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의 한국 영화계를 전망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사회참여’ 영화다. 이른바 ‘실존인물’ 혹은 ‘불편한 진실’을 다룬 영화들이 흥행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는 공식은 옛이야기가 됐다. 무엇보다 영화 그 자체보다 투자배급 환경과 시스템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박찬욱 감독은 여러 차례 인혁당 사건의 영화화를 구체적으로 준비했지만 성사되지 못했고, 임순례 감독 또한 백범 김구 선생을 시해한 암살범 안두희를 정의봉(正義棒)으로 응징한 박기서 선생에 대한 영화를 꿈꿨지만 역시 미완으로 남았다.
지난 2005년 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씨가 ‘영화가 박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임상수 감독의 <그 때 그사람들>(2004)에 대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며 시작된 재판이 3년여 만에 재판부의 조정판결로 종결된 사건은 무척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것이다. 서울고등법원 제14민사부는 극장에서 상영 시 영화 자막에 “이 영화는 역사의 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고, 대부분의 세부사항과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모두 픽션인 것을 밝히라”고 판결했던 것. 애초 자막의 수정안에 ‘상상력’ 등의 단어가 추가 삽입되어 영화가 픽션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조정됐고, 재판부는 또 제작사쪽에 영화 속 등장인물과 관련된 분들과 가족들에게 상처를 준 점에 대해 유감을 표하는 보도자료를 배포할 것을 판결문에 명시했다. <그 때 그사람들>이 겪었던 당시의 그 ‘피로’는 한국 영화계에서 현실과의 접점이 큰 영화들이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고난의 운명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후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2011)과 <남영동1985>(2012), 그리고 <도가니>(2011)와 <26년>(2012)처럼 민감한 사회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 영화들이 대중적, 비평적으로 큰 호응을 얻은 것, 그리고 그 모두를 수렴한 것 같은 <변호인>의 엄청난 성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령 <변호인>은 <부러진 화살>의 법정 장면과 <남영동1985>의 고문실 장면의 대승적인 결합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며, <도가니>에서 극악무도한 교장선생으로 출연한 배우 장광은 <26년>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그 사람’으로 출연했다. 특히 이른바 ‘국민배우’라 불리는 두 배우 안성기와 송강호가 각각 <부러진 화살>과 <변호인>의 법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대중적 설득력’이라는 측면에서 거의 거울처럼 닮았다. 말하자면 이들 영화 사이의 기저에는 우리가 생각한 그 이상의 미묘한 기류가 소통하고 있을 것이다. <부러진 화살>의 성공 이후 정지영 감독을 비롯한 <부러진 화살> 제작진은 ‘영화 <26년> 제작 마중물 프로젝트 대국민 크라우드 펀딩’에 1천만원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지나 <변호인>에 이르기까지 지금 대중은 픽션 안에서 현실의 코드를 읽어내는 것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때 그사람들>을 제작하고 <부러진 화살>의 제작지원과 마케팅을 맡기도 했던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변호인>의 성공에 대해 “영화 그 자체를 넘어 현재의 시대 상황과 분위기 속에서 긴밀하게 얘기돼야 할 흥행이다. 아무래도 대중이 보다 쉽게 접하는 예술매체가 영화라면, 그것이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됐다”고 말한다. 현재 명필름은 대형마트의 계약직 직원들이 부당한 해고에 맞서는 내용의 <카트>를 제작 중으로, 지난 1월11일 크랭크인과 동시에 ‘펀딩21’(www.funding21.com)을 통해 제작비 조달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한다. <카트>의 부지영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936호)를 통해 “하루아침에 해고 대상자가 되어버린, 조직되지 않은 ‘아줌마’들이 매장을 점거하고 벌이는 생존의 파업 투쟁을 계기로, 각성하고 잊고 있던 자아를 드러내는 지점을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변호인>의 성공을 통해 새삼 주목받고 있는 영화들로 ‘올해의 라인업’은 더 있다. 먼저 2월6일 개봉하는 김태윤 감독의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반도체 근무 중 꽃다운 나이에 백혈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고 황유미씨에 대한 산재 인정 판결이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황유미씨는 병마와 싸우다 병원에 가던 중 아버지 황상기씨의 택시 뒷좌석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황상기씨는 주위의 만류와 회유에도 기나긴 싸움을 시작해 6년 만인 2011년 6월 산재 인정 판결을 받았다. 민감한 소재로 인해 제작과정이 순탄하지 못했지만 좋은 뜻에 공감한 개인 투자자들과 1만 두레회원들의 힘으로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배우 박철민이 황상기씨를 모델로 한 택시기사 ‘상구’를 연기한다.
