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우리에게는 존 포드가 있잖나, 안 그런가?
2014-09-04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감독론1 - 편견과 오해를 넘어 그를 제대로 보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
<수색자>

우리는 왜 존 포드의 영화를 보고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가. 포드에 관한 흥미로운 책을 낸 평론가 조셉 맥브라이드가 포드와 동시대에 살았던 또 한명의 위대한 감독 하워드 혹스를 인터뷰했을 때 혹스는 오히려 독자가 다소 당황스러울 정도로 시원스러운 대답을 해버린다. 질문은 정중하게도 “당신과 존 포드의 공통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였지만 혹스는 포드가 얼마나 자신보다 비범한 감독이었는지 설명하는 데 온통 열중한다. 그의 긴 답을 거칠지만 요약해보자.

“나는 할 수 있는 한 매번 그를 모방했다. 그건 작가가 헤밍웨이와 포크너와 존 도스 파소스와 윌라 캐더와 그런 많은 이들의 작품을 읽는 그런 것이다. 내 생애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한편은 <조용한 사나이>인데, 정말 아름다운 영화다. (영화를 촬영하다가) 내가 생각하기에 포드가 아주 잘 만들 것 같은 어떤 장면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그 장면을 멈춰놓고 생각한다. 포드라면 저기서 무엇을 했을까. 그러고 나서야 나는 다시 시작하여 그 장면을 찍는다.”

포드의 영화는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한 사람이 보기에도 위대한 영화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혹스가 문학가들의 이름을 꺼냈을 때 거기에는 포드의 영화가 영화의 어떤 본질을 담고 있는 정전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혹스의 열변에 힘을 얻어 문학과 미술의 정전을 감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포드의 영화라는 정전을 보고 느끼고 말하는 것이 더없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게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약간의 석연치 않은 상황들이 곧잘 끼어든다.

<황야의 결투>

존 포드는 서부극으로 통한다?

포드가 여전히 오해받는 창작자라는 점이 우리가 지금 포드의 영화를 보고 생각하고 말해야 함을 강조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다. 포드는 복권되었으며 오해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최근의 예를 하나 들 수 있다. <장고: 분노의 추격자>를 만든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 영화의 홍보 기간 중 어느 인터뷰에서 “나의 미국 서부극 영웅은 존 포드가 아니다. 과장없이 말하지만 나는 그를 싫어한다. 그가 좀비처럼 죽여버린 정체불명의 인디언들에 대해서는 잊어라”라고 말했다. 포드의 영화 속에 백인문화의 폭력이 기입되어 있다는 말일 텐데, 비평가 켄트 존스는 미국의 영화 격월간지 <필름코멘트>에 “왜 쿠엔틴 타란티노는 영화의 역사를 가르치면 안 되는가?”라는 요지로 비판문을 쓰기도 했다. 사실은 누가 옳은지 혹은 타란티노가 얼마나 틀린지 말하기 위해 이 일화를 꺼낸 것은 아니다. 타란티노가 어떤 종류의 영화가 싫다고 말하려 할 때 그 종류를 설명하거나 묘사하려는 대신, 그 원형으로서 제시하며 대뜸 나는 존 포드의 영화가 싫다고 말했다는 그 사실이 차라리 흥미롭다.

타란티노가 의도치 않게 우리에게 제시한 두 가지 증언이 있는 셈이다. 여전히 미국에서도 그리고 수많은 영화를 섭렵한 미국인 타란티노에게서도 포드는 곧 서부극으로 통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서부극 내용이 인종적 권력이 횡행하는 보수적 내러티브의 원형으로 통한다는 사실이다. 포드가 서부극만 만든 감독이라는 오해는 알려진 것처럼 포드 스스로 만든 것이기도 하며 그건 포드의 다른 영화들을 섭렵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벗겨지는 베일과 같다. 하지만 그가 이분법적인 보수 혹은 나쁜 이데올로기를 껴안은 영화의 양산자라는 건 시급하게 벗겨내야 할 오명이다. 심각하게도 그 오명은 단지 포드를 보수주의자로 낙인찍는 것을 넘어 그의 영화가 기껏해야 권력의 승리와 패배의 이야기를 앞세워 장르적 시스템에 순종한 평범한 영화라는 판단을 낳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수색자>에서 조카를 납치해간 인디언과 그녀를 찾는 이산(존 웨인)이 서로 얼마나 닮은꼴인지 우리는 더 말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둘의 유사함 속에서 광기의 기이함이 얼마나 편을 가르지 않고 양쪽으로 팽배해졌는지 우린 더 말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어쩌면 포드가 가족이나 군대 같은 집단의 인물들을 다루는 동시에 전투나 전쟁을 다룬 것이 종종 이런 오해를 불러오는 것이겠지만 가족, 마을, 군대 혹은 종교적 무리에 이르기까지 그건 포드의 영화가 완성되는 데 필수 불가결한 하나의 영화적 부족이었지 권력을 가져가는 승리자 집단이 아니었다.

