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그의 영화들은 그를 닮았네
2014-09-04
글 : 박인호 (영화평론가)
감독론3 비서부극을 중심으로 -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존 포드적 순간들
<태양은 밝게 빛난다>

1.

칼 드레이어, 프리츠 랑, F. W. 무르나우, 앨프리드 히치콕, 에른스트 루비치,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은 영화의 시원적인 형태를 기억하고 있다. 이들의 영화는 움직임과 정지, 빛과 어둠, 풍경의 아름다움과 배우의 제스처에서 드러나는 미세한 감정들을 모아 특별한 영화의 기운을 만들어낸다. 그들의 영화들은 ‘영화’ 그 자체로 향하는 가장 고귀한 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존 포드의 영화가 그러하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

2.

장르의 기원처럼 우뚝 솟은 포드 서부극의 풍경 모뉴먼트 밸리의 감흥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그의 위대한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면 서부극만 손에 꼽기는 힘들 것이다. 포드가 여전히 위대한 감독으로 남는 것은 인간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풍경과 공존하는 인간다움과 품위를 새기지 않은 그의 영화를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장르를 떠나서 자연과 인간의 조우, 공동체의 생존의 약속 등을 영화의 원재료를 통해 제시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미시시피 강(<굽이도는 증기선>(1935)), 태평양(<데이 워 익스펜더블>(1945)), 멕시코의 척박한 땅(<도망자>(1947)) 혹은 아일랜드의 한적한 시골. 어디에서건 사람들은 그 공간의 일부를 이루면서 살아가고 사람들이 부대끼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인간됨을 드러내는 순간을 맞이한다. 이미 형성된 조화로움이 전제되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서 이야기를 넘어서는 숏이 등장하거나 심지어 이야기와 무관한 숏이 버젓이 등장해도 포드적인 세계라고 명명되는 지점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장면이 더욱 풍부해지고 감정의 더께를 쌓아올리게 된다.

예를 들어 <태양은 밝게 빛난다>(1953)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선거를 앞둔 모든 소동이 끝난 후 마을을 행진하는 행렬이 등장할 때다. 군인, 여성, 흑인들까지 마을을 한 바퀴 돌아서 판사의 집에 도착하고 그들은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한다. 판사는 의자에 앉아 이들을 바라보고 미소로 화답한다. 곧이어 늙은 판사의 얼굴에 뜻모를 표정이 스쳐 지나가고 그는 문을 열고 어두운 집 안으로 들어간다. 문을 통과함은 포드의 세계를 드러내는 하나의 열쇠처럼 느껴진다. <수색자>(1956)의 처음과 마지막 숏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문은 서부라는 풍경, 장르, 영화를 열고 닫는 것 같은 적막함을 문득 깨닫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태양은 밝게 빛난다>의 다양한 인종과 계층이 모인 공동체가 건네는 인사가 마치 포드가 우리에게 보내는 손짓처럼 느껴지고 늘 술에 취해 흥청거리던 판사의 동료들이 휘청거리는 걸음을 옮길 때 저들의 고귀한 세상은 이제 끝이라는 슬픔에 사로잡히게 된다.

<굽이도는 증기선>에서는 미시시피 강을 따라 형성된 강의 사람과 늪지의 사람들의 각자 다른 삶의 방식과 태도, 법제도의 실행, 사랑의 가치, 가족과의 갈등이라는 소재를 통과하면서 남부인 특유의 고집스러움과 존엄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포드는 아일랜드 혈통의 기질을 남부 사람들에게서 발견했던 것 같다. 원칙을 고수하고 타협하지 않지만 속내는 따스하고 유머러스한 인격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성이야말로 포드의 근간을 이룬다.

