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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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4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감독론2 서부극을 중심으로 - 우리가 보는 것으로만 드러나는 존 포드의 시학을 경험하기 위하여
<웨건 마스터>

존 포드와 서부극의 관계에는 좀 기묘한 점이 있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대체로 대중적 성공을 거뒀지만 당대에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가 받은 6번의 아카데미상은 모두 비서부극에 주어졌다. 당대의 주류 평자들에게 포드는 상업적인 서부극에 능했지만 수준 높은 드라마도 곧잘 만든 감독이었다. 존 포드 사후에는 이 관계가 역전된다. 이제 그의 이름은 대개 위대한 서부극과 연관되어 거론된다. <사이트 앤드 사운드> 2012년 12월호에 실린 올타임 베스트 목록에는 포드의 영화 가운데 <수색자>(1956)만 100위 안(6위)에 올라 있고, 서부극 10 베스트에는 그의 서부극 네편이 올라 있다(<수색자>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황야의 결투> <웨건 마스터>).

<투 로드 투게더>

‘보는 것’의 (불가피한) 실패

물론 어느 쪽도 온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존 포드는 위대한 서부극을 만들었지만, 그가 유성영화 시기에 만든 15편가량의 서부극은 전체 극영화 편수의 4분의 1에 못 미친다. 비서부극의 풍성한 목록에서 그의 걸작 서부극에 필적하는 보석들을 발견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그의 비서부극조차 서부극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건 뒤집어 말할 수도 있다. 그의 서부극은 비서부극처럼 보인다. 두 문장에서 서부극의 의미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논리적으로 동행하기 힘든 두 역설을 동시에 성립시킨다는 점에 존 포드 서부극의 특별함이 있는 것 같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우리를 혼란케 하면서 사로잡는다. 이질적인 것들의 소란, 난장의 활력, 유쾌한 혼돈이라 부를 만한 것이 거기에 있다. <수색자> 50주년 기념 DVD의 부가영상에서 이 영화의 열렬한 팬인 존 밀리어스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이런 서부극은 처음 봤다. 영화를 보는 순간 이것이야말로 진짜 서부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거의 꿈같았다.” ‘진짜’ 서부인데 ‘꿈같다’니, 앞뒤가 안 맞는 말이지만 <수색자>에 매혹된 사람이라면 주저 없이 그의 감상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장르연구의 권위자인 토머스 샤츠는 저서 <할리우드 장르>에서 <역마차>(1939)를 고전적 서부극의 전범으로 간주하고 “자연과 문화를 통합하는 서부의 잠재력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투사하고 있다”고 평한다. 그런데 몇 문단 뒤에 극히 사적인 어조로 “나는 앤서니 만, 버드 보에티처, 샘 페킨파의 ‘반웨스턴’을 보면서 철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존 포드의 웨스턴은 가장 전복적인 것 같았다”라고 쓰고 있다. 어떻게 가장 표준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전복적일 수 있을까. 샤츠는 이 문제를 파고드는 대신, 자신의 무능력을 우회적으로 슬쩍 고백해버리는 쪽을 택한다. 우리는 그의 무능력을 비판하는 대신 이 고백을 존중할 수 있다.

존 포드 서부극은 서부극에 대한 표준적 지식을 난처하게 만든다. 그것은 표준적 지식의 이중적 실패를 반영한다. 하나는 존 포드의 서부극을 있는 그대로 ‘읽는 것’의 실패다. <역마차>의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고전적 서부극의 전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영화에는 정의로운 서부사나이가 악인들을 물리쳐 선한 공동체를 위기에서 구한다는 따위의 상투적 설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마을은 파렴치한 은행가와 위선적인 주민들로 가득 차 있으며, 탈옥한 서부사나이 링고 키드(존 웨인)의 관심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사적 복수다. 복수를 완성하고 난 뒤 그는 창녀와 함께 공동체를 떠난다. 문명은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오염되어 있고, 서부사나이는 유용하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어 문명과 동행할 수 없다. 어떻게 봐도 21세기의 슈퍼히어로 영화들보다 <역마차>가 더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는 제작연도와 “이곳은 서부입니다. 전설이 사실이 될 때, 그 전설을 기록합니다”라는 명대사 덕으로 오랫동안 자기비평이 담긴 서부극의 만사(輓詞)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 모티브는 이미 14년 전의 <아파치 요새>(1948)에 고스란히 등장한다. 완고한 출세주의자 서스데이 중령(헨리 폰다)은 요크 대위(존 웨인) 등 참모 장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모하고 명예롭지 않은 아파치 토벌작전을 감행하다 초라하게 죽는다. 그러나 이 영화의 마지막은 몇년 뒤 서스데이 중령이 기자들에 의해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되는 장면이다. 서부의 이야기는 이미 날조된 것이다. <아파치 요새>는 아파치 족장이 백인 부대장보다 명예를 더 중시하는 인물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8년 뒤에 나온 <수색자>의 ‘수정주의적’ 시각보다 더 수정주의적이다.

