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상상적 노스탤지어 속으로
2015-03-10
글 : 정지연 (영화평론가)
03 <인히어런트 바이스>를 읽는 세 가지 경로 - 1970년대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중독

<부기 나이트>(1997)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영화 속 인물들이 1980년, 새해를 맞이하는 연말 파티장에서 벌어진다. 마치 유사가족을 구성하듯 한데 거주하며 포르노 필름을 제작하는 이들은 새해를 경축하며 1980년을 향한 카운트다운을 외친다. 그러나 그 순간 영화의 스탭이었던 ‘리틀 빌’(윌리엄 메이시)이 외간 남자와 정사를 벌이는 아내를 총으로 쏴죽이고, 그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그를 직시하는 순간, 총구를 입안에 넣어 자살하고 만다. 1980년대는 그렇게 시작됐다. 70년대 LA를 배경으로 호황을 이루었던 포르노 필름 산업은 마치 비극의 예고장처럼, 한 남자의 고통스런 절망과 살해, 그리고 자살을 함께 목격하는 것으로 시작된 것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두 번째 장편영화 <부기 나이트>는 감독 스스로 경험하고 향유했던 LA 포르노 필름 산업의 흥망성쇠에 대한 연대기이자 동시에 애가였다. 그는 언제나 시대적 변화에 부대끼고 상처받는 인간들에 대한 지독한 천착과 연민을 드러내왔다. 전작인 <마스터>에서 주인공이었던 프레디 퀼(와킨 피닉스) 역시 2차대전의 트라우마와 ‘좋은 시절’로 회고되는 50년대 미국 사회에서 철저히 부적응하고 탈주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화학약품들로 구성된 알코올과 최면의 환각이 프레디 퀼은 물론이고 아무도 구원할 수 없다는 처참한 현실을 관객과 더불어 목도하길 종용하는 작품이다. 이러한 ‘불모함’이야말로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를 지배하는 주요 키워드가 된다.

60년대를 위한 레퀴엠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1970년으로 되돌아간다. <부기 나이트>에서 묘사됐던 70년대 향락과 비극이 교차했던 LA는 이번엔 <빅 슬립>(감독 하워드 혹스)과 <롱 굿바이>(감독 로버트 알트먼)의 필립 말로가 음모와 범죄에 휘말리며 죽음들을 스쳐 지나갔던 잔혹한 거리의 ‘하드보일드’로 탈바꿈된다. 그러나 이 영화 속 필립 말로, 닥 스포텔로(와킨 피닉스)는 더이상 트렌치코트를 걸친 과묵한 남성 영웅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너저분한 장발과 수염, 흡사 거리의 부랑자처럼 보이는 옷들을 주워 걸친 그들은 영화의 첫 장면에서 마지막 장면까지 시종 마리화나에 취해 있는 60년대의 유산, 히피로 재구성된다. 경찰들은 그를 향해 노골적으로 경멸적인 시선과 폭력을 행사하고, 주변인들은 그를 조롱어린 듯한 뉘앙스의 ‘히피~’라고 호명한다. 1970년 LA에서 그는 마치 60년대의 화석 같은 캐릭터로 전락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지만, 그는 <부기 나이트>의 그들이 도래한 80년대에 적응하길 거부했던 것처럼, 여전히 60년대 방식으로 70년을 맞이한 인물이었다.

60년대 서구는 격렬했다. 유럽은 ‘68혁명’으로 상징되는 반자본주의 투쟁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미국 역시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 ‘청년’(youth)과 ‘히피’로 호명되기 시작한 젊은이들은 야만적 제국을 건설한 아메리카의 전통성을 부정했고 반자본, 반문화, 반전 투쟁에 몰입했다. 하버드대학의 교수이자 히피 운동의 거두였던 티모시 리어리(배우 위노나 라이더의 조부)는 자본주의 정상성과 이성에서 탈주할 수 있는 LSD(합성 환각제)를 주장하며 샌프란시스코에서 수십 만명의 청년들과 집회를 가졌고,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개최됐다.

그러나 상황은 유럽의 그것처럼 쉽게 역전됐다. 1967년 로널드 레이건(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은 “젊은이들은 타잔처럼 옷을 입고, 머리는 제인처럼 헝클어지고, 몸에서는 치타처럼 냄새가 난다”고 비아냥거렸으며, 1968년 급기야 공화당의 닉슨이 법과 질서의 부활을 내세우며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와 동시에 보수주의자들의 이념공세가 시작됐다. 가장 급진적이며 창의적이었던 미국의 60년대는 방종한 청년들과 무정부주의, 반애국주의로 인해 숭고한 아메리카 정신이 훼손된 시기로 폄하됐다. <포레스트 검프>(1994)에서 묘사됐던 것처럼 그들은 방탕한 성생활로 에이즈에 감염됐고, 치기와 마약에 의존해 부모와 국가를 외면했던, 반성과 속죄를 강요받아야만 했던 세대로 전락한다.

