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우울증의 변이들
2014-01-21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변호인> vs. <26년>
<26년>

<26년>을 말할 때 분노라는 정서는 거의 피해가기 어렵다. <26년>에서 전두환을 모델로 하여 ‘그 사람’을 연기한 배우 장광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것을(나는 잘못한 게 없다는 그 태도를) 끝까지 밀어붙여야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들의 분노의 감정들이 살아날 거라고 봤다.” 유사하게도 <변호인>을 말할 때는 슬픔이라는 정서를 거의 피해가지 못한다. 일명 트위터 대통령으로 불리는 작가 이외수는 <변호인>을 본 다음 “내가 저토록 어두운 세월을 건너 여기까지 왔구나. 세상은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정의는 지금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 <변호인>을 보면서 몇번이나 흐르는 눈물을 닦아야 했습니다”라고 감상평을 남겼다.

만약 누군가가 영화의 만듦새를 두고 <26년>보다 <변호인>이 훨씬 뛰어나다고 말한다면 동의하지 못하겠다. 반대로 <26년>이 <변호인>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평가가 있다면 역시 동의하지 못하겠다. <26년>과 <변호인>은 영화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어떤 가시적 지향에서 비교 대상이다.

먼저 몇 가지 차이가 있다. <26년>은 실화에 입각했다는 점을 구태여 강조하지만 <변호인>은 허구가 더 중요하다고 유도한다. 그 때문에 <26년>의 광주는 불편한 역사적 장소로 기어이 호명되지만 <변호인>의 부산은 단지 배경으로 일반화된다. 이걸 두고 한쪽은 직시의 우직함을 또 한쪽은 우회의 영리함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는 그와 반대로 둘 모두를 결함으로 지적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쨌거나 그 우직함이 전두환에 대한 판결을, 그 영리함이 노무현에 대한 환기를 겨냥하고 있다는 건 세상에 알려진 그대로다.

하지만 정작 차이만큼 중요한 건 두 영화 모두 같은 나무에서 뻗어나온 가지라는 사실이다. <26년>의 분노와 <변호인>의 슬픔은 왜 일어난 것일까. 그것이 어떤 공통의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 일어난 개별의 반응이라고 우리는 가정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공통의 실패란, 애도의 실패라는 가설을 갖고 있다. 망자를 떠나보내는 정상적인 애도 작업에 결국 실패한 이들, 그들이 빠지는 병리적 증상이 우울증이라고들 하는데, 우리는 지금 분노와 슬픔이 가득한 영화적 우울증의 시대를 앓고 있다. 그 증상이 악인(전두환)을 처단하려는 복수극의 실패기와 영웅(노무현)이 탄생하는 성장극의 탄생기라는 대중적 이야기를 경유하게 된 것뿐이다.

이 애도의 실패가, 이 우울증이, 비교적 근접한 시일을 두고, 한번은 영화 안에서 등장인물들의 전개 행위로, 또 한번은 영화 바깥에서 관객의 수용 행위로 반영된 것이 <26년>과 <변호인>이다. 예컨대 <26년>에서 ‘그 사람’을 암살하기 위해 자신들의 남은 삶을 송두리째 포기하고 모여든 주인공들의 행위는 과연 정상인가. 그럼에도 80년 광주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부모 형제를 내내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한 불우한 역사적 애도 실패의 경험이 결국 그들을 모이게 했다.

그렇다면 공히 예상되는 <변호인> 관객 천만 행보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자체가 바로 노무현에 대한 성대한 애도의 증거가 아니냐고 다그친다 해도, 거기 수긍하기란 망설여진다. <변호인>의 수많은 관객이 노무현의 잔영 아래 넘쳐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실상 그 인파는 그 자체로 완전한 애도의 물결이기 보다, 지금껏 진정한 애도의 기회가 무산되어온 것처럼 여전히 얼마간은 더 실패할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과 호기심이 일으킨 우울증적 물결에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26년>과 <변호인>은 전두환을 단죄하자거나 노무현을 환기시키는 과격한 선언과 은근한 은유를 넘어서, 그들이 의도치 않았던 예상 밖의 지점에서 불현듯 가치를 엿보인다. 그 예상 밖의 가치란, 이 두편의 영화가 우리의 사회병리적 우울증의 지독한 증상을 안팎으로 몸소 앓고 있는 대중영화라는 사실이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