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거짓말처럼 한결같은
2011-07-28
글·사진 : 백은하 (10아시아 기자)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후지산

남자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정확한 시간표 아래 한번도 정해진 트랙을 벗어난 적 없는 독일 기차 같은 삶을. 그러나 아내가 죽고 그녀의 흔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남자는 통렬하게 깨닫는다. 기계적 순환 속에 한번도 정차해 살핀 적 없는 아내를 둘러싼 진짜 풍경을. 부토 댄서가 되고 싶은 꿈을 누르고 독일 바닷가에서 마지막 숨을 내쉰 그 여자의 진짜 꿈을. 결국 뒤늦은 탈선을 감행한 이 낡은 독일 기차가 향하는 곳은 바로 일본의 ‘후지산’이다. 남자는 후지산 아래 호수에서 생의 마지막 춤을 춘다. 어느덧 떠난 아내의 영혼도 조용히 남자의 손을 잡는다.

도리스 되리 감독의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은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에 부치는 독일어로 쓰여진 연서다. 그 러브레터를 읽고 나는 또 얼마나 울었던가. 2009년 봄. 일견 평온해 보였지만 결코 평온할 수 없었던 삶, 좌초 직전의 나는 그렇게 이 영화를 만났고 눈물을 닦은 뒤 당장 도쿄행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그리고 영화의 독일어 원제까지 확인해가며 열심히 구글링을 한 끝에 그 남자가 마지막 묵었던, 창문으로 후지산이 보이던 그 료칸의 정보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도쿄 신주쿠 고속터미널에서 후지큐 하이랜드행 버스를 타고 가와구치호역에 내리면 찾아갈 수 있는 온천여관 ‘마루야소’(www.maruyaso.jp). 그곳은 흔히 생각하는 노천탕이 있는 일본식 고급 료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마치 가까운 친구 집에 놀러간 것 같은 소박한 따뜻함이 배어 있는 곳이었다. 영화를 보고 이곳을 찾았다고 말하자 주인 아저씨는 “예약된 방이지만 잠깐 구경만 하시지요”라며 촬영이 이루어졌던 작은 다다미 방을 보여주었고, 아주머니는 영화가 독일에서 흥행을 한 덕분인지 독일 손님들이 많이 찾는다며 수줍은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정성스럽게 준비된 저녁을 먹고 뜨겁게 온천을 하고 난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푹 잠을 잤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내 눈앞에는 거짓말처럼 그가 서 있었다. 후. 지. 산. 영화에서 “너무 부끄럼이 많아서 얼굴을 잘 보여주지 않아요”라고 설명하던 그 봉우리. 그렇게 후지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나는 한참을 이불 속에서 앉아 있었다. 월화수목금토일. 또 월화수목금토일.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탈선의 유혹을 느끼는 순간이면, 나는 언제나 후지산을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 봄날의 아침, 료칸의 창문 너머 보이던 머리가 하얗던 그 봉우리와 그 아래서 춤을 추던 노인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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