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정체성을 찾아가는 도시의 매력
2011-07-28
글·사진 : 김도훈
<언노운>의 베를린

겨울 베를린은 익숙했다. 베를린영화제로 출장을 갈 때마다 나는 동구권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액션영화를 머릿속에 그렸다. 겨울의 베를린은 춥고 을씨년스럽다. 지하철역에서는 제이슨 본이 튀어나오고, 작은 공원에서는 한나와 마리사 위글러가 총을 들고 서로를 쫓을 것 같은 도시다(실제로 두 영화는 베를린을 결정적인 무대로 활용한다). 그런데 오랫동안 ‘외신기자클럽’에 기고해 온 평론가 데릭 엘리가 말했다. “여름의 베를린은 완전히 다른 도시야. 완전히.” 뭐가 그렇게 다르려고? 그러다가 안젤리나 졸리와 톰 크루즈가 베를린에 집을 샀다는 기사를 읽었다. 내가 여름의 베를린으로 향한 건 오로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였다. 궁금증이 많은 인간의 삶이란 이렇게도 돈이 많이 드는 법이다.

여름의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해답을 찾았다. 베를린은 괴상한 도시다. 원래 이 도시는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서베를린은 동독의 한가운데에 섬처럼 박혀 있었고, 동베를린은 담 너머 자본주의 쌍둥이 형제를 두눈으로 지켜보며 살았다. 그런 도시가 하루아침에 하나가 됐다. 그리고 모든 것은 둘이 됐다. 더 많은 박물관, 더 많은 빈집, 더 많은 거리와 더 많은 사람들. 베를린은 더이상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온 그 도시가 아니다. 서베를린의 중심가 쿠담은 빛을 잃었고, 동베를린의 중심인 미테는 통합 베를린의 중심이 됐다. 프리드리히스하인, 크로이츠베르크, 노이퀼른 등 수많은 새로운 동네들이 매년 새롭게 베를린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어지고 있다. 빈집이 많고 물가가 저렴한데다 특유의 데카당스한 분위기 덕분에 전세계의 예술가들이 매년 베를린으로 몰려든다. 나는 세상에서 이처럼 젊은이가 많은 유럽 도시를 본 적이 없다. 지금 베를린은 60년대의 ‘흥청거리는 런던’에 가까운 도시다.

밤새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떠들고 춤추고 웃는 베를린을 떠나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언노운>을 봤다. 리암 니슨 주연의 이 액션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베를린에서 촬영됐다. 만약 오스카에 ‘로케이션상’이 생긴다면 <언노운>에 수여함이 마땅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서서히 발견해가는 주인공에게 어울리는 도시로 이제야 정체성을 찾아가는 베를린만큼 어울리는 장소가 또 있겠는가. 어쩌면 베를린은 유럽이라는 오래된 대륙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새로운 도시일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의 운명은 뻔하다. 언젠가는 베를린 역시 런던과 파리처럼 비싸고 세련되고 우아하고, 그 때문에 고루해질 것이다. 만약 당신이 베를린으로 가고 싶다면 그건 바로 지금이어야만 한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