요컨대 <역마차>에서 <샤이엔의 가을>(1964)에 이르는 포드의 서부극은 진화의 도식이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정치적 올바름을 무기로 내세운 수정주의자들이 행세하기엔 너무도 복합적이고 분열적인 텍스트라는 것이다. 그 단어를 써야 한다면 존 포드의 서부극은 처음부터 전복적이었다.

표준적 지식의 더 중대한 실패는 ‘보는 것’의 실패다. 이 실패는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우리 대부분은 온전히 보는 것에 실패한다. 화면에는 많은 것들이 등장하지만 지식과 기대, 관람습관은 우리의 시선이 그들 중 극히 일부만 선택하도록 이끈다. 많은 영화는 그 조건에 맞춰 자신을 구성한다. 하지만 어떤 영화는 우리를 그 조건을 넘어 다시 보도록 이끈다. 이런 영화는 존 밀리어스가 ‘꿈같다’고 표현한, 읽는 것으로 해소 불가능한 감흥과 동요를 남긴다. 존 포드의 영화가 그런 영화다. 다시 보고 또 봐도 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꿈틀거려 새로운 감흥을 일으킨다. 정돈과 체계를 지향하는 표준적 지식이 존 포드 영화를 보는 것에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파치 요새>
<3인의 대부>

모뉴먼트 밸리의 시학

그렇다고 여기서 존 포드 서부극에서 ‘봐야 하는 것’의 목록을 작성할 생각은 없다. 물론 그건 온전히 작성될 수도 없을 것이다. 혹은 누구나 자신만의 리스트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언급하고 싶다. 존 포드가 우리에게 특별히 다시 보기를 청한다고 느껴지는 것 중의 하나인 모뉴먼트 밸리다. 1930년대까지 대부분의 미국인조차 알지 못했던 이 미지의 땅은 <역마차>에서 첫 배경이 되었고 마지막 서부극 <샤이엔의 가을>에 이르기까지 모두 9편의 포드 서부극에 등장한다. 나바호족의 성지로 알려졌으며 흙바람 이는 황야와 기괴한 형상의 암석봉들로 이루어진 이 장소를 존 포드는 사랑했다. 나는 존 포드의 서부극을 모뉴먼트 밸리가 등장하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특별전 상영작 중에서 <역마차> <아파치 요새> <웨건 마스터>(1950) <수색자> <샤이엔의 가을>은 전자에, <3인의 대부>(1948), <투 로드 투게더>(1961)는 후자에 속한다.

전자의 영화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영화 속 인물들이 아무리 멀리 떠나도 모뉴먼트 밸리에 머물러 있거나 그곳으로 돌아온다는(혹은 돌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수색자>에서처럼 이야기상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역마차>에서처럼 이야기상으로 멀리 떠나도 인물들은 여전히 모뉴먼트 밸리를 맴돌고 있는,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KMDb 사이트 ‘존 포드 이야기’ 참조). 포드의 마지막 서부극 <샤이엔의 가을>에서는 샤이엔족들이 모뉴먼트 밸리(물론 영화에서의 지명은 다르다)에서 출발해 1500마일을 여행했는데도 그들이 도착한 곳은 여전히 모뉴먼트 밸리다.

다른 하나는 인물들이 모뉴먼트 밸리의 암석봉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그것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드문 예외는 <웨건 마스터>에서 덴버(해리 캐리 주니어)가 암석봉 하나를 쳐다보며 트래비스(벤 존슨)에게 “성당의 첨탑처럼 생긴 저거 기억나지?”라고 묻는 장면이다. 이와 연관된 또 다른 공통점은 백인들은 암석봉들에 근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인디언들은 종종 그곳으로부터 출현하며 그곳에 은둔한다. 이건 엄격한 규칙 같은 것이어서 <아파치 요새>에서 암석봉들 사이로 진격해간 서스데이 중령의 죽음은 전술 실패의 결과가 아니라 마치 이 규칙위반에 대한 응징처럼 보인다.