<도망자>

<도망자>는 <라이징 오브 더 문>과 더불어 포드 자신이 좋아한 영화 중 한편으로 서부극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준 영화다. 기독교를 탄압하는 권력층을 피해 다니는 신부의 나약함과 패배를 거쳐 죽음을 통한 구원에 이르는 길을 따라가는 과정에 황량하고 메마른 멕시코의 풍경과 사람들의 얼굴이 등장한다. 거의 표현주의처럼 촬영한 로키의 조명과 미니멀한 구도, 비참함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헨리 폰다와 병들고 가난한 자들의 얼굴은 검은 밤의 앙상한 나무와 하얗게 증발될 것 같은 햇살로 인해 정밀한 시를 연상시킨다. 듬성듬성 이어지는 사건이 도주의 길에 기입되면서 만들어지는 느슨한 리듬도 경이롭지만, 이 영화의 영적인 기운은 종교적인 신념으로 무장한 것보다 아버지 없는 아이에게 세례를 주고 이름을 지어줄 때의 흔들림에서 포착된다. 이처럼 포드의 웅장한 세계보다 순박한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만나는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그의 정수가 무심코 드러나는 순간과 마주하게 만든다.

포드의 영화는 포드의 됨됨이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마초의 대명사로 회자되고 괴팍한 성격과 성마른 기질로 인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지만 장난꾸러기 같은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농담을 좋아하고 촬영장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노래를 즐겨하던 포드의 성정처럼 그의 영화는 다양한 사람들, 지역, 장소, 사건을 통해 변형되고 그의 영화 안에 자신의 고유한 흔적을 심어놓는다.

예를 들어 <젊은 날의 링컨>(1939)에서 첫사랑 여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혼자 남은 링컨이 호수에 돌을 던진다. 파문이 일어나는 호수의 표면에서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숏으로 디졸브될 때 그 흔한 장면전환에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다음 숏 때문일 것이다. 눈 덮인 묘지 앞으로 다가와 꽃다발을 놓는 링컨의 구부정한 모습인데 소박한 꽃다발에서 삶과 죽음, 덧없이 사라지는 모든 것을 잠시 붙드는 제스처로 변형된다. 이 장면이 뭉클한 것은 청년기 링컨의 행동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감정과 그의 노년이 대화하는 것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순례의 길>(1933)의 꽃다발은 더욱 감동적인데, 결혼을 반대하던 어머니로 인해 1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아들이 사랑했던 여인이 프랑스로 여행을 떠나는 어머니에게 건네는 꽃다발이 처음 등장한다. 사랑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났고 링컨처럼 찾을 무덤조차 없는 여인이 건넨 꽃은 참전용사 기념비 앞에 아들을 기리는 마음으로 헌화하는 어머니들의 꽃다발로 연결된다. 이국에서 죽어간 아들을 그리워하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리는 어머니가 찾아간 아들의 무덤 앞에 놓인 꽃다발은 그녀의 미움이 용서로, 죄의식이 그리움으로 변하는 지점에 등장한다. 손에서 손으로 건네진 꽃이 일으키는 파동은 포드의 서부극에서 남성들이 모자를 던지거나 돌멩이를 던지는 것, 서로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원형의 왈츠 움직임과도 유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을 단순한 행동을 통해 환기시키는 포드의 역량은 영화가 사건의 연쇄보다 희로애락을 품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포착하는 것임을 드러내는 듯하다.

<젊은 날의 링컨>

3.

에블린 페레 크리스탱이 쓴 <계단, 건축의 변주>의 한 구절을 옮겨본다. “건축이란 경험되어야 하고, 두발로 거닐 수 있어야 하며, 감각을 통해 인식되어야 하고, 상상을 통해 다시 세워져야 한다.” 건축을 영화로 바꾸어 읽어보는 것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극장에서 경험한 영화가 감각에 새겨지고 마음에 자리를 잡는 것은 문득 떠오르는 기억과 부단한 복기의 시간을 통해 다시 지각될 수 있다. ‘영화’가 지나간 수만 갈래의 길이 있겠고 팬 흔적의 두께 또한 다르겠지만, 포드의 영화를 경험하고 그 영화의 시간과 더불어 사는 것은 세월이 지날수록 새로이 만들어지는 ‘영화’를 순례하는 가장 즐거운 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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