<인히어런트 바이스>에서 닥은 보수주의자들의 이념적 공세와 권력자들의 시스템화된 범죄가 사회기능으로 작동하는 LA에 좌초된 인물처럼 살아간다. 1970년이 시작됐지만 그는 여전히 60년대의 ‘히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영화사의 필립 말로 캐릭터를 계승하지만 더이상 그들처럼 고독한 마초 영웅 혹은 단독자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범죄로 구조화된 시스템과 타협하지 않을 뿐이며, 그의 움직임을 추동하는 힘은 흡사 그의 의지가 아니라, 빨간 토끼(사샤)에 의해 빠져든 심연의 미궁과도 같은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가 배회하는 영화적 공간들은 더이상 60년대의 히피들이 향유했을 광장이나 해방을 탐닉했던 LSD의 환각이 아니라, 위압적인 시선으로 그를 넘어뜨리는 경찰청과 의식의 개조와 세뇌를 수행하는 정신요양원(총을 든 가드들이 환자를 뒤쫓는 정신요양원 장면에서 의사가 안내한 극장 상영실의 작품은 반공주의 영화, <레드 나이트메어>(Red Nightmare, 1962), 자본과 파시즘 그리고 공권력이 결탁한 대저택의 추악한 파티장 혹은 기만적이고 폭력적인 개발이 진행될 황야의 풍경들이다.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란 언제든지 부서질 것 같은 바닷가의 낡고 퇴락한 그의 거처일 뿐이다.

환각과 탈주 그리고 슬픔

<부기 나이트>를 연출한 후, 고작 스물일곱에 불과했던 폴 토머스 앤더슨은 당시 프랑스 영화저널 <포지티프>와의 인터뷰에서 롱테이크와 종종 초점이 흐려지는 장면들에 대해 “내가 약에 취해 있을 때 경험했던 기분과 시각적 효과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싶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약에 취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재현할 수 없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그의 ‘드럭 모드’ 영화들의 정점은 사실 <펀치 드렁크 러브>(2002) 였다. 불안과 강박증, 현실과 판타지의 기이한 공존이 급기야 로맨스로 승화되며 형형색색의 이미지 파동을 그려내는 시퀀스는 하이한 환각 경험에 대한 찬미이자 고백처럼 보였다.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훨씬 다크한, 그러나 <펀치 드렁크 러브> 못지않은 환각 모드의 영화적 스타일을 제시한다. 영화는 내레이션을 시작하는 솔티레쥬(조애나 뉴섬)의 클로즈업으로부터 사샤의 모습으로 디졸브되면서 시작된다. 블루와 옐로가 콘트라스트를 구성하는 이 환각적 공간(이 영화에서 환각과 현실은 촬영감독인 로버트 엘스위트의 색채 코드로 디자인된다)에서 닥은 이미 현실과 환영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약에 취해 있다. 흡사 유령과도 같았던 사샤의 등장은 후반부에 다시 한번 반복되는데 사라졌던 그녀가 너무도 태연하게 그의 집안에서 배회하는 것을 닥이 발견하는 장면이다. 닥은 그 장면에서 자신이 보는 것이 실제인지 환각인지 혼동스러워한다. 그것은 관객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많은 장면들에서 닥이 마주하는 것, 그리고 관객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환각과 영화적 실제의 모호함 속에 배치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코이가 그랬고, 불현듯 나타나 그에게 사건을 의뢰하거나 사라지는 사람들이 그랬다.

이 영화는 애당초 인과론적 플롯과 대사에 의존한 내러티브에 관심이 없다.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148분의 러닝타임을 채우는 모든 신들에 닥 스포텔로가 등장한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닥의 경험과 회상에 관한 영화이다. 그것도 닥의 직접 진술이 아니라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전달되는 이야기다. 이 수사학에서 흥미로운 점은 경험과 기억의 파편성과 불완전성을 폴 토머스 앤더슨이 묘사한다는 점이고, 무엇보다 그 목소리를 통해 지나가버린 시대, 돌이킬 수 없는 시대에 대한 슬픔과 연민을 전달한다는 점이다. 영화의 후반부, 닥의 집을 부수고 들어온 빅풋은 그에게 겸연쩍은 사과를 하며 마리화나를 집어삼킨다. 납득하기 힘든 그의 행위를 바라보는 닥은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드디어 영화의 마지막 장면, 마치 어디론가 떠나는 듯한 닥과 사샤의 모습은 환각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은 비단 사랑의 끝이 아니라 지나가버린 시대, 자신들을 둘러쌌던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거나 혹은 버려졌음을 인식하는 멜랑콜리의 환각이다. 결국 이 영화는 미국 역사에서 단죄된 60년대에 대한 상상적 노스탤지어이자(70년생인 폴 토머스 앤더슨은 60년대를 경험하지 못했다) 비가이며, 도래할 70년대를 하드보일드의 비정한 범죄 시스템이 일상으로 작동되는 시대로 묘사하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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