용산참사를 모티브로 한 <소수의견>과 <시사IN> 주진우 기자를 소재로 한 <주기자>
이어 2월 중순 개봉예정인 김광식 감독의 <찌라시: 위험한 소문>은 증권가 정보지, 이른바 ‘찌라시’의 근원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증권가 찌라시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열혈매니저 우곤(김강우)과 대한민국을 뒤흔들어온 음모론의 출처를 파헤치기 위해 모여든 스페셜리스트들이 그 소문의 제조와 유통까지 추적한다. 데뷔작 <내 깡패 같은 애인>(2010)을 만들며 ‘88만원 세대’라는 화두를 던졌던 김광식 감독은 오랜 기간 그 ‘소문’들을 채집했다. 한편, <찌라시: 위험한 소문>을 제작한 ‘영화사 수박’은 최근 황우석 박사를 소재로 한 ‘한국판 <인사이더>’ <제보자>를 크랭크인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이후 임순례 감독과 배우 박해일의 해후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제보자>는 줄기세포 논문 조작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자 동분서주하는 한 방송국 PD 윤민철(박해일)의 이야기를 긴박감 넘치게 그린다. <이태원 살인사건>(2009), <특수본>(2011)에 이어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두편의 영화를 연달아 제작 중인 영화사 수박의 신범수 대표는 “논란이 예상되는 영화라 제작과 개봉상의 법적 문제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있으며, 빨리 만들어 상반기 중 공개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거의 제작이 완료된 상태에서 ‘보류’ 중인 작품도 있다. 용산참사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손아람 작가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김성제 감독의 <소수의견>이 그것이다. 강제 철거 현장에서 죽은 16살 소년의 아버지가 진압 중 사망한 20살 의경의 살인자로 체포된 뒤, 사건을 은폐하려는 국가권력과 변호인팀의 진실 공방을 그린다. 윤계상이 법정 투쟁을 시작하는 국선 변호인 ‘진원’, 유해진은 진원을 돕는 선배 변호사 ‘대석’ , 김옥빈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사회부 기자 ‘수경’ 역을 맡았다. 이경영과 장광은 각각 아들을 잃고 의경을 살해하는 아버지 박재호와 현장에서 사망한 의경의 아버지를 상반된 자리에서 연기한다. 지난해 6월 촬영을 종료하고 개봉을 위한 거의 모든 작업이 끝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전히 CJ엔터테인먼트의 상반기 배급 라인업에서 빠져 있어 궁금증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특수본>을 만든 황병국 감독은 현재 노마드 필름에서 차승재 대표와 함께 <주기자>를 개발 중이다. <시사IN>의 주진우 기자를 소재로 한 영화로 주진우 기자에게 영화 제목을 <주기자>로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으며, 최종 시나리오 완성 막바지 단계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보자>만큼 실존인물과 사건에 대한 묘사가 많은 만큼 황병국 감독은 “시나리오 완성 이후라야 그 방향성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라며 말을 아꼈다. ‘시사활극’이라는 표현이 붙었던 주진우 기자의 심층적 취재기 <주기자> 속 주기자에 대해 “거의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하드보일드 탐정 필립 말로우를 떠올렸다”라는 평가도 있는 것을 보면 과연 어떤 매력적인 캐릭터가 만들어질지 큰 호기심을 자아낸다.
최근 이런 사회참여적 영화들의 잇단 제작 현상에 대해 <26년>을 제작한 청어람 최용배 대표는 “한동안 ‘이런’ 영화들을 만드는 데 있어 영화인들이 알게 모르게 위축돼왔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변호인>의 부러운 성공을 보면서 ‘우리 영화인들이 만들고 싶어 하는 그 무엇이든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도대체 뭐가 불편하다는 거지?’라며 오히려 반문하게 되는 은근한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며 “한편으로 더 나아가서, 공격당하는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굳이 일부러 ‘그분의 이야기가 아니다’ 혹은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식의 수세적인 태도도 보다 당당하게 바뀔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라고 덧붙였다. 여느 해보다 2014년의 한국 영화계가 특별하다고 여겨지는 단 하나의 이유를 바로 이 라인업에서 감지한다면 지나친 얘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