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콕은 오직 60%의 영화를 완성했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중요한 영화적 조력자이자 그와 더불어 세기의 영화 콤비로 평가받았던 음악감독 버나드 허먼은 종종 이 말을 즐겨 했다고 한다. 히치콕의 영화를 완성하는 건 자신의 음악에 달려 있다는 강한 확신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여덟편의 영화를 함께 작업한 버나드 허먼을 히치콕은 무척이나 아꼈다. 그는 영화의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 자주 허먼을 대동했고, 미완성의 편집본을 허먼에게 미리 보여주며 음악적 영감을 부추기곤 했다. <현기증>의 제작 노트에 히치콕이 남긴 말은 이 영화음악의 거장에 대한 그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시퀀스에 허먼이 어떤 음악을 넣느냐에 모든 것이 달렸다.”
좋은 영화음악은 때때로 영화를 구원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버나드 허먼은 물론이고 존 윌리엄스와 엔니오 모리코네, 한스 짐머 등 영화사에 자신의 족적을 화려하게 새겨넣은 위대한 영화음악가들의 작품이 너무도 자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좋은 영화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은 시대가 변화할수록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고, 최근 몇년간 국내외에서 영화음악으로 화제가 됐던 작품들을 통해 변화는 한층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변화의 물결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일련의 뮤지션들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노미네이트되지 못했다는 점이 논란이 될 정도로 호의적인 음악적 평가를 받았던 <버드맨>의 안토니오 산체스(팻 메스니 밴드의 드러머),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 지형도를 완성하는 매혹적인 음악으로 관객의 청각을 자극하는 <인히어런트 바이스>의 조니 그린우드(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음악을 만들고 아예 스스로 장편영화를 연출하기도 한 <갓 헬프 더 걸>의 스튜어트 머독(벨 앤드 세바스천의 리더)을 생각해보라. 자신의 주요 기반이 되는 무대를 벗어나 기꺼이 영화의 일부가 되길 선택한 이 뮤지션들의 행보는 할리우드 영화음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사실 영화음악 작곡에 도전하는 뮤지션들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먼 과거로 돌아가면 전설적인 재즈 피아노 연주자 듀크 엘링턴이 영화음악을 맡은 <살인의 해부>(1959) 등의 사례가 있을 것이고,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는 스티븐 소더버그와의 오랜 협업(데뷔작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부터 <컨테이젼>까지)으로 이름을 알린 클리프 마르티네스 등의 음악가들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다소 이벤트성 참여로 비쳤던 뮤지션들의 영화음악 작업은 최근 몇년 새 더욱 빈번하고 공격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중요한 성취를 이루고 있다. 유명 영화음악가를 선호하는 아카데미의 벽은 아직 견고하지만, LA, 보스턴, 뉴욕 등 미국의 다양한 지역 비평가협회가 주관하는 연말 시상식에서 <언더 더 스킨>과 <인히어런트 바이스>가 여러 개의 음악상을 거머쥐었다는 사실을 가벼이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전형적인 영화음악이 아닌, 극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음악을 찾고 있었다.” 뮤지션에게 영화음악 작업을 제안한 대다수의 할리우드 감독들이 밝히는 섭외의 변이다. 하지만 이 말에는 설명이 좀더 필요하다. 21세기 할리우드 영화산업에서 제2의 존 윌리엄스, 제2의 엔니오 모리코네가 등장하지 않는 건 ‘템프 트랙’(temp track)을 할리우드가 너무 안일하게 사용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템프 트랙이란, 영화음악의 가이드라인이 되는 짜깁기 사운드 트랙을 말한다. 개봉일정에 맞춰 촉박하게 영화음악 작업을 마무리해야 하는 건 할리우드도 한국의 사정과 다르지 않아서, 영화의 제작진은 종종 템프 트랙을 노골적으로 참고해 영화음악을 하루빨리 완성하기를 음악가들에게 주문한다고 한다. <뉴요커>는 이러한 영화계의 세태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템프 트랙은 왜 할리우드 영화음악들이 자주 고정된 형식을 반복하는지 말해준다. 판타지영화에선 뿔피리 소리 너머로 메탈 소재의 퍼커션이 쨍그랑거리며, 남자 코러스들이 단조로 노래를 부른다. 로맨틱 코미디에서는 현악 선율과 더불어 한손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온다. 시대극에서는 필립 글래스가 작곡하는 방식처럼 네오 바로크 스타일의 아르페지오 연주를 하더라.” 비슷한 레퍼런스를 참고하기에 이 음악과 저 음악이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이는 ‘템프 트랙’의 폐해를 인지하는 연출자들에겐, 고유의 개성과 스타일로 승부하는 뮤지션과의 협업이 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수 있다는 얘기다.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블록버스터의 시대가 열리며 혁신적이고 기계적인 사운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뮤지션들의 영화음악 참여 비중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트론: 새로운 시작>의 감독 조셉 코신스키는 일렉트로닉 듀오 다프트 펑크에게 영화음악을 제안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오리지널 <트론>은 시각적으로 당대의 영화들에 비해 앞서가는 영화였고 웬디 카를로스의 음악 또한 매우 혁신적이었기에 우리도 같은 방식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할리우드 영화음악계에 별다른 저항 없이 진입하는 많은 뮤지션들이 전자음과 음향효과에 가까운 사운드를 다루는 데 익숙하다. <소셜 네트워크>의 나인 인치 네일스, <한나>의 케미컬 브러더스, <오블리비언>의 M83 등을 떠올려보면 될 것이다.
한편 영화음악 작업을 통해 새로운 활력을 얻길 원하는 건 뮤지션들도 마찬가지다. 대개 녹음실에서 자신들의 음악을 만들거나 길고 지난한 투어에 나서곤 하는 뮤지션에게도 영화음악은 그들의 잠재력을 시험해볼 수 있는 좋은 무대다. 나인 인치 네일스의 트렌트 레즈너는 “같은 음악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연주해야 하는” 소모적인 투어 끝에 만난 <소셜 네트워크>가 그에게는 “영감으로 충만하고, 도전적이며, 전환이 되는” 작업이었다고 말한다. 기타는 물론이고 비올라와 전자피아노, 글로켄슈필(타악기의 일종)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 데 능한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에게 영화음악은 자신의 다재다능한 음악적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창작의 장이 됐다(그가 너무 열정적으로 스코어를 만드는 바람에 폴 토머스 앤더슨은 그린우드의 음악을 수록하기 위해 자신의 영화를 다시 편집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는 일화도 있다.-편집자). <언더 더 스킨>의 미카 레비는 “뮤지션으로서 곡을 만들 때에는 일정한 스타일 안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한계가 있는데, 영화음악은 그런 면에서 덜 제한적이고 보다 열려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21세기 영화음악과 뮤지션은 긍정적인 협업의 역사를 점진적으로 써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할리우드 영화음악계에 당도한 이 매혹적인 침략자들은, 앞으로 어떻게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해나갈까. 이어지는 지면에서 소개하는 뮤지션들의 영화음악 작업이 그에 대한 일말의 힌트가 되었으면 한다.