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모뉴먼트 밸리의 거주자들
2014-09-04
글 : 김보연 (객원기자)
‘존 포드 스탁 컴퍼니’라고 불렸던 존 포드 영화의 빛나는 조연배우 열전

50년간 150여편의 영화를 만든 존 포드의 필모그래피를 떠올릴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얼굴은 물론 존 웨인, 헨리 폰다, 제임스 스튜어트와 같은 할리우드의 스타들이다. 그런데 존 포드의 영화들을 하나씩 보다보면 조연 역할에 익숙한 얼굴의 배우들이 반복해서 출연하고 있음을, 게다가 그런 배우가 의외로 많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이 영화에서 비루한 모습으로 출연했던 배우가 다른 영화에서는 말쑥하게 갖춰 입고 점잔을 떤다거나, 천하의 악당이었던 배우가 주인공의 조력자로 출연하는 식으로 말이다. 존 포드는 한번 일했던 배우들과 계속해서 함께 작업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구성된 ‘존 포드의 배우들’은 이미 30년대부터 ‘존 포드 스탁 컴퍼니’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거의 단역으로만 4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잭 페닉 같은 배우를 포함해 존 포드와 다섯편 이상 함께 작업한 배우들의 수만 해도 60명이 훌쩍 넘어가니 존 포드의 필모그래피에서 존 포드 스탁 컴퍼니의 역할이 얼마나 컸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해리 캐리 주니어

해리 캐리 주니어

이처럼 적재적소에서 펼치는 조연들의 활약이 존 포드의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영화 내내 거의 한 가지 표정만 짓고 있는 존 웨인이나 헨리 폰다의 옆에서 감초 역할을 맡아 다양한 감정을 극에 흘려넣는 것이다. 그 중에서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배우는 해리 캐리 주니어(1921~2012)이다.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그는 존 포드의 배우 중에서 가장 젊은 축에 속한다. 27살에 <3인의 대부>(1948)에 출연하며 문자 그대로 “키드”란 이름을 가졌던 그는 싱싱한 청년의 이미지로 연기를 시작했다. 특히 곱슬거리는 금발과 가는 얼굴선을 갖고 있던 그는 특유의 해맑은 미소와 함께 <리오 그란데>(1950)에서 기병대의 낙천성을 알기 쉽게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초기 서부극의 대표 스타인 해리 캐리(그는 존 포드의 장편 데뷔작으로 알려진 <스트레이트 슈팅>(1918)의 주연이었다)의 아들이기도 했던 그는 훗날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연기 활동과 존 포드 그리고 존 웨인에 얽힌 추억을 글로 쓰기도 했다. 물론 이 책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기에 그가 죽는 연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존 포드 감독이 섭씨 49도의 사막에서 그가 탈진할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두었다는 에피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존 웨인(왼쪽)과 워드 본드

워드 본드와 존 캐러딘

해리 캐리 주니어가 청년의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면, 워드 본드와 존 캐러딘은 성숙한 어른의 매력을 확실히 보여준 배우들이다. 주로 콧수염을 기른 채 찡그린 인상으로 악당의 난폭함과 선한 어른의 근심을 함께 표현했던 워드 본드(1903~60)는 존 포드와 24편의 영화를 함께 찍은 존 포드 스탁 컴퍼니의 대표적인 얼굴 중 한명이다. 영화에 출연하기 전부터 존 웨인과 친했던 그는 존 포드의 <살루트>(1929)를 통해 데뷔했으며, 이후 <모호크족의 북소리>(1939)에서 할 말은 야무지게 하는 헨리 폰다의 동료 군인 역을 맡았고 <분노의 포도>(1940)에서는 냉정한 판단으로 헨리 폰다의 가족에게 큰 실망을 안기는 경찰 등을 연기했다. 존 포드의 영화에서는 주로 선한 역을 맡아 항상 강인하고 듬직한 인상을 보여준 그는, 그런 맥락에서 존 캐러딘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역마차>(1939)에서 존 웨인이 연기한 링고 키드와 비교해 어떤 면에서는 더 치명적인 매력을 보여준 도박꾼 햇필드를 기억할 것이다. 긴 코트를 멋지게 갖춰 입은 채 날카로운 눈매로 총을 겨누던 그가 바로 출연하는 영화마다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었던 존 캐러딘(1906~88)이다. 어떤 관객에게는 공포영화 속 드라큘라로 더 익숙할지도 모를 그는 수염 기르기, 눈 크게 치켜뜨기, 비열하게 또는 인자하게 웃기만으로 인상을 완전히 바꾸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역마차>에서 비열함 속의 신사다움을 보여준 뒤 곧이어 출연한 <분노의 포도>에서 거의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전직 목사를 연기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외에도 존 캐러딘은 <허리케인>(1937) 등 전부 11편의 영화에서 존 포드와 함께 작업하며 카멜레온 같은 자신의 매력을 뽐냈다.

