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대 감독들에 대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얼핏 보기에 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닌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90년대 영퀴방 시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때만 해도 통신망 채팅실에 빼곡하게 모인 사람들 앞에서 “아, 난 스필버그를 좋아해요”라고 가볍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귀찮은 일이었는지 아시는지? 일단 이런 식으로 커밍아웃을 하면 어떻게 감히 대자본 블록버스터라는 흉기로 위장한 할리우드 제국주의의 선봉장을 좋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영화광을 만나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방의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영퀴할 맘도 사라져버린다.
스필버그의 이런 이미지가 사실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설명하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물론 스필버그는 블록버스터영화의 시조이다. 최초로 흥행수익 1억달러를 돌파한 <죠스>의 감독이니까. 그는 친구인 조지 루카스와 함께 특수효과를 동원한 오락영화의 포문을 열었다. 역시 사실이다. 그가 지극히 미국적이며 할리우드적인 감독인 것도 사실이다. 스필버그를 진지하게 옹호하는 것은 스코시즈를 옹호하는 것보다 어렵다. 그러기에 그는 돈을 너무 많이 벌고 흥행성공작이 지나치게 많으며 영화들은 편리할 정도로 쉽고 직설적이다. 그는 기질적으로 감정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멜로드라마 감독이고 그의 영화들은 비평가와 관객 모두에게 열려 있다.
그의 영화 중 반 이상은 시대물/역사물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만든 영화들의 상당수가, 우리가 생각하는 블록버스터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라. 21세기에 들어서기 전까지 그가 만든 영화들은 대부분 대작과 거리가 멀었다. 그는 스타들을 많이 쓰지 않았고,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영화도 자주 만들지 않았으며, 특수효과를 대하는 태도도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다. 심지어 그가 시네마스코프 비율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그가 제작에 참여했던 앰블린 영화들 역시 대자본을 들인 대작과 거리가 멀었다. <그렘린> <백 투더 퓨처> 시리즈나 <구니스>는 당시 할리우드 기준으로 보아도 오히려 소품에 속한다.
스필버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그의 작품들은 예상외로 소박하다. 물론 수익은 엄청나다. 하지만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여름 블록버스터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89년에도 그는 1억달러를 넘게 벌어들인 네 영화 중 한편을 만든 감독에 불과했으며, 심지어 거기서도 1위가 아니었다. 그 뒤에 이어진 대자본 블록버스터의 경쟁에서도 그는 늘 조금씩 벗어나 있었다. 그 뒤 10년 동안 그가 만든 영화 중 블록버스터에 해당되는 건 <쥬라기 공원> 시리즈의 두편밖에 없다. 물론 그 작품도 89년 이후 이어진 대자본 영화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그가 할리우드에 끼친 영향도 종종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과 그리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가 지난 십여년 동안 할리우드에 끼친 가장 노골적이고 분명한 영향은 홀로코스트와 제2차 세계대전, 기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영화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쉰들러 리스트>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이후 만들어진 홀로코스트와 2차 세계대전 영화들은 모두 스필버그의 영향 아래 있다. 수많은 밀리터리 마니아들은 21세기 들어 스필버그가 이룩한 최고의 업적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퍼시픽>의 제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주도해서 만든 시대물/역사물의 숫자는 그가 만든 SF/판타지영화와 비슷하거나 많으며 앞으로 개봉될 세편의 영화 모두가 20세기나 19세기를 무대로 한 시대물이다.
SF와 판타지도 ‘드라마의 창조’가 핵심
그가 만든 SF영화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역시 방향을 주목하라. <미지와의 조우>와 같은 영화들을 보고 할리우드에서 일하겠다고 결심했다는 제임스 카메론은 할리우드 SF 장르의 선봉장이다. 하지만 <어비스>나 <아바타>에서 볼 수 있듯, 그가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모방하고 받아들인 것은 거대자본으로 부풀린 스펙터클이 아니라 SF의 정서적인 측면이다. 카메론은 스필버그 영화의 핵심이 특수효과를 이용한 스펙터클의 제조가 아니라 그를 통한 드라마의 창조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스필버그의 작품들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은 젊은 감독들은 스필버그와의 만남을 보다 개인적으로 받아들인다. 올해 초에 나온 J. J. 에이브럼스의 <슈퍼 에이트>는 당시 스필버그 영화와 그가 이끌었던 앰블린 제작 영화들이 그 영화를 보고 자란 아이들에게 어떤 기억을 남기고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들에게 스필버그의 영화들은 거대자본을 들인 불꽃놀이가 아니었다. 그는 그들이 추구하고 도달할 수 있는 영화적 꿈을 만드는 사람이었고, 그 영화를 통해 그들의 틴에이저 감수성과 완벽하게 채널링할 수 있는 어른이었다. 그들은 스필버그의 영화들을 보면서 SF와 판타지가 얼마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배웠다. 어린 시절 <E.T.>를 본 70년대생 아이들이 어떻게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현대 할리우드에서 가장 놀랍고 이상한 점은, 사람들이 절대시하고 절대악처럼 대했던 스필버그의 영향이 생각만큼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스필버그의 후배들이라고 생각하는 90년대 이후 할리우드 SF 블록버스터들은 오히려 대부분 안티 스필버그 영화들이다. 그들은 스필버그의 영화들과는 달리 제작비를 초과하고, 오로지 스펙터클을 위한 스펙터클을 추구하며, 아이디어들은 경영학 전공 CEO들이 허락한 공산품이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90년대 영화들을 보라. 그는 외계인과 공룡이라는 스필버그의 영역에서 영화를 만들었지만 거의 모든 것이 스필버그와 반대이다. 에머리히뿐만 아니라 대부분 여름에 개봉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대작들에는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거의 수줍기까지 한 개인적인 분위기와 경의의 느낌이 제거되어 있다. 21세기의 처음 10년을 보낸 우리에게 스필버그는 치워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여전히 진지하게 모방해야 할 모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