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을 여행지로 각인하는 건 쉽지 않다. 야시장이 유명하다고 하지만, 부러 화려한 홍콩의 밤거리를 등지고 찾을 정도로 특별한 인상을 준다면 그건 순전히 거짓일 테다. 대만에 대한 내 이미지는 그러니 온전히 허우샤오시엔 영화에 빚을 지고 있었다. <동동의 여름방학>에 나오는 80년대 유원지를 꼭 빼닮은 버드나무 아래의 평상. <연연풍진>의 잿빛 탄광촌의 퇴색된 철길. 어느 하나 현재와 맞닿은 풍경은 아니다. 대만의 곳곳은 스크린을 벗어나 마치 기억을 지배하는 과거의 거리처럼 인식됐다. 대만을 직접 맞딱드리겠다는 결심은 아주 이후에나 찾아왔다. 어느 날인가 <비정성시>를 다시 보는데, 그곳의 현재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일전에 허우샤오시엔의 눈으로 불리던 촬영감독 마크 리 핑빙을 인터뷰할 때 그가 “감독님이 항상 촬영 장소에 새벽녘에 도착해 그곳에서 느낀 감흥들로 ‘즉석콘티’를 만드는 바람에 모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했던 말도 떠올랐다. 대만에서 나고 자라, 그 풍광 속에 대만 사람들의 아픔을 담아낸 허우샤오시엔. <비정성시>의 거리에 그의 시선이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것 같았다.
촬영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서 교외선을 타고 한 시간 남짓 루이팡이라는 이름의 역으로 가, ‘주펀’행 버스를 타면 된다.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있으면 창밖으로 보이는 시야 전체가 바다가 된다. 영화 속 ‘관미’가 처음 이곳에 와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자주 보게 돼서 좋았다”던 말이 대사가 아닌 오롯이 내 감상만 같았다. 버스를 내려 인파가 가득한 좁은 계단, ‘수치루’를 올랐다. 영화 속 일제치하, 젊은 지식인들이 목놓아 시대를 탄식했던 선술집이 있던 거리.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상점으로 바뀌었지만, 과거를 유추할 지형은 남아 있었다. 격변 속에 형제를 모두 잃은 청각장애인 ‘문청’(양조위)이 일했던 사진관 역시 ‘아미차관’이란 찻집으로 개조되어 운영 중이었다. 그렇게라도 이곳에 들어갈 수 있어 참 다행이다 싶었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차를 주문하니 문청의 시선이 오롯이 전달된다. 느리고 꼼꼼하게 사진을 수정하던 문청의 손동작, 그리고 그의 시선 끝 아픈 시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펼쳐져 있던 광활한 바다. 제 동포를 죽이는 총소리조차 듣지 못했던 문청은 주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허우샤오시엔의 가장 깨끗한 렌즈였는지도 모른다. 밖을 나오니 아미차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연연풍진>의 대형 패널이 걸려 있다. 반나절 동안의 수치루 산책, 대만은 또 그렇게 스크린의 현재로써,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