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TGV를 타고 네 시간여, 툴롱이라는 항구도시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차를 렌트해 40분 정도 동쪽으로 달리면 봄레미모자라는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 펼쳐진다. 해마다 2월이면 샛노란 솜털 모양의 꽃으로 홍수를 이루는 곳. 그러다 봄이 되면 700여종의 꽃들이 온 거리와 건물을 뒤덮어 꽃을 밟지 않고는 한 걸음도 옮길 수 없다는 그림 같은 마을. 영화의 도시 칸에서 멀지 않은 그곳이야말로 영화에나 나올 듯한 곳이다. 하지만 난 거기서 멈추지 않고 봄레미모자와 맞닿은 해안가로 달려가 부둣가에 정박되어 있는 작은 페리에 몸을 싣는다. 배가 푸른 물살을 가르며 남쪽을 향해 달려나간 지 이십분 남짓, 꿈에서조차 만나기 힘든 신비로운 섬이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 <그랑 블루>의 촬영지였다는 포트 크로 섬은 프랑스 남부 해안인 코트 다쥐르 남단에 박혀 있는 금의 제도 중 하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물속에 머리를 박고 등만 밖으로 낸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다. 그 안을 파고들면 수십종의 희귀 야생식물로 빈틈없는 숲과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이 훤히 보일 정도의 맑은 바닷물까지 천혜의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보물섬. 페리가 섬을 향해 가까워질수록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사진을 찍어대던 관광객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배낭을 둘러메고 등산화를 신은 젊은 남녀, 아이 하나는 업고 한 아이는 품에 안은 슈퍼 맘들, 어린 손자의 손을 잡고 소풍을 온 듯한 멋쟁이 노부부. 그들은 모두가 각자의 마음 속도에 맞추어 아름답고 신비로운 섬의 곳곳을 자유로이 떠돌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들처럼 길게 줄기를 늘어뜨린 꽃들로 가득한 오솔길을 따라 남쪽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키 높은 갈대가 끝없이 이어진 좁은 길을 벗어나자 문득 밀가루처럼 곱고 흰 모래사장이 눈앞에 펼쳐지고, 경계도 없이 자연스레 이어진 푸른 바다와 수평선은 헉,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첫 소설 <누가 미모자를 그렸나>를 쓰느라 글과의 사투를 벌이며 시들시들 지쳐가던 때, 나는 그곳에서 영화 <그랑 블루>의 주인공인 자크처럼 바다로부터 큰 위로를 받았다. 그리하여 내 소설의 주인공이 오랜 시간 가슴에 품고 있던 응어리를 풀어내는 장소로 선택한 포트 크로 섬. 그곳에선 어느 누구라도 <그랑 블루>에 등장하는 돌고래처럼 태초의 발가벗은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삶에 물든 고민과 때와 번민을 모두 벗어버리고 싶다는 욕망을 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다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한 방울 치유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어디론가 사라졌던 사람들이 하나둘 눈앞에 나타나더니, 모래사장 위에다 입었던 옷들을 훌훌 벗어버리고 바닷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한동안 어린아이처럼 물속에서 웃던 그들은 언제 그랬냐 싶게 다시 옷들을 갖춰 입었고, 바다에서 위안을 받은 얼굴은 눈부시게 빛났다. 여행이, 그리고 아름다운 장소가 주는 축복을 듬뿍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