포드는 그 부족들의 삶 안에서 시정을 만들어냈다(뛰어난 영화학자 질베르토 페레즈는, 평론가 제임스 엣지가 감독 D. W. 그리피스를 가리켜 했던 “부족 시인”이라는 표현을 가져와 포드에게 부여하고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말한 것과 같은 그 제식들, 그리고 춤, 행진, 합창, 장례 혹은 거기에서 누군가 홀로 떨어져 나왔을 때의 묘지와 사람의 풍경. 포드는 공동체의 생존적 삶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그렸다. 프랑스 평론가들이 포드를 찾아가 왜 가족 이야기에 그토록 관심이 많냐고 물었을 때 포드의 대답은 간단하지 않았던가. “당신한테도 어머니가 있잖아, 안 그런가?”

이 문제는 평범한 공동체의 삶이나 싸움처럼 보이는 포드의 영화들이 어떻게 그토록 자주 영화적 기적에 휩싸이는지 우리에게 질문의 형식으로 남을 것이다. 왜 감독 장 마리 스트라우브는 <아파치 요새>에 관하여 말하면서 “영화감독 중 가장 브레히트적인 감독”으로 포드를 꼽은 것인가(우리 같은 관객의 눈에는 브레히트와는 아주 먼 쪽에 있는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왜 뛰어난 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자기가 가장 좋아한다는 <태양은 밝게 빛난다>에 대해 쓰면서 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정리하는 건 “쉬운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일까(우리 같은 관객의 눈에는 아주 쉽게 정리될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각자의 대답이 있지만 지금 우린 우리의 상상이 더 중요하다.

<태양은 밝게 빛난다>

“제스처의 웅변”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스토리를 정리하는 일이 의미 없는 일인 것과 같이 어쩌면 그와 유사한 경험들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오즈만큼 포드는 어떤 집단의 공통적 기호에 철저히 집착한 것 같다. 평생을 걸쳐 오즈가 가정과 가사와 탄생과 결혼과 시집과 장례의 문제 안에서 영화적 기호들을 쓸쓸하게 혹은 풍요롭게 사용한 것이라면, 포드는 황야와 전쟁터 등에서 거주하는 크고 작은 집단의 기호들을 통해 영화적 따뜻함과 유머러스함과 쓸쓸함을 포착하려 했던 것 같다.

아니, 이 영화적 기호들은 집단의 것으로만 머물지도 않았다. 한 인물의 행동의 기호라고 할 만한 제스처들에 대해 포드는 예민했다. <황야의 결투>에서 헨리 폰다에게 벽에 대고 왼발과 오른발을 차례로 바꾸도록 했을 때, <말 위의 두 사람>에서 제임스 스튜어트가 어쩌다 하품을 해버렸을 때 포드는 흡족해했다(피터 보그다노비치의 영화 <감독 존 포드>에 그 내용이 나온다).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포드 영화의 그런 온갖 행위와 움직임을 새롭게 배열해내면서 그 제목 짓기를 “제스처의 웅변”이라고 했다. 이것이 우리가 포드의 영화를 보고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 또 다른 매혹의 이유일 것이다.

짧은 글에 지나치게 많은 감독과 평론가들의 이름을 도배한 건 다소 의도적이었다. 그들의 ‘세력’을 빌려 포드의 영화쪽으로 은근히 독자와 관객을 유혹하고 싶었다. 로젠봄은 “그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구했다”는 <태양은 밝게 빛난다>의 영화 속 캐치프레이즈를 두고서, 그것이 포드가 자신의 묘비에 새기고 싶은 이상적인 묘비명이었을 거라고 썼는데,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구하는 어떤 영화감독이 있다고 한다면 우린 당연히도 궁금해지지 않겠는가.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