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국가 대신 국민을 위해
2014-01-21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변호인> vs. <화려한 휴가>
<화려한 휴가>

이 영화에 열광하는 관객에게 노무현은 <변호인> 시절의 노무현과 자살로 생을 마감한 노무현, 정의로운 탄생과 비장한 끝, 이렇게 두 이미지의 작용으로 완성되는 것 같다. 적어도 <변호인>을 보는 동안, 그들에게 노무현의 대통령 재임기간을 포함한 지난 30여년의 대한민국, 정치인 노무현의 행로, 그리고 우리의 때묻은 시간은 망각 속에 있다. 그 망각 속에서, 그러니까 각자의 위장된 기억 속에서 관객이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것은 한때 우리에게는 영웅이 있었고, 그 영웅이 상징하던 가치가 있었으나, 그 영웅도, 가치도 빼앗겼다는 향수와 상실감이다. 실은 온전히 가져본 적도 없으나 잃었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대한 그 감정은 지금 우리의 참혹한 현실과 무력감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 그 반응이 딱히 이례적이라거나 정치적인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난 한국의 대중정치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이 영화가 관객에게 호소하는 방식에는 좀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

<변호인>의 가장 인상적인 대사를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송우석의 강변으로 꼽는 이들이 많다. 이미 지난 정권부터 애국가보다 더 강력하게 거리에 울려퍼지던 이 말이 새삼 충격적이지는 않다. 그보다는 이 말이 인권변호사 송우석, 아니 노무현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이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그간 한국의 현대사를 다룬 대중정치영화에서 대개의 경우 화두는 국가라는 무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를테면 노무현의 대통령 재임기간 중 제작되었고 <변호인>과 거의 유사한 시대적 배경에 놓인 <화려한 휴가>를 떠올려보자. 광주항쟁을 전면에 내세운 이 영화에서 시민들은 “광주시민 만세”와 “대한민국 만세”를 함께 외친다.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동안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던 시민군들은 무참히 학살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신애가 “우리를 기억해주세요”라고 절절하게 울부짖을 때, 그 말은 저들을 폭도가 아니라 애국자로 기억해달라는 호소처럼 들린다. 적어도 영화 맥락상으로는 그렇게 느껴진다. 광주항쟁은 대한민국 역사상 개별 시민의 구체적인 저항이 가장 격렬했던 현장이었지만, <화려한 휴가>는 국가라는 추상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 혹은 시민군의 저항을 국가적 맥락으로 축소시킨다.

<변호인>에는 차이가 있다. 이 영화에서 국가라는 단어를 행동의 근거로 삼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비논리적인 사악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 캐릭터들이 지나치게 평면적인 악으로 묘사되며 우리 안의 모순을 대신 짊어진다는 점은 분명 영화적 한계지만, 영화가 그 한계를 무릅쓰고 방점을 국가에서 국민으로 이동시켰다는 점은 생각해볼 만하다. <변호인>은 더이상 국가에 호소하지 않으며, 애국에서 국민의 권리로 추의 중심을 옮긴다. 그 추를 옮긴 주인공이 지금은 세상을 떠났으며 한때 우리와 별 다를 바 없었던 국민 노무현이라는 사실에 대중의 감흥이 배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 감흥을 위해서는 대통령이 된 뒤의 그를 잊어야 한다. 즉 이 영화를 지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 기만적이 되어야 한다. 요컨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판사가 송우석을 변호하기 위해 모인 변호인들을 호명할 때, 영화는 우리의 자리 역시 그 방청석에 마련해둔다. 국가로부터 국민의 권리를 지키려는 자를 국민의 이름으로 지키는 자리. 우리 역시 그 부름에 응답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 심정적 동요에는 얼룩이 있다. 우리는 그 응답과 변호가 미래의 현실에서 결국 처절하게 실패하고 배반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 실패의 기억을 봉인하면서라도 지금 대중은 그 방청석의 어딘가로 돌아간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지만 국민은 누구인가를 묻지 않는 단계, 국가라는 환상은 의심하지만 ‘국민’이라는 또 다른 통합된 환상에 기대는 방식, 바로 여기에 <변호인>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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