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남쪽의 남반구에서도 많이 남쪽에 있는 ‘모레노’라는 이름의 빙하를 둘러본 뒤, 이제 슬슬 위로 올라갈까 싶어 작은 버스터미널로 갔을 때, 구석 매표창구에 ‘RUTA40’이라고 적힌 A4용지가 나부끼는 것을 발견한 건 라식수술로 확보한 2.0의 시력 덕분이었다. 세상에, 루타40이라면 바로 그(!) 체 게바라가 젊은 시절 모터사이클을 타고 달렸다는 길 아니던가! 나는 곧바로 한때 꿈속의 연인이었던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먼지를 풀풀 날리며 길을 달리던 장면을 떠올렸고, ‘30 HOUR Non Stop’이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성지 순례객이나 된 기분으로 버스에 올라타고 말았다. 버스에는 아마도 나와 비슷한 기대감을 가지고 표를 끊었을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눈을 빛내며 앉아 있었다. 혁명보다는 낭만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체 게바라지만 여전히 젊은이들에게 신화적 존재인 건 틀림없는 모양이다.
과연 루타40은 험했다. 움푹움푹 패긴 했지만 그래도 아스팔트가 깔려 있던 도로는 잠깐, 자갈들이 널린 비포장도로가 펼쳐지면서 버스는 연방 요동쳤다. 창밖의 풍경 역시 험했다. 황량한 풍경이 잠시 초목으로 바뀌다가 비옥한 농장이 나오다가 산을 하나 통과했다가 다시 황량한 풍경으로 바뀌기를 무한 반복하고 있었다. 버스 자체도 험했다. 에어컨 고장으로 버스 안의 온도는 점점 올라가고, 땀으로 등이 축축하게 젖어왔다. 모험을 기대하며 들떠 있던 여행자들은 기름진 머리와 퀭한 눈으로 더부룩한 배를 끌어안고 멍하니 창밖만을 바라봤다. 대지에 어김없이 아름다운 황혼이 내릴 때, 버스는 잠시 활기를 되찾는가 싶었지만 이내 모든 사람들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시 아침. 21시간째 버스는 달리고 있었고, 길은 여전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내가 왜 ‘30HOUR Non Stop’의 경고를 무시했을까 후회하며 온몸의 뼈를 으드득 으드득 다시 맞추고 있을 때, 앞 좌석에서부터 환호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루타40의 풍경 속에 낯선 그림자가 끼어든다. 게바라의 모터사이클보다 더 무모해 보이는 두대의 자전거. 두건을 쓴 남자가 힘차게 페달을 밟고 있는 앞 자전거엔 양쪽으로 짐이 잔뜩 실려 있다. 그리고 뒤따르는 여자의 자전거엔 작은 트레일러가 달려 있고, 그 안엔 세살쯤 되어 보이는 아기가 누워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버스의 여행자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모두가 자전거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어댔다. 떡진 머리를 하고는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다들 처음 버스에 올랐던 순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역시 루타40이다. 게바라에겐 깨달음을, 여행자들에겐 인내의 엉덩이를, 부부에겐 도전을, 아기에겐 생고생을 선물하는 젊고 거친 길. 석양이 아무래도 이 버스 안에 한번은 더 내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