고생했던 경주마를 잃으면서 주희는 기수로 성취하고 싶었던 그랑프리에 대한 꿈도 잃었다. 꿈을 접고 내려간 곳은 경주마가 태어난 제주도. 그런데 모든 걸 접으려고 간 그곳이 오히려 그녀에게 반전의 장을 제공한다. 마침 경주 도중 친구를 잃은 아픔 때문에 기수 생활을 접고 칩거 중인 우석(양동근)을 알게 된 것이다. 상처로 마음을 열지 못하던 주희는 적극적인 우석의 애정공세에 점차 삶에 대한 의지와 기수로서의 꿈을 되찾는다. 그리고 새롭게 짝을 이룬 명마 ‘탐라’와 함께 그랑프리 대회에 출전하며 제2의 도약을 꿈꾼다.
말과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랑프리>는 비슷한 소재의 다른 영화처럼 둘 사이의 관계회복에 머무르지 않는다. 기수인 주희와 우석, 목장주인 유선(고두심)과 만출(박근형), 말로 인해 부모를 잃게 된 소심(박사랑)의 사정 등 영화에서 말은 모든 인물을 하나로 묶어주는 다중적인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다. 말이 인간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따라 영화도 다각도로 해석된다. 주희와 우석이 쌓는 애정라인에서 본다면 멜로영화지만, 주희가 그랑프리 대회에 출전하고 여자 기수 최초로 우승에 다가가는 과정은 일종의 성장영화로 해석할 수 있다. 주희와 우석이 가꾸는 멜로라인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노인의 오랜 사랑 역시 영화의 중요축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다문화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정불화까지 집어낸다. 말이라는 중요 매개체를 통해 이 모든 곁가지를 생산해내는 것이다.
스펙터클한 경주장면의 연출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던 <각설탕>과 달리 <그랑프리>는 경주장면에 대한 강박을 벗어버렸다. 결과적으로 말과 관계를 맺은 인간 캐릭터들이 부각되어야 했다. 역시 가장 큰 부담은 기수로서의 성장과 멜로라인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주희 역의 김태희에게 돌아갔다. <아이리스>로 양윤호 감독과 호흡을 맞춘 김태희는 그간 지칠 만큼 겪었던 연기 논란을 잠재울 역할로 주희에 올인한다. 당찬 모습과 털털한 이미지를 둘 다 갖춘 캐릭터가 기존의 김태희에게서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이다. 군 제대 뒤, 3년 만의 컴백작으로 <그랑프리>를 택한 양동근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알다시피 군입대로 불가피하게 하차했던 이준기의 대타라는 부담감 때문에 여러모로 무리수가 많은 캐스팅이었다. 그러나 양동근은 좀더 적극적인 캐릭터로 우석을 해석, <그랑프리>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 일조한다.
결승선을 앞둔 지금, <그랑프리>의 결과는 의외로 또렷하게 보인다. 다양한 지점에서 접근 가능하다는 점은 이 영화의 장점이지만, 한편으로는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단점이다. 주희와 우석의 감정선에 관객이 동화하려면 지금의 곁가지들이 좀더 정리되는 편이 나았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는 시도 때문에 정작 <그랑프리>는 어느 누군가의 감정에도 선뜻 다가가기 힘든 아쉬움을 남겼다. 곁눈질하지 않고, 말의 질주에 속도를 붙여줄 수 있는 눈가리개가 필요했다.
말과 함께 우여곡절
소재의 특성상 <그랑프리>는 말을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는 영화다. <각설탕>에 이어 이번 작품까지 경마영화에 올인한 네버엔딩스토리의 이정학 대표는 <그랑프리>를 마사회의 도움없인 절대 제작되기 힘든 영화라고 표현한다. “<각설탕> 때 마사회에서 PPL 형태로 8억원을 지원받았던 반면, 이번에는 마사회가 제작비 37억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20억원을 투자했다.” <각설탕> 때 쌓아올린 인연이 이번 작품의 제작에도 큰 도움을 준 셈이다.
영화의 두 번째 주인공이라 할 말에 대해서는 이미 <각설탕>에서 혹독히 경험한 터였다. 말은 동물 중에서도 유독 겁이 많고 예민한 성질이라 촬영이 용이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영화 속 말은 제주도 육성목장에서 촬영 전 이정학 대표가 직접 섭외한 말들이다. 말의 상태를 고려할 때 한번에 한 시간 이상 촬영은 불가능. 한 마리의 말을 스크린에 표현하기 위해서는 다른 네 마리의 말이 필요했다. 표정에 능한 말, 달리는 데 능한 말, 꼬리를 흔드는 데 재주가 있는 말 등 각 필요에 따른 분야별 말이 동원됐다. 점이나 말의 색깔을 통일하기 위해서 말 배우 역시 사람 배우들처럼 그때그때 분장을 해야 했다. 영화에서 목장 인부가 말을 향해 “너는 매일 먹고 똥만 싸냐”라는 대사를 하는 장면에선, 실제 말의 배변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내리 4일을 기다렸다는 촬영 뒷이야기도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