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충무로에 로맨틱코미디가 멸종 장르가 되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드는 참이었다. 때마침 <시라노; 연애조작단>이 오랜만에 로맨틱코미디를 표방하고 나섰다. ‘당신의 연애를 코치해드립니다’라는 다소 낯간지러운 문구가 거슬리지만, 감독의 이름을 확인한다면 재고할 여지는 충분하다. 김현석 감독은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을 시작으로 <YMCA야구단> <광식이 동생 광태>와 <스카우트>를 연출한 전적이 있다. 야구를 말할 때도 연애를 논하던 작가다. 한마디로 연애영화에 이만한 고수가 없다.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김현석 감독이 그간 유지, 보수해온 멜로영화의 궤적을 새삼 확인하는 절차이자, 위험수위에 도달한 충무로 멜로 장르에 대한 예의와도 같은 영화다.
출발선에서 점검해 보자면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일단 멜로의 감정을 확 제거한 뒤 말문을 연다. 감정이 움직여야 하는 사랑도 치밀한 계산과 과학적인 접근이 있다면 충분히 원하는 방향으로 조작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연극 단원 출신들로 구성된 연애조작단 ‘시라노 에이전시’는 이성을 사로잡는 완벽한 각본과 행동방침, 맞춤형 외형 분석을 통해 연애에 숙맥인 사람들도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게 도와준다. 물론 어디까지나 고액의 수임료를 받고 하는 사업적인 측면에서다.
99%의 연애 성공률을 자랑하며 승승장구하던 시라노 에이전시에 위기가 닥친 건 연애 숙맥 상용의 등장과 함께다. 직업, 외모 어느 하나 빠질 것 없는 의뢰인 상용(최다니엘)이 요구한 사랑의 대상은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여자 희중(이민정). 아니나 다를까, 희중은 에이전시 대표인 병훈(엄태웅)과 오래전 사귄 사이다. 희중과 병훈의 과거를 모르는 상용, 알면서도 희중과 상용을 이어줘야 하는 위기에 봉착한 병훈, 그리고 이 모든 관계로 또 다른 고민에 빠진 에이전시 작전요원 민영(박신혜). 코믹 일로로 치닫던 상황극은 진지한 사랑모드로 전환되고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본격적인 연애 이야기도 시작된다.
타깃은 속을 알 길 없는 여성 희중이지만, <시라노; 연애조작단>에서 정작 해석되어야 할 것은 두 남자의 사랑방식이다. 남의 연애엔 프로지만 정작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겐 상처를 준 남자 병훈쪽이나, 잘나가는 펀드 매니저에 훤칠한 외형을 갖추었지만 연애엔 젬병인 소심한 남자 상용. 둘 모두 연애에 관해서라면 모두 불완전한, 성장을 하지 못한 인간유형인 셈이다.
영화의 설정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연애편지를 대행해준 17세기 실존인물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일대기를 그린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서 빌려온다. 연극 무대를 본떠 만든 시라노 에이전시의 사무실. 비현실적인 무대 조명과 세팅 역시 남이 개입한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사랑과 그 통제를 벗어난 진짜 사랑의 구별을 묻기 위한 일종의 장치다. 그럼에도 대행을 해준 쪽이 진정한 사랑이고, 전면에 나선 사람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극히 고전적인 결론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순수한 진심은 통한다는 순애보적인 사랑을 칭송한다. 그간 김현석 감독이 보여주고자 했던 사랑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낯익은 결론이다.
과거의 사랑에 기반한 플래시백을 선호하는 김현석 감독의 시점은 이번 작품에서도 유효한 사랑 방식이다. 그러나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사랑에 관한 무조건적인 판타지에서 한발 떨어진 시선을 견지한다. 덕분에 좀 숙맥 같고 덜 성숙한 남자들의 사랑이 단선적으로 규격화되는 대신, 재고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전작과 비교해볼 때 다소 건조해진 기운은 김현석 감독의 멜로가 스스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야구로 따지자면,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멜로영화의 구원타로 기록될 공로자다.
멜로 장르에서 시라노가 사랑받은 까닭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1897년 파리에서 초연돼 화제를 모은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이다. 시라노 백작은 17세기 실존 인물로, 문학과 검술에 뛰어나지만, ‘코가 몸보다 먼저 나간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로 큰 코를 가진 추남이었다. 8촌 여동생 록산느를 사랑하지만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고백을 못하고 괴로워한다. 그러던 중 잘생긴 외모의 직속부하 크리스티앙이 록산느를 사랑하게 되면서, 시라노는 문학적 재능이 없는 그를 위해 대필 연애편지를 써주기 시작한다. 비록 대신이지만, 록산느를 향한 진심의 세레나데를 쓰며 그녀에 대한 사랑도 점점 깊어져 간다. 시라노의 사랑은 크리스티앙의 불의의 전사 이후에도 장장 15년간이나 지속됐다. 안타까운 시라노의 러브 스토리는 스크린의 단골 소재가 됐다. 가장 많이 알려진 버전은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시라노로, 뱅상 파레가 미남 청년 크리스티앙을 연기한 <시라노>(1990)다.
직접적으로 시라노 스토리가 아니더라도 시라노 텍스트가 멜로 장르에 끼친 영향은 크다. <고양이와 개에 관한 진실> <낯선 여인으로부터의 편지> 등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고백을 해야 하는 안타까운 사연은 시라노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넓게 보자면 히어로물의 로맨스 라인 역시 시라노의 구조를 차용한다. 엠제이를 사랑하지만 소심한 평범남 피터일 때는 고백 한번 못하다가, 스파이더맨의 비범함을 가지고서야 키스를 구할 수 있는 예. 결국 대행업자와 의로인이라는 구조 속에서 시라노는 진정한 사랑,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지에 관한 핵심을 묻고 있다. 시라노 텍스트가 시대를 초월해 회자되는 이유도, 사랑의 본질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어려운 텍스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