모뉴먼트 밸리가 읽는 것에서 제외되고 보는 것으로밖에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서사 내적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사건에 연루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모뉴먼터 밸리는 아무리 멀리 떠나도 벗어날 수 없는 곳, 인물들이 쳐다보지도 말하지도 않는 것이 서 있는 곳, 근접이 허용되지 않은 심연을 품은 곳이다. 사건에 연루되지 않는 풍경이 마술처럼 사건을 장악하고 주재하는 것이다. 모뉴먼트 밸리는 기능하지 않지만 활동한다. 나는 존 포드 서부극에서밖에는 이런 풍경을 만난 적이 없다. 이 점이 존 포드의 서부극을 모뉴먼트 밸리의 시학이라고 부르고 싶게 만든다.

물론 그의 시학을 구성하는 건 모뉴먼트 밸리의 시각적 형상만은 아니다. 거의 모든 포드 서부극에는 아름다운 노래, 만취와 소란, 돌발적 유머, 군무의 제의가 출몰해 사건의 흐름을 희롱하듯 이완시키며, 사건은 다시 그들을 폭력적으로 중단시킨다. 이 이완과 긴장이 포드적 리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매혹적인 운율을 빚어낸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사건에 흡수되지 않고 그것과 긴장하는 영화적 기표들의 난장이며, 그 기표들의 가장 깊숙한 곳에 모뉴먼트 밸리의 불가사의한 형상이 우뚝 서 있다.

그렇다면 존 포드 서부극의 진정한 마침표는 실내와 마을 내부에서 대부분 촬영되고 매끈하게 다듬어진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가 아니라, 포드가 70살에 찍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마지막 서부극 <샤이엔의 가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 모뉴먼트 밸리가 미연방정부에 의해 ‘손바닥만큼 좁혀진’ 인디언들의 마지막 거처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모뉴먼트 밸리는 마침내 사건에 흡수된 것이다. 심연은 사라졌고, 더이상 포드의 모뉴먼트 밸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샤이엔의 가을 >

<3인의 대부>와 <투 로드 투게더>

모뉴먼트 밸리가 등장하지 않는 영화 중에서 <3인의 대부>와 <투 로드 투게더>는 특별히 흥미로운 서부극이다. 두 영화 모두 서부극의 보편적 세팅과는 거의 무관한 비전형적인 서부극이다. 긴 언급은 피하고 싶지만 <3인의 대부>에선 잊혀지기 힘든 어둡고 성스러운 표현주의적 이미지와 태양과 소금밭의 잔혹한 빛이 차례로 등장한다. 고통스런 도피의 여정 외엔 사건이 별로 없는 이 영화에서, 시각적 대비의 인상이 너무도 강렬해서 테크니컬러로 촬영되었지만 흑백필름처럼 느껴지는 기묘한 영화다.

<투 로드 투게더>는 <웨건 마스터>와 함께 포드의 가장 게으른 서부극으로 꼽힐 만하다(제임스 스튜어트와 리처드 위드마크의 강변 대화 장면은 4분에 이르는 롱테이크다). 하지만 <웨건 마스터>가 사건을 최소화하고 포장마차 무리들의 이동 과정에만 몰두하는 ‘사치스런 B급 서부극’(하스미 시게히코)이라면, <투 로드 투게더>는 납치와 구출과 인종적 편견이라는 <수색자>의 소재와 두 주인공의 로맨스, 군중의 광기, 서부 사나이의 타락이라는 모티브들이 뒤범벅된 드라마다. 이 영화의 이상한 점은 이례적으로 결말부에 극히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는데도, 그를 수습하지 않고 느린 속도와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한다는 것이다.

해소될 수 없는 끔찍한 과거 위에 세워진 오늘의 달콤한 로맨스. 이 불일치는 섬뜩하고 무섭다. <투 로드 투게더>는 존 포드 영화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드라마다.

존 포드 서부극에는 사건과 사건 외부가 공존한다. 사건 외부는 말없이 활동하든, 사건들과 충돌하는 잉여의 디테일로 등장하든, 혹은 말해져야 할 때 말해지지 않는 생략으로 나타나든 우리가 보는 것으로만 드러난다. 존 포드 서부극은 다시 보기를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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