제인 다웰
모린 오하라

제인 다웰과 모린 오하라

상대적으로 수는 적지만 존 포드 스탁 컴퍼니의 여배우들을 빼놓을 수 없다. 존 포드 영화의 어머니상을 떠올릴 때 제일 처음 그려지는 이미지는 아마 <분노의 포도> 속 제인 다웰(1879~1967)일 것이다. 풍만한 체형과 그에 걸맞은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험난한 현실에 괴로워하는 청년들을 품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어른이었다. 그녀에게 존 포드는 영화의 마지막을 단독으로 장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이때의 인상적인 연기 때문인지 그녀는 다음해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그녀는 <황야의 결투>(1946), <3인의 대부> 등에서 변함없이 안정적인 연기로 사막의 먼지로 가득한 남성의 영화에 숨통을 틔우고는 했다.

한편 존 포드가 젊은 여자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우는 편은 아니었지만 도드라진 아름다움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배우는 바로 모린 오하라(1920~ )였다. 존 포드와 다섯편의 영화를 작업한 그녀는 출연하는 영화마다 본연의 우아한 얼굴에 애정 어린 클로즈업의 도움을 받아 독보적인 미를 선보였다. 특히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1941)에서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으로 꼽기도 한 원치 않는 결혼을 하며 짓는 그녀의 표정은 존 포드가 그리고자 한 여성의 슬픈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해준다.

우디 스트로드

우디 스트로드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배우는 흑인 배우 우디 스트로드(1914~94)이다. <역마차>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영화 경력을 쌓기 시작한 그에게 존 포드는 갈수록 큰 배역을 주기 시작했고, 그렇게 네편의 영화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특히 <러틀리지 상사>(1960)에서는 주인공 러틀리지를 맡아 포드 영화의 주요한 배우로 자리 매김했다. 배우로서 좋은 기회를 준 존 포드를 우디 스트로는 “파파”(Papa)라고 부르며 존경을 표했고, 그를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 가장 리버럴한 사람”이라 훗날 평하기도 했다(반면 존 웨인은 보수적이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 6명 외에도 아직 언급하지 못한 이름이 많다. 감독으로서 동생 존 포드를 영화계로 이끈 뒤 나중에는 배우로 활동했던 프랜시스 포드(1881~1953)도 있으며, <밀고자>(1935)의 주인공이었고 체중 변화에 따라 캐릭터의 성격이 휙휙 바뀌는 빅터 맥라글렌(1886~1959), 그리고 그 유명한 <역마차>의 스턴트를 담당하며 존 웨인의 대역으로 활동했던 야키마 카누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런 든든한 배우들과 거의 평생을 함께 일했던 존 포드는 자신의 동료이자 친구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배우들에게 내가 원하는 걸 말해. 그러면 그들은 그걸 나에게 보여주지. 대개 첫 번째 테이크에.” 대수롭지 않음과 자랑스러움이 반씩 느껴지는 이 말은 존 포드와 그 배우들의 촬영 현장이 어떠했을지 대략이나마 짐작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 찰떡궁합의 결과물을 확인하는 일은 존 포드 영화를 감상하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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